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온 국민이 요리사가 되면 더 행복해질까?

요리와 음식에 대한 집착은 고(高)소득의 산물이다. 어느 나라건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서면 요리와 음식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불고 있는 미식 열풍은 성격이 좀 다르다. 열기를 이끌고 있는 요리나 요리사가 전형적인 미식과는 거리가 있다. 요리는 파인다이닝(fine dining·고급 취향 식사)을 지향한다기보다는, 어떻게 집에서 한 끼를 때울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또 대중적인 음식 체인을 이끄는 이나 30년 이상 중국 요리를 해온 요리사가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

  • 김방희
  • 입력 2015.07.15 12:23
  • 수정 2016.07.15 14:12
ⓒgettyimagesbank

이제 막 열대야가 시작됐다. 잠 못 드는 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애꿎은 TV 리모컨을 두드리는 일뿐이다. 수십 개의 채널을 서핑한 후, 비로소 '쿡방'·'먹방' 열기를 실감한다. 대부분 채널이 이름만 다를 뿐 똑같은 형식의 예능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이름난 셰프들이 나와 조리를 하거나 유명인들이 요리를 먹는 식이다.

심야에 펼쳐지는 요리 향연은 당장 보기 즐겁다. 하지만 언제나 곤혹스러운 상황으로 끝이 나고 만다. 무의식중에 냉장고를 뒤적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재료만 있다면 마치 TV에 나오는 셰프들처럼 요리할 수 있을 것이란 착각에 빠진 채.

요리와 음식에 대한 집착은 고(高)소득의 산물이다. 어느 나라건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서면 요리와 음식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다. 와인이나 재즈가 취향의 일부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먹고 살만 해지면서 미식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그 결과 청년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는 음식 문화의 불모지인 영국을 바꿔놓았다. 전직 축구선수 출신 셰프 고든 램지는 미국과 유럽 국가에 식도락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심지어 선진국 중산층만 돼도 한때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불렸던 스페인의 엘불리와 그 곳 셰프 페란 아드리아쯤은 알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지금 불고 있는 미식 열풍은 성격이 좀 다르다. 열기를 이끌고 있는 요리나 요리사가 전형적인 미식과는 거리가 있다. 요리는 파인다이닝(fine dining·고급 취향 식사)을 지향한다기보다는, 어떻게 집에서 한 끼를 때울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또 대중적인 음식 체인을 이끄는 이나 30년 이상 중국 요리를 해온 요리사가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평범한 재료로 간편하게 조리해, 값싸게 식사를 해결하는 노하우를 전수해준다. 국민들은 이들의 현실적 조언에 열광한다. 이 때문에 파인다이닝을 지향하는 셰프는 예능 프로그램의 주역들을 엔터테이너로 폄훼하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 미식 열기는 선진국과 달리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경제·사회적 환경이 작용하고 있다. 장기 불황으로 인한 가처분 소득 감소와 싱글(single) 가구의 증가다. 급증한 가계 부채 때문에 중산층 이하 계층의 가처분 소득은 크게 줄었다. 중산층은 소득의 4분의 1을 빚 원리금 갚는 데 쓰고 있다. 빈곤층은 자신의 소득으로도 빚을 갚지 못할 지경에 처했다. 이들은 이전처럼 자주 외식을 할 수 없다. 불황이 닥치면 가장 먼저 줄이는 것이 외식비다. 게다가 혼자 사는 가구의 비율이 전체 넷 중 한 가구가 됐다. 혼자 외식하는 것조차 힘든 문화에서 이들은 어떻게 식사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가 됐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의 미식 열풍은 고소득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작은 사치(small indulgence)에 가깝다. 적은 돈으로 사치의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소비 트렌드다. 이 말은 1990년대 중반 페이스 팝콘이 쓴 소비 트렌드 분석서 <팝콘 리포트>에 처음 등장한 용어다. 그녀는 소비자들이 자신이 감당할 만한 몇 가지 품목에 집중해서 사치스런 소비를 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예측은 불황기에 잘 들어맞는 것으로 나타났다. 요즘 같은 시기에도 커피 전문점과 빙수집, 화장품 가게에는 사람들이 득실거리고, 네일숍은 예약 없이 갈 수 없는 것이 전형적인 예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약간의 시간과 돈을 투자해 자신과 가족을 위한 요리를 하며 약간의 호사를 누린다.

하지만 작은 사치에는 맹점이 있다. 지속되면 중독이 되고, 낭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에 대한 존중이나 남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려던 습관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야 만다. 매일 커피 전문점에 들르는 이나 매주 네일숍에 가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얇아진 지갑에 허망해 한다. TV에 등장하는 셰프들의 조언에 따라 음식 재료들을 사들이던 이들도 마찬가지다. 미디어는 앞으로도 미식에 대해 자주 조망을 하겠지만, 일시적 유행으로서의 미식 열풍은 곧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먹고 사는 것조차 고단하기 그지없는 우리들의 서글픈 자화상을 반영한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제민포럼에 게재된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김방희 #사회 #문화 #요리 #음식 #방송 #쿡방 #먹방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