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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자렛(Keith Jarrett)의 피아노가 멈추던 순간

회사를 9년이나 다니지 않겠다는 내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한 달짜리 휴가는 꼼꼼하게 계획했다. 정보에 정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리고 그 중에 내 눈에 들어오는 네 단어들이 있었다. '여름밤, 야외, 고대 로마극장, 재즈연주'. 이 네 단어를 더하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낭만이 들끓였다. 여름밤에, 야외의 고대 로마극장에서 재즈연주를 듣는다니! 거기에 '키스자렛 트리오'라는 단어가 더해졌다. 무조건 가야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30주년 기념 공연'이라는 말까지 더해졌다. 남편과 나는 리옹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여름밤 리옹의 고대 로마극장에서 노을이 지는 것을 보며 키스자렛 트리오의 30주년 기념 재즈연주를 듣기 위해.

  • 김민철
  • 입력 2015.07.21 11:31
  • 수정 2016.07.21 14:12

9년을 다녀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안되겠네. 단숨에 포기했다. 9년이라니. 9년을 다녀야 한 달짜리 휴가를 얻을 수 있다니. 이것이 바로 희망고문이구나. 신입사원인 나는 단숨에 한 달짜리 휴가를 포기해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사 들어오기 직전 나는 인생의 계획을 세웠었고, 그 어디에도 9년이나 회사를 다닌다는 계획은 없었다. 그러므로 내 인생에 한 달짜리 휴가는 없을 터였다. 난 장담했다. 하지만 9년이 흐른 후, 나는 한 달짜리 휴가를 얻었고, 어느새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 안이었다. 인생은 계획처럼 되는 게 아니었다. 하기사 계획대로 되는 인생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9년 동안 회사원으로 사는 건 재미있었냐고? 음......노코멘트)

회사를 9년이나 다니지 않겠다는 내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한 달짜리 휴가는 꼼꼼하게 계획했다. 파리에 유학생이 살던 집을 빌렸고, 부르고뉴 지방의 B&B를 예약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오롯이 내것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나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정보에 정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리고 그 중에 내 눈에 들어오는 네 단어들이 있었다. '여름밤, 야외, 고대 로마극장, 재즈연주'. 이 네 단어를 더하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낭만이 들끓였다. 여름밤에, 야외의 고대 로마극장에서 재즈연주를 듣는다니! 거기에 '키스자렛 트리오'라는 단어가 더해졌다. 무조건 가야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30주년 기념 공연'이라는 말까지 더해졌다. 남편과 나는 리옹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여름밤 리옹의 고대 로마극장에서 노을이 지는 것을 보며 키스자렛 트리오의 30주년 기념 재즈연주를 듣기 위해.

속도 모르고 리옹에는 비가 왔다. 야외공연인데 어쩌자고 계속 비가 왔다. 며칠 동안 머무를 집 주인을 만나 열쇠를 받고, 짐을 내려놓고 리옹 언덕 위 로마극장으로 가는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 안에는 온통 키스자렛의 공연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과, 속도 모르고 계속 오는 비 때문에 불행한 사람들 뿐이었다. 비옷을 입은 사람, 우산을 든 사람, 무작정 비를 맞는 사람, 모두 줄을 서서 로마시대 돌로 만들어진 반 원형 야외극장에 입장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아졌다.

그리고 키스자렛 트리오가 등장했다. 키스자렛은 등장부터 낭만과 거리가 멀었다. 무대에 올라 환호하는 모든 청중들을 향해 인사도 없이, 딱 한 마디만 했다. "No Photo!" 놀랍도록 무서운 어조로. 어떤 귀여움도 인자함도 없이. 그리고 심지어 무대를 등지고 앉아버렸다. 이 무슨 재즈판 글렌굴드인지. 그나마 관중들은 베이스, 개리피콕(Gary Peacock)과 드럼, 잭 드조네트(Jack DeJohnette)가 무대쪽을 향해 앉았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등을 돌리고 앉아 키스자렛은 온전히 음악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간혹 베이스와 드럼을 향해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철저히 관객에겐 무관심했다. 심지어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치는 박수가 그의 음악적 영감을 깨트리는 게 아닐까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키스자렛은 오로지 음악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다. 오롯이 음악에만 빠져, 음악이 클라이막스에 다다르면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흔들었다. 허밍을 했다. 무뚝뚝하고, 무서운 키스자렛이 음악 앞에서는 한없이 애교를 부리고, 몸을 부비고, 춤을 췄다. 음악만을 위해, 자신만을 위해 춤을 추며 연주를 했다. 최면을 거는 것처럼 움직이는 엉덩이 덕분이었을까. 어느새 그렇게 관객들을 모두 그를 따라 음악의 바다에 풍덩 빠졌다.

공연은 어느새 후반부로 접어들었다. 어떤 곡이 끝나자 키스자렛은 유독 오래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마지막 박수 소리까지 그치자 키스자렛은 몸을 숙였다. 거의 피아노에 엎드리다시피 몸을 숙였다. 그리고 피아노를 애무하듯 조용히 조용히 한 음씩 연주하기 시작했다. 여리디 여린 피아노 음들이 계속 이어졌다. 베이스도 드럼도 멈췄고 관객들도 숨을 참았다. 여린 그 곡에 맞춰 모두들 숨까지 가늘게 내쉬는 느낌이었다. 수천 명이 하나가 되어 그의 고요함을 지켜주고 있었다. 지켜주고 싶은 사랑이었다. 지켜줘야만 하는 애틋함이었다. 하지만 새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여린 그 피아노 음들 위로 각종 새들의 울음소리가 합쳐졌다. 왼쪽 숲에서도 오른 쪽 숲에서도 쉬지 않고 새 울음소리가 더해지다보니 결국엔 그 울음소리가 곡의 일부인 것 같았다. 연주가 거의 끝나갈 무렵, 꼬장꼬장한 키스자렛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콘서트 내내 처음으로 본 광경이었다. 내내 관객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앉아서 베이스와 드럼연주자에게만 집중하던 그 사람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새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의 피아노 건반도 침묵했다. 그제서야 인간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멜로디에 귀 기울이던 관객들도 새소리에 귀기울이기 시작했다.

각종 새소리가 콘서트장 전체를 가득 채웠다. 모두들 키스자렛의 침묵에, 새소리에, 바람소리에 그 저녁의 모든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였다. 노을이 지고 있었고, 새들이 울고 있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내내 우리를 감싸고 있던 그 소리가 그제서야 들렸다. 한참의 침묵 후 키스자렛은 몇 개의 음으로 연주를 마무리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그 마법같은 순간에서 깨어나 박수를 쳤다. 박수는 점점 더 거세졌다. 계속 박수를 치며 관객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미소를 주고 받았다. 우리 놀라운 순간을 함께 했어. 알지? 라는 의미가 가득 담긴 미소들이었다.

안다. 타고난 기억력의 소유자인지라 나는 그 곡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곡의 제목조차 알지 못한다. 한국에 돌아와서 키스자렛의 곡들을 다시 찾아서 들어봤지만 비슷한 곡도 찾아내지 못했다. 실은 한 소절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판단할 기준조차 없다. 아마 다시 그 곡을 들려줘도 나는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혹은 음악이 너무 좋다며 이게 무슨 곡이냐고 물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 곡을 결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꼭 기억하고 싶다. 피아노와 새들의 합주를. 피아노가 멈추는 순간 시작되었던 새들의 독주를. 새들의 독주를 듣기 위해 멈춘 피아노를. 그제서야 들리고 보이고 만져졌던 보석들을. 그 보석들을 지금 우리가 오롯이 누리고 있다는 깨달음을. 행복에 정수리까지 찌릿찌릿해지던 순간을. 그 순간의 나를. 우리를.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모든 요일의 기록> (북라이프, 2015) 내용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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