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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코리아 인터뷰] 역사여행가 권기봉 "당신이 알고 있는 그곳은 서촌이 아니다"

  • 김병철
  • 입력 2015.07.15 12:00
  • 수정 2015.07.19 12:23

을지로 롯데백화점 본점 앞 지하엔 300m 길이의 하수도가 있다.

2012년 서울 을지로 입구 사거리에서 벽돌식 하수관거가 발견됐다. 서울시는 이 하수관거의 건설 시기를 1900년대 전후로 추정했다. 약 100년 전 하수구가 발견된 것이다.

조선 이후로만 계산해도 약 600년간 수도였던 서울은 조선, 일제강점기, 근현대사의 흔적을 모두 담고 있는 도시다. 하지만 100년 전 건설된 하수관거처럼 우리가 모르는 역사가 곳곳에서 숨어 있다.

권기봉 작가는 이런 서울의 역사와 숨겨진 일상을 기록한다. 서울에 대한 책만 세 권을 냈다. 지난 26일 종로에서 만난 그는 서울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잔뜩 풀어냈다.

가려진 서울의 역사 5

경복궁 서쪽 지역이 수년 전부터 '서촌'으로 불리고 있다. 북촌 바로 옆이 서촌이라는 게 이상하기는 하다.

1. 서촌은 거기가 아니다

서울의 북촌, 남촌 등을 나누는 기준은 청계천이었다. 서촌은 신문로와 정동 일대다. 지금 서촌(통인동 인근)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원래 한자로는 상촌(上村), 우리말로 웃대다.

3, 4년 전부터 그 지역에서 문화운동을 하는 한 단체가 경복궁의 서쪽지역이니 서촌이라는 식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걸 미디어가 받아쓰면서 서촌으로 굳어졌다.

청계천은 동아일보 건물 부근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그 지역을 서촌이라고 부를 근거가 희박하다. 그런데 또 종로구청에선 이 지역을 세종이 태어난 곳이라며 세종마을이라 부른다.

2. 일제는 독립문을 보호했다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 앞엔 돌기둥 두 개가 있다. 맞이할 영(迎)자에 은혜 은(恩)자의 영은문 돌기둥인데, 한양에 도착한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문이다. 사대주의의 상징이던 영은문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묵인' 아래 헐렸다.

독립협회는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경성부청(서울시청)은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을 수리하고, 1936년 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했다.

일본은 조선의 자주독립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의미하는 상징물로 이용한 것이다. 즉 중국의 전통적인 종주국 지위를 청산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조치였다.

3. 서대문형무소엔 가려진 역사가 있다

1908년 들어선 서대문형무소의 옛 이름은 경성감옥이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투옥됐고, 군사독재 시절엔 민주화 운동가가 수감됐다.

80년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 서대문형무소엔 1945년 8월 15일까지, 딱 ‘절반의 역사’만 전시되고 있다. 항일에 대한 내용만 있고, 민주화운동은 사진 판넬 한 개가 전부다. 우리가 얘기하기 쉬운 항일만 넣은 건데, 그건 '샌드백'과 마찬가지다.

해방 후 독재정권기의 서대문형무소 역사는 빼버린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대상’이 아직도 살아있고 주요 정치세력으로 잔존하고 있어서 올곧게 보지 못하고 있다. 없는 걸 있다고 하는 것도 왜곡이지만, 있는 걸 가리는 것도 왜곡이다.

4. 국립서울현충원엔 독립운동가의 가묘가 있다

서울 동작동 현충원엔 한국전쟁에서 죽은 군인, 경찰 그리고 전임 대통령의 묘도 있지만, 독립운동가의 가묘(假墓), 즉 정식으로 묘를 쓰기 전에 임시로 쓰는 시신 없는 묘도 있다. 그 주인공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이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은 양 장군의 묘에서 시신의 목을 잘라 시가지에 내걸었다. 해방 후 북한은 양 장군의 유해를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했고, 남한은 서울현충원에 가묘를 만들고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평양 인민문화궁전

국립현충원에 따르면 시신이 없을 경우엔 가묘가 아니라 이름을 새긴 위패만 모시게 돼 있지만, 북에 대한 자존심 문제 때문인지 항일운동가 양세봉은 가묘 형태로 모셔져 있다. 즉 양 장군의 가묘를 만든 건 독립운동의 종주국이 남한이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남과 북의 자존심 싸움이 많았는데, 예를 들면 북한이 평양에 인민문화궁전을 만들자, 남한은 그걸 넘어서기 위해서 세종문화회관을 만들기도 했다.

동국대에서 정각원이란 이름으로 쓰이고 있는 옛 경희궁 숭정전

5. 일본 사찰에 팔려간 경희궁

일제는 경성중학교를 만든다며 경희궁 건물들을 모두 철거해 팔아버렸다. 목조건물은 해체, 이전, 재조립이 가능하다. 경희궁 중심 건물인 숭정전은 (국내의) 일본 절로 팔려가 법당으로 쓰였다. 그 절이 있던 곳이 지금의 동국대 자리인데, 현재 학생들에게 다도 등을 교육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희궁 정문(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기리는 일본 절(박문사)로 옮겨졌다. 박문사가 있던 곳은 지금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인데, 바로 밑에 일제가 만든 장충단공원이 있다.

장충단은 조선시대판 현충원과 같은 곳으로, 을미사변 때 민비를 지키다 숨진 이들을 위해 고종이 만든 제단이었다. 왕실을 위해 일하다 희생당하면 대대손손 기려준다는 메시지를 주는 곳인데, 일제는 그런 제단을 공원으로 만들고 주변에 유곽(사창가)을 만들어 희화화했다.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든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서울에 숨겨진 군사시설 5

1. 장충동 족발집엔 방공호가 있다

방공호는 1940년대 전엔 없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의 폭격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장충동엔 일본 영관급 이상 장교들이 많이 살았고, 이들이 폭격을 피할 수 있게 방공호를 팠다. 그 지역이 개인땅으로 변했고, 지금은 한 족발집의 새우젓 저장고로 이용되고 있다.

2015.7.19 | 지도 크게 보기©  NAVER Corp.

2. 세운상가터는 폭격 대비용이다

미국은 떨어지면 불이 나는 소이탄을 사용했다. 당시 일본, 조선에는 목조 건물이 대부분이었고, 한 번 불이 나면 주변으로 번지기 좋은 구조였다. 종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서울은 동서축을 기본으로 형성되어 왔다. 일본의 대응은 동서 방향으로 불이 번지지 않게 중간 중간에 집을 허물어 공터(소개공지)를 만드는 거였다.

대표적인 게 현재 남북으로 길쭉하게 들어선 세운상가 터다. 이후 그곳이 한국전쟁 때 몰려든 피난민으로 천막촌이 되자, 정부가 밀어버리고 세운상가를 만들었다. 종로를 남북으로 가르는 도로 대부분은 일제 말기의 소개 공지였다.

3. 경희궁에도 방공호가 있다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사이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방공호가 있다. 주변에 있던 조선총독부 직원들의 피난용 방공호로 추정된다. 110여 미터 길이에 20개 정도의 방으로 이루어졌다.

1980년대까지도 민방공 훈련을 할 때 한국통신은 이곳으로 통신시설 이전 훈련을 했다. 최근까지 청소용 공구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어 왔는데, 서울역사박물관은 이곳을 수리해 문화재를 보관하는 수장고로 사용하거나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4. 유진상가는 탱크 진지다

서대문구와 은평구 사이 홍은동 사거리엔 유진상가(1970년 건설)가 있다. 만약 북한군이 구파발 쪽으로 쳐들어올 경우 이곳을 통과해야만 서울에 진입할 수 있다. 서울의 마지막 방어선이다.

박정희 정권은 유진상가 1층 기둥 사이에 빈 공간을 만들었다. 유사시 북한군의 곡사화기를 피할 수 있는 탱크 진지다. 그리고 후퇴할 경우 한쪽 기둥만 폭파하면 건물이 주저앉도록 설계했다.

1978년 4월, 한창 건설중인 압구정 현대아파트 앞에서 농부가 소를 몰며 밭을 갈고 있는 모습.

5. 강남 개발은 전쟁과 관련있다

강남 개발은 단순히 토지 개발이 아니라 남북 대치 상황의 결과다. 1968년 북한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기습했다. 이른바 ‘1.21사태’다. 같은 해에 미군 정보선인 푸에블로호가 북에 나포됐고, 울진과 삼척에서는 북한 무장군인들이 침범해 휩쓸고 다니는 사태가 잇따랐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이 향토예비군 창설, 주민등록제도 강화, 서울 요새화 사업을 추진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남산 1, 2호 터널도 교통 소통보다는 유사시 정부기관의 방공호로 이용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추진된 것이 서울의 동부나 서부 지역을 확장하려는 계획 대신 한강 아래에 있는 강남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다리가 끊겨 피난 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상하수도나 교통 등 사회 인프라가 없었기 때문에 이주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러자 정부는 명문 사립고들의 강남 이전을 추진했다. 경기고, 배재고, 경기여고 등이 이전하자 요지부동이었던 사람들이 아이들 교육 때문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서울은 이런 복잡다단한 환경과 그에 대응하는 정책들을 통해 만들어진 도시다.

권기봉 작가가 경복궁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 조선총독부, 옛 서울시청 건물이 '대일본(大日本)'자를 나타낸다는 주장이 낭설이라고 했다.

= 오해이자 오류다. 산꼭대기 말뚝도 대부분 무속인이 박거나 측량을 위해 박은 거지 지맥을 끊기 위한 게 아니다. 일제가 그렇게 전근대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세련된 방식으로 지배구조를 만들었다. 도로 구조를 바꿔서 통제하기 쉽게 만들었다. 율곡로가 한 예다. 프랑스 파리엔 골목이 너무 많아서 시위 진압이 어려웠는데, 프랑스 혁명 후 바리케이드를 쳐도 뒤로 돌아갈 수 있게 방사선으로 도시 구조를 완전히 바꾼 걸 일본이 배워서 서울에 써먹었다.

옛 서울시청(경성부청사) 설계에 참여했던 일본인이 당시 잡지에 쓴 글을 보면, 태평로와 그 뒤 무교동 길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궁(弓)' 형태로 만드는 게 가장 합리적이었다고 되어 있다. 실제로 근처 건물에서 내려다 보면 이 건물은 서울광장을 향해 한껏 활시위를 당긴 모양을 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일(日)자 형태이긴 하지만, 건물 안에 중정(中庭)을 두는 게 당시 스타일이다.

'대일본' 주장이 나온 건 '조선총독부를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초 들어서다. 철거를 위해 여러 명분이 필요했던 때다. 피식민지인이 가질 수 밖에 없는 피해의식을 심리적으로 잘 계산한 거다. 일본은 식민지 정책을 다 문서화했다. 문서로 남기는 것은 근대화 된 사회의 특징이다. 그런데 '대일본(大日本)'형태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다.

- 조선총독부를 보존했어야 한다는 건가.

= 조선총독부가 그 자리에 계속 서있는 것이 불편하기는 하다. 서울광장에서 경복궁과 백악산, 북한산으로 이어지는 시선의 흐름을 모두 끊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분리 절단한 뒤 다른 곳으로 옮겨서 박물관 등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건물을 철거한다고 일제 잔재가 청산되고 피식민의 기억이 극복되는 건 아니다.

일개 건물을 철거하면서 역사 청산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조금만 들여다봐도 그렇지가 않다. 기본적으로는 일제의 지배 이념에 따라 이 땅에 이식된 제도와 시스템 등을 수정해야 할 거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철거, 그것도 ‘스펙타클‘한 폭파 방식으로 철거하는 쇼를 한다? 정치적으로는 의미있는 이벤트였을지언정 오히려 역사 망각을 부추기는 지름길이 아니었던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일례로 그 외의 다른 네거티브 헤리티지, 즉 부정적인 문화유산들은 대부분 철저히 방치되고 있다.

중국에 있는 일본의 러일전쟁 승전탑

중국은 일본이 항일지사를 수감했던 뤼순감옥(안중근, 신채호도 수감)을 근현대 역사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고, 근처에 있는 일본의 러일전쟁 승전탑을 전망대 겸 역사 교육 현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부정적인 기억이 서려 있는 유산을 보존하고 교과서로 사용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부정적인 역사의 현장들을 그저 부끄럽다며 멀리하고 심지어 훼손하고 있다. 우리가 고구려의 찬란했던 역사를 말하지만 그런 것만 역사는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취사 선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긍정과 부정을 폭 넓게 공부하고 고민할 때 역사를 보는 균형 잡힌 시각이 생기지 않겠나. 그런 면에서 20세기 초 한반도 역사의 살아있는 증거이자 본산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도 적절한 위치로 이전해 근현대사박물관이나 역사관으로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철거되는 조선총독부

- 권 작가에게 서울은 어떤 도시인가.

= 단위 면적당 한국 역사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덮을 수 없는 역사책과 같은 공간이다. 다만 워낙에 부침이 많았기 때문인지 국내 다른 도시들의 사정도 크게 다를 건 없지만 ‘서울'이라는 오랜 도시의 역사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단절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조선의 수도 한양, 일제의 도시 경성, 그리고 대한민국의 중심도시 서울 같은 식으로.

그러나 사람의 삶과 역사가 그러한 것처럼 서울이란 도시의 그것도 단순히 조선, 일제강점기, 해방 뒤로 쉽게 나눌 수 없다. 오랜 기간 무수한 변화들이 중첩되면서 진보해 왔고 또 후퇴하기도 했었다. 그런 과정에서 뿔뿔이 파편화되어 일견 별개의 장소와 역사로 기억되는 것들이 적지 않다.

나는 그 속에서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맥락을 짚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서울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고색창연한 목조 문화재들과는 달리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근현대 유산들에 대해서는 무관심이나 무지 탓에 괄시해 풍화돼서나 심지어 정치적인 이유로 없애버리려는 시도들이 적지 않다. 더 늦기 전에 기록해야 할 이유다.

역사란 것은 다 지나간 옛 일의 모음이 아니고, 외워야 할 것들로 가득한 지식의 백과사전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의 여러 사회 갈등에 대한 해결의 단초를 제시해주고, 또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주는 고마운 스승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권기봉

1979년 3월 4일 출생

1998 충북과학고등학교 졸업

2006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 졸업

경력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SBS 기자

YTN 라디오 '권기봉의 걸으며 생각하며’ 등 진행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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