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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건축계에는 성차별이 살아있다

  • Lance Hosey
  • 입력 2015.07.26 07:33
  • 수정 2016.07.15 14:12

*이 글은 건축회사 퍼킨스 이스트먼에서 일하는 건축가 랜스 호세이의 허핑턴포스트 블로그를 번역한 글입니다. 그가 2012년에 출간한 책 'The Shape of Green: Aesthetics, Ecology, and Design; (2012)'은 지속가능한 건축 부문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바 있습니다. 그의 트위터 계정은 @lancehosey입니다.

건축이라는 직업과 건축의 이미지는 둘 다 반여성적이다.

껍질 속의 유령, 엘렌버그 프레이저, 프리미어 타워.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비욘세, 'Ghost' 뮤직 비디오

건축에서 성차별은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아마 가장 흔한 것은 업계 내의 여성 차별일 것이다. 건축학교 학생 중 거의 절반은 여성이지만, 졸업 후에 여성의 수는 빠르게 줄어든다. 현업 건축가의 남녀 성비는 지금도 4:1 정도고, 남성들이 여성보다 28% 가까이 높은 소득을 올린다. 2014 연구에 의하면 여성의 60% 이상이 건축계가 자신들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느끼고, 3분의 2는 일종의 성차별을 경험했으며 자주 경험한 경우도 많았다.

여성들은 직업의 보상을 거두는 일도 드물다. 미국 건축가 협회가 1907년에 가장 영예로운 상인 금메달을 만든 이래, 살아있는 여성이 금메달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유일한 여성 수상자는 작년에야 나왔는데, 줄리아 모건은 인정받기 60년 전인 1957년에 사망했다. 최근 20년간 사후에 수상한 남성 건축가는 두 명뿐이었으며 죽은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40명 중 여성은 자하 하디드와 카즈요 세지마 두 명 뿐이었고 세지마는 남성 파트너와 공동 수상했다. 데니스 스콧 브라운은 남편 로버트 벤투리와 함께 작업했으나 1991년에 로버트 벤투리에게만 프리츠커 상이 주어진 사건은 악명 높다.

이런 수치들은 정말 아까운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키라 굴드와 내가 '녹색의 여성: 지속 가능한 디자인의 목소리 Women in Green: Voices of Sustainable Design'(2007)에서 보여주었듯이, 건축업계는 여성의 리더십에서 큰 혜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이라는 직업이 여성을 차별하는 한편, 사회 다른 곳에서는 건축의 이미지를 통해 여성을 대상화한다. 여성의 외모를 이야기할 때 'she's built'라는 표현을 흔히 쓰고, 1957년에 저널리스트 마이크 월러스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 이렇게 물었다. "[마릴린] 몬로를 건축물로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라이트는 대답했다. "지극히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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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이론에서는 두 가지 형태의 '축소'를 이야기한다. 몸으로 축소하는 것(사람을 몸이나 몸의 일부와 동일시하고 대하는 것)과 외모로 축소하는 것(겉모습, 혹은 감각으로 느껴지는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여성의 몸을 건물에 비교하는 것은 이중 축소이고, 건물을 여성에 비교하는 것은 건축가들 사이에서 언제나 흔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건축에 대한 가장 오래된 책에서, 고대 로마인 비트루비우스는 에렉테이온에 늘어선 카리아티드, 즉 여인상 기둥을 노예 상태의 원형 이미지이며 속박의 건축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비트루비우스는 다빈치가 그린, 디자인에 있어서 완벽함의 모델인 '이상적' (남성) 신체 그림을 비롯한 모든 것의 원천이었다.

2천 년 후를 보자. 1970년대와 80년대에 일본 건축가 아라타 이소자키는 의자 등받이나 평면도 등 여러 건축 형태에 특별한 곡선을 자주 사용했다. 1953년 플레이보이 센터폴드에 실린 마릴린 몬로의 몸매에서 딴 곡선으로, 그는 그 선을 '가장 완벽한 곡선'이며 '미국의 미의 심볼'이라고 불렀다. LA의 현대 미술관 등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포르노그래피를 모방한다.

마릴린 몬로에 심취한 건축가는 라이트와 이소자키만이 아니다. 2012년에 세계 초고층 도시 건축 협회는 온타리오 주 미시소가에 있는 앱솔루트 월드 타워를 '미대륙 최고의 고층 빌딩'으로 선정했다. 심사단은 '이 건물들이 이 지역에서 마릴린 몬로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놀랍지 않다. 곡선미있고 섹시한 형태를 보면 자동적으로 연상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심사단은 전부 남성이었다.

'마릴린 자'. 마릴린 몬로 플레이보이 센터폴드 실루엣(1953). 아라타 이소자키, '마릴린' 의자(1973), 일본 깃푸 카미오카 시청 상세도(1976~78). LA 현대미술관 항공 사진(1981~86)

비욘세 놀스의 몸에서 영감을 받은 새 고층 건물을 멜버른에 제안한 호주 건축가들이 있다. 보도에 따르면 엘렌버그 프레이저의 68층 건물 프리미어 타워의 '곡선미'는 비욘세가 최근 발표한 'Ghost' 뮤직 비디오의 비욘세를 모방했다. 비욘세는 바람에 날리는 베일을 몸에 휘감고, 몸에 달라붙는 큰 자루 같은 것에 들어가 온몸을 비튼다.

비욘세가 자신의 몸을 보여준 것도 논란이 되었다. 그녀가 '페미니스트인가 성적 대상인가'하는 진지한 논의가 있었다. 그녀가 자기 몸을 보여주는 방식을 통제함으로써 자신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인가, 아니면 현존하는 남성 권력 구조를 지원하는 것뿐인가? 평론가 벨 훅스는 비욘세를 비롯한 사람들이 '통제를 행사하고 돈을 많이 벌 수는 있지만, 그것과 해방이 같다고는 할 수 없다'고 불평한다. 훅스는 'Ghost' 같은 비디오는 '페미니스트 사고의 위기'의 신호라고 말한다. 여성의 몸을 대중의 소비를 위해 제공하면서 거짓으로 자유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신체를 누가 소유하고 누가 권리를 갖는가?"

여성, 특히 셀러브리티 여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여주느냐 하는 문제가 복잡하듯, 이런 이미지를 건축물로 세워 올리는 것도 복잡한 문제이다. 마릴린이나 비욘세의 몸을 변형해 의자, 시청, 미술관, 고층 건물을 만드는 것은 그저 예술적 영감일 뿐인가, 아니면 더 해로운, 문자 그대로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Ghost'의 가사는 개인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사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탐구한다. 비욘세는 섹스를 전시와 동일시한다. "내 침실은 내 런웨이다." 아이러닉하게도, 이 곡에서는 상업화와 (아마도 남성일) 음악 업계 간부들에게 사용당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노래한다. 그래서 프리미어 타워로 대표되는 자기 이미지의 남용이 정확히 비욘세가 공격하고 있는 타겟으로 보인다.

이 비디오에서는 여러 성적 레퍼런스가 담겨 있다. 마돈나의 '에로티카'(1992)부터 성서에 나오는 베일 댄스, 바디 백 페티쉬, 기타 본디지 행위 등이다. 건축 조상으로 변형된 비욘세는 현대의 카리아티드, 베일에 싸인 노예 소녀가 된다. 기이하게도, 이 건물은 여성의 몸을 본딴 것이지만, 고층 건물은 명백한 남근 심볼이기도 하다. '시가는 그냥 시가일 때도 있다. 그러나 마천루는 언제나 큰 흔들거리는 남근이다.' 윌 셀프가 가디언에 쓴 글이다. '인간 개개인을 지위를 가진 순종적인 일개미로 축소시키는' 권력의 공격적인 이미지다. 여성의 이미지를 '큰 흔들거리는 남근'으로 바꾸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여성의 몸을 남근으로 묘사하는 것은 고대부터 해왔던 일이지만, 만 레이, 브라사이, 마그리트, 한스 벨머 등 20세기 초기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다. 미술 평론가 할 포스터는 '남근이 된 여성' 이미지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남근의 풍부함으로 잘못 인지하게 한다'고 적었다. 1930년대 파리에서 초현실주의자들과 어울렸던 프랑스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은 후에 '베일 뒤의 여성은 이러하다; 남근의 부재가 그녀를 남근으로, 욕망의 대상으로 만든다.'고 적었다. 라캉의 페미니스트 비평은 이러한 이미지의 여성 혐오를 드러낸다. 주디스 버틀러는 '여성이 남근'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은 남근의 힘을 반영한다는 것이고, 그 힘을 나타낸다는 것이고, 남근이 뚫고 들어갈 장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남근 여성은 굴복의 궁극적 심볼이고, 엘렌버그 프레이저는 아트 갤러리, 포르노 사이트, 성적 환타지에서 남근 여성을 가져와 멜버른의 스카이라인에 삽입했다.

건축 평론가 아다 루이스 헉스테이블은 '경탄하는 것을 갖는 도시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고, 결국은 도시는 그 도시가 가질 만한 것을 갖는다.'고 적었다. 우리가 페티쉬적 남근 심볼이 늘어선 스카이라인을 가질 만한 사람들인가? 건축에서 여성의 몸을 모방하는 것은 여성을 대상화하지만, 건물을 토템, 누가 권력을 가졌는지 상기시켜 주는 암호에 불과한 것으로 한정짓는, 건축을 대상화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의 몸을 건축의 모델로 삼는 것은 건축이 존재한 이래 늘 있어왔으나, 어쩌면 이제 건축가들이 어디서 영감을 얻을지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허핑턴포스트US의 Sexism Is Alive and Well in Architecture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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