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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시작되다

이 좋은 소식을 회사에 당장 알리는 것은 금물이었다. 많은 선배들은 10주는 넘어서 이야기하라고 조언해주었다. 임신 소식을 일찍 알려봐야 좋을 게 없다고. 어떤 이들은 재계약 문제 때문에 배가 한참 불러오고 나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가졌다고 실토했다고 했다. 진급을 앞둔 나의 친구도 졸음을 이겨가며 진급시험을 다 치르고 인사발령이 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후에 임신소식을 알렸다 했다. 철 모르는 사람들이 나보고 살이 쪘다며 결혼하니 편해졌나봐 하는 농담을 던졌지만 그래도 웃어넘겼다.

  • 이혜린
  • 입력 2015.07.23 12:01
  • 수정 2016.07.23 14:12

[달려, 엄마] 첫번째 이야기 | 엄마, 시작되다

"오빠, 나 임신인 거 같아."

두 줄이었다. 분명한 두 줄. 설마하는 마음으로 회사 화장실 구석에서 테스트기를 해보고는 선명하게 나오는 두 줄에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임신테스터기를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테스터기에 스며드는 두 줄이 선명하게 보이는 순간 그 짧은 순간의 두근거림과 조마조마함. 아이를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것보다도 더 두근거리는 순간이다. 그리고, 선명한 두 줄을 보았다. 아이가 내게 왔다.

석 달 전 3주된 아이를 흘려보내고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아이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유산.

생각보다 흔한 일이라고 했다. 의사는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대부분은 생리처럼 모르고 지나갈 일이라고. 산모님이 너무 일찍 알아버린 것뿐이라고. 그날은 배를 부여잡고 울었다. 하늘에 빌었다.

다음 아이는 부디 건강하게 나에게 오도록 도와 달라고.

마음에 남은 짐과 상처, 그리고 습관성 유산이라도 될까 매달이 조마조마했다.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달거리가 시작되는 것도 짜증 그 자체였다. 이번달도 실패했구나. 연말이라 조금 마음을 놓았던 걸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왔다. 그렇게 크리스마스 즈음, 캐롤 같이 즐거운 나의 노엘이가 왔다.

그리고 제일 먼저 생각난 건 불과 한 주 전에 있었던 회식이었다. 연말이라 술자리가 많았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술을 마셨다는 사실에 갑자기 죄책감이 물밀듯이 솟아올랐다. 괜찮아. 모르고 그런건데 괜찮아 라고 다독였지만 아직까지도 맘 한 구석에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는 건 왜일까. 그렇게 철없는 엄마의 엄마되기 프로젝트는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좋은 소식을 회사에 당장 알리는 것은 금물이었다. 많은 선배들은 10주는 넘어서 이야기하라고 조언해주었다. 임신 소식을 일찍 알려봐야 좋을 게 없다고. 모든 게 안정되고 나서 이야기하는 게 구설수에 덜 오를거라는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어떤 이들은 재계약 문제 때문에 배가 한참 불러오고 나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가졌다고 실토했다고 했다. 진급을 앞둔 나의 친구도 졸음을 이겨가며 진급시험을 다 치르고 인사발령이 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후에 임신소식을 알렸다 했다.

임신을 알고난 후 임신 초기에 누구나 그렇듯 졸음이 쏟아지고 피곤함에 몸둘바를 몰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회사일들을 해내고 야근도 자처했으며 한약을 먹기 때문에 술은 안된다는 핑계를 댔지만 회식엔 참여했고 가끔 회사 화장실에서 5분간 쪽잠을 자며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런 시간을 보냈다.

가족과 아주 친한 지인들 이외에는 모르는 이야기.

그 흔한 SNS에조차 올릴 수 없는 조용한 이야기.

철 모르는 사람들이 나보고 살이 쪘다며 결혼하니 편해졌나봐 하는 농담을 던졌지만 그래도 웃어넘겼다.

성격 급한 이들은 아이는 언제 가지냐며 훈수를 두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곧 가져야죠 하며 모르는 척했다.

아이에겐 괜시리 미안했다. 엄마는 아이에게 매일 미안한 마음만 가지게 된다더니 시작부터 이렇게 미안함을 안고 시작하게 될 줄이야.

임신이 죄는 아니었지만 앞으로 나로 인해 생길 팀원들에 대한 미안함들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앞으로 생겨날 그 무수한 고민들을 마음에 켜켜히 담아두면서 그 사이 아이는 무탈히 자라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가 선포될 10주차, 그날을 기다리며.

다음이야기 : 쓰라린 환영인사

팀장님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지만 돌아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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