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북중국경의 역사 | 경계가 없는 곳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으로 인한 대기근이 중국을 휩쓸던 당시, 중국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대규모로 북한으로 향했다. 중국 당국이 이들의 탈주를 막기 위해 손을 쓰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결과적으로 5만에서 6만으로 추정되는 중국계 한인들이 북한에 갔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90년대 들어 상황은 바뀌었고 중국으로 향하는 북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북한에 들이닥친 기근을 피해 사람들은 고향의 가난에서 벗어나 도망치고 있었다.

  • NK News
  • 입력 2015.07.29 06:59
  • 수정 2016.07.29 14:12

그 어느 때보다 경계가 삼엄하지만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의 국경통제가 가장 심했던 시기에 비하면 느슨하다

필자가 북중 국경 지역을 처음 방문한 것은 2007년 가을이었다. 여느 공산주의 국가의 국경과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보고 꽤나 충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소련의 모델을 따라 국경을 삼엄하게 경비했다. 그들은 바깥세상과의 정보 교류를 통제하는 것이 국가 안보에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했고, 그러므로 국경을 통제하기 위한 가시 박힌 철책과 경비대, 무기가 필요했다. 자국민을 포함한 어떤 외부인도 이 지역에 들어올 수 없었다.

하지만 2007년 당시 북중 국경은 그렇지 않았다. 철조망도 없었고 경비 병력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해 여름 필자는 국경을 따라 수 백 킬로미터를 걸었지만 중국 군인을 마주친 것은 단 한 번이었다. 서너 명의 군인들이 커다란 나무 그늘에 앉아 군용차를 옆에 두고 여유로운 점심시간을 즐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지나가는 자동차에 대해서도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요즘은 그 분위기가 바뀐 것 같지만, 2007년 당시 그리고 그 이전의 중국은 국경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역사 속의 국경

놀랍지만 조선인이 흔히 만주로 알려진 중국 북동지역에 이주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청나라 시절의 국경 경비가 훨씬 탄탄했을 것이다. 이 금지 조항은 1870-80년대에 이르러 해제되었고 이후 조선인들은 경작 가능성이 있는 광활하고 인구가 적은 만주지역으로 본격적인 이주를 시작했다.

이주 규모에는 기복이 있었지만 1950년대 초반에 이르면 너끈히 백만은 넘는 한인(韓人)들이 국경 지대의 압록강 서쪽과 두만강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한국이 식민지배를 당하고 만주는 괴뢰 정부에 의해 통치되던 1930년대에는 변경 지역을 둘러싼 통제가 전무했다.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 중 유별나게 식민지의 산업 발전에 힘을 쏟았다. 이들이 기간산업에 많은 투자를 하면서, 한국과 중국을 잇는 현존하는 다리는 거의 모두 이 시기에 지어졌다.

1950년대와 60년대, 국경 관리는 여전히 매우 느슨한 상황이었다. 언젠가 나이든 북한 관료가 불평했던 대로, 이 지역에서는 보위부의 통제를 벗어난 엄청난 양의 밀수품이 오고갔다. 국경 건너편 강둑에 사는 이들이 북한의 친인척을 방문할 때 아무런 서류 절차 없이 오고갈 수 있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945년 8월 소련군이 일본과 싸우며 남하하고 1950년부터 53년까지 한국전쟁이 이어지며 한국과 중국 사이 두 강을 연결하던 다리 대부분이 손상되거나 사라졌다.

다리들은 이후 중국의 문화혁명 기간 동안 고의적으로 폭파되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비해 무역 총액은 급감했고 명맥을 이은 무역의 대부분은 단둥과 신의주를 잇는 기찻길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다수의 오래된 다리들은 쓸모를 잃었다. 다리에 있던 검문소는 폐쇄되었고 몇몇 다리는 국경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양국의 합의 하에 사라졌다. 대개의 경우 앞으로 다리가 다시 필요해질 경우에 대비하여 다리를 약간만 훼손시켰다.

하지만 다리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 어려워진 것은 아니었다.

압록강 하류는 중국이 단둥을 기지로 삼아 포함을 보유한 해군을 주둔시킬 수 있을 만큼 넓다. 하지만 두만강과 압록강의 대부분은 얕고 좁아서 별 어려움 없이 건널 수 있다. 더욱이 두 강 모두 겨울에는 얼어붙는다. 두꺼운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사람에게 강을 건너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그래서 필자가 빈번하게 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개연성을 가진다. 북한이 중국보다 훨씬 부유하고 안정적이었던 문화혁명 시기, 중국에 살던 한인 할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져 몇 주 뒤, 구하기 어려운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대야와 손주들을 위한 사탕을 구해 돌아왔다. 당시 한인 노인들이 국경을 넘어 비밀리에 북한에 있는 친척을 방문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했다.

이러한 여정이 어마어마한 규모로 이루어졌던 시절이 있었다.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으로 인한 대기근이 중국을 휩쓸던 당시, 중국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대규모로 북한으로 향했다. 중국 당국이 이들의 탈주를 막기 위해 손을 쓰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결과적으로 5만에서 6만으로 추정되는 중국계 한인들이 북한에 갔다. 북한 당국은 난민들을 환영했고 이들을 위한 시설을 지었다. 이들은 곧 거주지와 직업을 배정 받았으며 배급제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결국 중국으로 돌아갔지만 다수는 영구적으로 북한에 정착했다.

빈번하게 이루어지던 비밀 방문과 대약진 시기 동안의 폭발적인 이주에도 불구하고 북한 사람들과 중국인들 모두 양국에 영구적으로 귀화하려 하지 않았다. 중국인들과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들 모두 보통 북한 정권이 자신들을 수용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았고, 붙잡히면 마오쩌둥 집권 하의 중국으로 강제 송환될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의 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통제가 심한 국가였으므로, 중국에서 건너간 난민들은 북한에 숨어들었더라도 보통 몇 주 안에 발각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모든 경제적 활동이 국가의 감시 하에 놓여있던 마오쩌둥 집권 하의 중국에서 일자리와 음식을 찾아 헤매던 한인들도 마찬가지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려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당시 중국은 북한보다 훨씬 가난한 나라였고 귀화하기에 그리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다.

사진: Ray Cunningham

방향 전환

잘 알려진 것처럼, 1990년대 들어 상황은 바뀌었고 중국으로 향하는 북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북한에 들이닥친 기근을 피해 사람들은 고향의 가난에서 벗어나 도망치고 있었다. 동시에 중국이 개방되고 시장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북한 사람들은 중국에서 저임금과 열약한 환경만 감수한다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건너오는 북한 사람들은 모두 불법 체류자였기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중국에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적게 줄잡아도 1990년대 후반에는 적어도 15만 명 많게는 20만 명이 중국으로 건너왔다. 이 시기 중국 어디에서나 탈북난민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북한의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하고 중국 당국과 인민들이 북한 사람들을 거칠게 대하기 시작하면서 탈북난민의 수는 급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측 국경경비는 2010년까지도 허술했다. 2007년 중국의 고위급 공안 간부는 필자에게 "우리는 북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만 우리나라도 별 다를 게 없기에 탈북난민들이 강도나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이들을 단속하지 않는다. 만일 이들이 살인과 같은 심각하게 폭력적인 범죄를 저지른다면 개입할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는 이들을 이해하며 단속하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가 현상을 미화한 것일 수도 있지만 중국 당국은 서구 언론이 보도하는 것과는 달리 탈북난민들을 용인하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2010년 즈음 상황이 달라졌다. 중국은 국경을 따라 철책을 지었고 2012년까지 거의 완성했다. 국경의 양 쪽 모두 인구밀도가 낮은 국경 중앙 지대에는 이 철책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주장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철책은 두만강의 입구에서 시작해 무산에 이르기까지, 약 200 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에 빽빽이 세워져 있다. 이 철책 자체는 엉성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철책에 설치된 CCTV 카메라와 중국 공안들의 감시를 무시할 수 없다.

최근 몇 년 동안 국경 지대에 주둔하는 중국 공안과 군인들이 수적으로 뚜렷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정식 검문소가 지어졌고 수상쩍어 보이는 관광객들, 특히 크고 성능 좋은 카메라를 가진 외국인들은 억류되거나 적어도 국경 지역 여행에 제한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 정부가 수십 년 동안 허술하게 놔두었던 국경 지역의 경비를 갑자기 강화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으로 가는 북한 주민의 수가 기껏해야 만 명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감소했음에도 국경경비가 강화되었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혹자는 이전보다 국경 경비에 한층 신경을 쓰는 김정은 집권 후의 북한 측에서 중국에 국경 경비 강화 조치를 제안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중국에 비해 북한 쪽의 국경 경비가 훨씬 강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치의 규모와 효과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북중 국경의 모습은 점점 더 구 공산주의 국가들의 국경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아직도 북한에서 연줄과 돈이 있는 사람들은 중국으로 가는 안전한 통로를 협상할 수 있다. 즉, 북중 국경통제에서 여전히 더 결정적인 역할은 중국보다는 북한이 하고 있다.

글쓴이 안드레이 란코프(Andrei Nikolaevich Lankov)는 1980년대에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수학한 세계적인 북한 전문가입니다. 최하영이 번역하였으며, 메인 사진은 Roman Harak이 찍은 것입니다. 원문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NK News 한국어판에 게재된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북한 #중국 #국경 #NK News #NK 뉴스 #안드레이 란코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