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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는 정치군인을 민간인으로 바꾸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다"

박 대통령은 헌법과 삼권분립의 민주적 원리와 가치를, 쓰다가 지루해지면 한쪽으로 치워도 되는 가구쯤으로 여긴다. 헌법에 따라 의회와 행정부가 있고, 삼권분립으로 견제와 균형을 이뤄 발전하는 민주주의의 일상적 가치를 한없이 가벼이 받아들인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개헌 이후 유리그릇 다루듯 유지해온 민주주의를, 헌법 수호를 다짐하고 선서한 대통령이 싸잡아 뒤로 밀어내는 일을 벌인 것이다.

  • 고광헌
  • 입력 2015.07.20 06:58
  • 수정 2016.07.20 14:12
ⓒ연합뉴스

18세기 정치사상가 토마스 페인의 업적은 정치 팸플릿 <상식>(Common sense)을 통해 미국의 독립에 기여한 사실이 첫손에 꼽힌다. 그는 34살 때 영국왕실의 세금정책을 비판하다 1774년 쫓기듯 미국행 배를 탔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써 준 소개장으로 <펜실베니아 매거진> 기자가 된 페인은 <상식>에서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가 꿈꾼 새로운 미국은 자유와 평등이 숨 쉬는 민주공화국이었다. 영국 왕정의 무능과 부패를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리더십 부족이 나올 수밖에 없는 세습권력의 문제를 공격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들을 지배할 권리를 가졌다고 여기는 사람은 금세 거만해진다. 그가 몸담은 세계는 다른 세계와 크게 다르며, 바깥 세계의 진짜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 기회가 거의 없다. 권력을 승계할 무렵 아마 나라 전체를 통틀어 가장 무지하고 준비가 덜 된 상태일 것이다."

생뚱맞게 2백41년이 지난 페인의 이 문장이 떠오른 것은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보여준 정치가 절대왕정시대의 '통치'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말 '배신자' 발언을 시작으로 여당 국회의원들이 선출하고 재신임까지 한 집권여당의 원내대표를 끝내 퇴출시켰다. 페인이 비판한 왕정이나 독재정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헌법의 신성함과 권력분립, 상대 인정, 대화와 타협 같은 공화정의 미덕과는 거리가 멀었다. 박 대통령은 선출된 위임권력임에도 거기에 필요한 민주적 절차와 '상식'을 버렸다. '준비가 덜 된 군주'처럼 독선을 드러냈다.

헌법과 삼권분립 원칙을 위반하면서도 아무 문제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면 절망적이다. 국정원의 대선불법 개입 등에 대한 수사를 지휘하던 채동욱 검찰총장을 퇴출시킬 때도 여론과는 다른 독선의 길을 갔다. 민주주의를 따르는 여론은 채 총장의 검찰권 행사방향이 옳다고 봤지만, 대통령은 자신의 통치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내쳤다. 그는 국민과 언론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서도 큰 관심이 없다. 권력의 불가침적 절대성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다. 결코 '바깥세계'가 대통령의 정치 안으로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다.

대통령의 우격다짐으로 축출된 유승민 대표나 채 총장이 모두 정당한 헌법적 권리 아래 민주주의와 사법정의를 지키려다 찍혀 나갔다는 데에 이르면 그 치명성이 훨씬 도드라진다.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 보수주의자 정도의 정치적 태도를 지닌 유 대표가 졸지에 퇴출당하는 것을 보면서 유신시절을 떠올린 것도 대통령의 이러한 정치적 성향과 행태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고 본다.

박 대통령은 헌법과 삼권분립의 민주적 원리와 가치를, 쓰다가 지루해지면 한쪽으로 치워도 되는 가구쯤으로 여긴다. 헌법에 따라 의회와 행정부가 있고, 삼권분립으로 견제와 균형을 이뤄 발전하는 민주주의의 일상적 가치를 한없이 가벼이 받아들인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개헌 이후 유리그릇 다루듯 유지해온 민주주의를, 헌법 수호를 다짐하고 선서한 대통령이 싸잡아 뒤로 밀어내는 일을 벌인 것이다.

2015년 2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를 방문한 새누리당 지도부와의 접견에서 유승민 원내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유승민 대표를 강제 사퇴시킨 것을 두고 현행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잘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아니다. 토마스 페인의 지적대로 남들을 지배할 권리를 가졌다고 착각하고, 민주주의 발전을 기대하는 국민들을 유령 취급하는 데서 나왔다. 자신의 뜻대로 안 되면, 6·25 한국전쟁 기념일을 맞은 희생자에 대한 애도보다, 메르스 역병으로 만연해진 사회혼란보다, 배신자를 응징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는 도착된 가치관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직접선거로 선출돼 위임 받은 권력을 행사한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정책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국회가 제정한 법률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권한이 있다. 국회 역시 법에 따라 재의해야 한다. 박 대통령은 이 과정에서 어깃장을 놨다. 거부권 행사를 한 뒤 여당 의원들을 겁박해 법률안을 자동 폐기시켰다. 민주화는 군부정권을 민간인 출신 대통령으로 바뀌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경구가 현실이 된 것이다.

<상식>의 열렬한 독자 가운데에는 미국의 초대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2대 대통령 존 애덤스도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워싱턴은 독립전쟁을 지휘하고 미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깔았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미국의 독립은 조지 워싱턴의 칼과 토마스 페인의 펜으로 이루었다"는 헌사가 돌아다닌다고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에도 '상식'의 부활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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