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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각의 제국, 엄마라는 식민지

지금까지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이렇듯 '가사노동하는 어머니-아내'를 신성시하는 목소리 그 자체가 여성 억압의 근원이었음을 지적해왔다는 역사적 사실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 가사 노동을 여성에게 모두 떠맡기고 그것을 '숭고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칭송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마치 타히티에서 노동하는 노예들을 바라보는 고갱의 감상적 시선을 연상시킨다. 혹은, 기왕 황교익이 일제 식민지 시절을 언급하였으니, '조선의 미'를 예찬하던 일본 지배층의 아련한 눈빛과도 유사하다 할 수 있겠다. 당연히 그러한 노동은, 수혜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전원적 풍경의 일부로 감상의 대상이 된다. 자신이 하는 고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 노정태
  • 입력 2015.07.15 08:34
  • 수정 2016.07.15 14:12
ⓒgettyimagesbank

1.

나는 황교익이 내게 "자유기레기"라는 폭언을 퍼붓기 전부터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가 '수요미식회'에 출연하기도 전의 일이다. <미각의 제국>이 나왔을 때 그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책을 꺼내놓고 뒤적거리며, 최근의 논란에 대해 한 마디 덧붙여본다.

황교익의 칼럼 "'백주부' 백종원에 열광? 맞벌이엄마 사랑 결핍 때문"(문화일보, 2015년 7월 12일)을 읽고, 나는 경향신문에 "엄마 없는 하늘 아래"(경향신문, 2015년 7월 13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나는 황교익의 칼럼이 '어머니즘'에 몰입한 나머지, 그가 집중적으로 거론하는 '맞벌이 여성'들에게 무심하고 잔인한 말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물론 내 칼럼에는 그 내용만 들어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런데 황교익은, 인터넷에 기사가 올라온 지 고작 한 시간 가량 지난 시점에서, "말하지 않은 것도 말하였다 하는가"라는 제목의 블로그 게시물을 올렸다. 자신의 칼럼은 '맞벌이라는 현상이 있었고 그로 인해 80-90년대생들이 '엄마가 해주는 집밥'을 못 먹고 자랐다는 사실을 직시했을 뿐, 여성들에게 죄책감을 부추긴 바 없다'고 반론했다.

그 과정에서 "글 읽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기레기", "자유기레기" 같은 표현이 등장하였는데, 그러한 표현은 어떤 면에서 부차적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이 여성차별적인 내용을 생각하고 또 글로 표현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황교익은 7월 12일자 칼럼에서 맞벌이 여성들의 죄책감을 건드린 게 맞다. 그 내용은 지난 블로그 게시물 "말한 것도 말하지 않았다 하는가"에서 상세하게 다루었으므로, 오늘은 좀 더 넓고 본질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2.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어머니의 수와 같다"는 말을 들었다. ①어머니가 자식에게 먹이는 음식만큼 사랑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은 이 세상에 없다는 말일 것이다. ②어머니의 음식에 대한 이런 애착은 어머니가 부재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바로 곁에서 매일 먹을 때는 모른다는 말이다. ③아내의 음식도 그럴 것이다.(94쪽, 원문자와 강조는 인용자)

<미각의 제국>의 서른한번째 항목 "아내"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과연 그럴까?

①에 대해 우선 생각해보자. 저 문장은 사실의 기술이라기보다는 어떤 이상적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므로, '세상 모든 어머니가 자식에게 정성스럽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지는 않는다' 같은 사례 나열식 반박을 하지는 않겠다. 황교익의 칼럼이 SNS에 등장한 후 '어렸을 때 우리 엄마가 나한테 해준 맛없고 이상한 음식'을 토로하는 작은 축제가 벌어졌었다는 사실만 기록해 두기로 한다.

①의 본질적인 문제는 그것이 개념상 여성일 수밖에 없는 '어머니'에 대한 성차별적 발언이라는 데 있다. 성차별이라고? 저것은 어머니의 음식과 사랑을 찬양하는 말 아닌가? 그렇다. 하지만 그것도 성차별이다. '적대적 성차별'이 아닌 '호의적 성차별'이란 말이다.

어머니나 부인의 역할, 특히 가사 노동에 대해 과도하리만치 상찬을 쏟아붓는 것은, 위에서 인용된 트윗에서 말하는 바 "호의적 성차별"에 속한다. 가사 노동은 여자(라기보다 어머니+아내지만 그 외의 여성들은 존재 자체가 거론되고 있지 않다)의 몫, 그 밖의 것은 남자의 몫, 이렇게 세상을 나누어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성차별적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황교익이라는 한 사람의 가정 생활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가 없고, 직접적으로 간섭할 바도 아니며, 이 글 또한 그의 개인사에 대한 어떠한 예단과 평가도 담고 있지 않음을 명백히 해둔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밑줄까지 그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설령 남편이 가계 수입의 전부를 벌어오는 경우라 하더라도, 자녀 양육과 가사 노동에서 일정 부분을 분담하는 것은 현대적이고 평등한 가정을 이루는 기본이다.

'성차별'이라는 말이 과도한가? 표준국어대사전은 차별을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성을 낮춰보는 것 만큼이나, 불필요하게 '숭배'하는 것 역시, 차별의 개념 정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일이다.

아내가 단지 내 미각만 조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조정하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다. 어머니가 어린 나를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아내가 그러고 있는 것이다. 음식을 해서 먹인다는 것은 곧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일이다. 이것은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의 행위이다. 아내가 내 삶의 조정자 노릇을 할 수 있는 권위는 이 사랑이 부여한 것이다.(95쪽)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나는 지금 황교익이라는 사람의 개인적 삶에 대해 그 어떤 예측이나 평가도 하고 있지 않다(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 또 밑줄을 그었다. 이 게시물은 그의 책에 담긴 내용의 '담론적 차원'에 대한 평가지, 저자의 '삶'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이렇듯 '가사노동하는 어머니-아내'를 신성시하는 목소리 그 자체가 여성 억압의 근원이었음을 지적해왔다는 역사적 사실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

가사 노동을 여성에게 모두 떠맡기고 그것을 '숭고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칭송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마치 타히티에서 노동하는 노예들을 바라보는 고갱의 감상적 시선을 연상시킨다. 혹은, 기왕 황교익이 일제 식민지 시절을 언급하였으니, '조선의 미'를 예찬하던 일본 지배층의 아련한 눈빛과도 유사하다 할 수 있겠다. 당연히 그러한 노동은, 수혜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전원적 풍경의 일부로 감상의 대상이 된다. 자신이 하는 고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3.

게다가 이러한 전근대적 '어머니-모유-집밥-사랑'의 물신적 숭배, 이른바 '어머니즘'은, 황교익 본인의 과학적 음식 세계와 전혀 상응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책 <미각의 제국>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 중 한 사람이지만, 도저히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지금도 수많은 '어머니'들은 이상한 요리를 하고 있다. 그냥 이상한 요리를 하는 수준을 넘어, 의학적으로 전혀 검증되지 않은 온갖 '효능'에 혹하고, 그러면서도 '설탕 두 숟가락 대신 매실청 세 숟가락 넣기' 같은 비과학적, 비효율적 레시피가 한국인의 밥상을 점령하고 있다.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인의 밥상을 가장 망치고 있는 프로그램은 '여섯시 내고향'이나 '생생정보통'이지 '집밥 백선생'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섯시 내고향'을 보자. 모든 식재료를 고추장에 버무리고 튀김옷을 입혀서 '탕수'로 만들어버린다. '생생정보통'이나 'VJ 특공대'에서 나오는 온갖 '맛집'들은 또 어떤가. 이 문제는 대한민국에서 황교익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어머니'들이, 과연 이러한 정보에 면역력을 가지고 있는가?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하다. 황교익 본인의 삶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의 '집밥'은 바로 저런 TV 프로그램에 휩쓸리고 있다.

요리에 관심 있는 시청자들이 왜 백종원의 '차라리 설탕을 넣어라'에 열광했는지 황교익도 알고 있지만, 부정하고 싶은 것 아닌가? 황교익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상적인 '집밥' 말고, 현실의 '집밥'은 어차피 지금도 설탕투성이다. 단지 '설탕을 먹는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매실청' 같은, 음식의 향을 더욱 망가뜨리는 변종 식재료를 투입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황교익의 '어머니즘'은, 황교익 자신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한식 레시피가 전반적으로 너무 달다'는 황교익의 비판은 타당하다. 그런데 그렇게 불러일으켜진 죄책감 앞에서, 대중들, 특히 '집밥'의 '조정자' 역할을 하는 많은 주부들은, 설탕을 안 넣고 대신 다른 첨가물을 투입하여 단맛을 벌충한다. 그게 '어머니의 사랑'이다. 단맛이 부족해서 맛없게 느껴지는 집밥을 해주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몸에 안 좋은 설탕을 먹이고 싶지는 않아서, 설탕 범벅인 매실청으로 단맛을 내는, 그런 모순된 사랑 말이다.

황교익 본인이 원하는 '한식의 레시피 변화'를 이끌고 싶다면, '어머니의 밥은 무조건 옳다' 같은 전근대적 도그마를 깨뜨려야만 하는 것이다. 현실의 '어머니'들이 해주는 '집밥'은, 황교익의 이상 세계의 그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4.

황교익이 꿈꾸는 '미각의 제국'은 '어머니'라는 식민지가 없으면 실현되지 않는다. 그 '어머니'는 일단 모유 수유를 해야 하고, 자식에게 '집밥'의 맛을 가르치기 위해 출산 후 무려 6년이나 육아 휴직을 하는 그런 어머니이다.

과도한 억측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국가는 ①엄마가 자신의 품에서 자식을 온전히 키울 때까지, 적어도 6세까지, ②경제적으로 완벽히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황교익의 육아 관련 정책 제안을 곱씹어보자. ①에서 핵심은 자신의 품이다. 아이를 끌어안고 모유를 먹이고, 그 모유의 연장선상에서 '사랑이 담긴 집밥'을 먹이는 것이 황교익이 말하는 이상적 육아다. 문제는 그 기간이 "적어도" 6세까지, 즉 최소 6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장은, ②에 명시되어 있다시피, "경제적"으로 이루어진다. 만약 해당 산모가 취업을 하지 않았다면 육아보조금이 지급될 것이고, 취업을 했다면 육아보조금과 더불어 유급 출산휴가가 보장되어야, 6년에 걸친 장기간의 육아 기간에 대한 "경제적" 보장이 가능해질 것이다.

제아무리 숭고하다고 미사여구를 덧붙인다 한들, 그런 시각이 성차별적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세상에나, 6년의 육아휴직이라니.

우리는 황교익이 어디까지나 양육의 주체로 "엄마"만을 명시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주요 복지국가에서는 여성들이 육아휴직으로 상대적 피해를 입는 것을 막기 위해 남자들에게도 같은 기간의 육아휴직을 보장하거나 심지어 강제한다. 황교익은 그러나, '젖'과 '집밥'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정작 여성들의 경력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멀쩡히 사회 속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하는 여성보다 미취학아동의 '집밥' 입맛이 그렇게나 더 소중한가? 심지어 전통사회에서도, 지배계층은 따로 '젖어미'를 두었고, 피지배계층은 사실상 마을 단위의 공동 육아를 했다. 심봉사가 젖동냥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다들 그러고 살았기 때문이다. '젖-집밥-엄마'라는 '원초적 입맛'은 황교익의 생각과 달리 전혀 자연적이지 않다. 낭만화된 인공적 판타지일 뿐이다. 그 판타지를 위해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죄책감을 뒤집어쓰거나 경력 단절의 불이익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면, 그 '미각의 제국'은, 여성 전체를 식민지로 삼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엄마가 "자신의 품"에서 자식을 "온전히" 키우려면, 일을 쉬는 수밖에 없다. 애 하나 낳으면 6년간 "경제적으로 완벽히" 보장해주어야 하는데, 세상에 그 어떤 기업이 미쳤다고 여성 사원을 뽑겠는가? 그 경제적 부담을 모두 국가가 진다면, 국가는 모든 여성들이 취업을 애초에 못 하도록 막으려 들 것이다. 재정적 부담이 엄청날 테니 말이다. 게다가 그 6년 동안 남자들은 승진하고 직업적으로 숙련도를 높힌다. 저런 세상에서 여성은 모두 집에서 애 키우다가 애들이 다 자라면, 비숙련노동 허드렛일이나 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즘'은, 그 대변인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선량하고 순박하며 자연스러운 발상이 아니다. 오랜 역사적 맥락 속에 굳어져버린 차별적 성 역할관이 투영된 인습적 사고다. 나는 황교익이 부디 '어머니즘'을 극복하고, 변화된 현실과 개선된 대중적 인식 속에서, 그가 원하는 바람직한 식탁을 구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덧붙임)

집밥은 그냥 집에서 먹는 밥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늘 밥을 해먹는 그곳이 바로 집이다. 그 집밥이 꼭 '어머니'와 연결될 필요는 없다. 개인적인 체험을 되짚어봐도 그렇다. 논산훈련소에서 내가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은 내가 만든 파스타였다. 냉장고에 있는 아무 재료나 되는대로 썰어 넣고 볶아서, 대충 끓인 면에 대충 볶아 만든, 그런 얼렁뚱땅 파스타. 그게 나의 집밥인 것이다. '자신만의 집밥'을 가진 남성들이 더 늘어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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