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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계는 청춘을 흐른다 | 뮤지션 윤상 인터뷰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 아이돌 혹은 어린 친구들이랑 작업을 많이 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작업에 대해서 굉장히 회의적이었을 거예요. 여긴 내 자리가 아닌데 하는 생각들 때문에요. 실제로도 2007,8년쯤에는 그런 생각들 때문에 괴로웠던 적도 많아요. 대중음악 시장이 제가 생각했던 것들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더 이상 사람들이 음악을 '귀로 듣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보는 것'으로 생각하고, 음악인보다는 비디오 스타에 열광하고, 앨범 자체로가 아니라 조각조각 난 노래들을 모바일 기기 등으로 소비하는 현상들 때문이었죠.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 많이 극복이 됐어요.

  • 손미나
  • 입력 2015.07.15 10:51
  • 수정 2016.07.15 14:12
ⓒ오계옥

손미나의 INTERVIEW | 뮤지션 윤상

윤상. 그와의 인연은 1998년도부터 시작되었다. KBS <뮤직타워>라는, 당시에 꽤나 인기가 많았던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하면서였다. 그때 나는 꽃다운 20대, <도전! 골든벨의> 스타 엠씨로 열심히 방송 활동을 하고 있었고,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의 DJ로 음악인들과도 친분을 쌓아가고 있었다. 윤상 역시 군대 제대 후 여전히 잘 나가는 뮤지션으로, 또 꽃미남 뮤지션 4인방(윤상, 김현철, 이현우, 윤종신) - 내가 인터뷰 중 이 타이틀을 언급하자 윤상씨는 '꽃미남 4인방'이 아니라 '노총각 4인방'이었다고 정정해주었다- 으로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개념이 막 태동했던 당시 방송가를 주름잡고 있었다. 함께 방송을 진행하다 보니 1주일에 하루는 긴 시간 대화를 나누었고, '음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던 덕분에 우리는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때 이후 그는 방송계 동료로, 또 인생 선배로 당시만 해도 서툰 사회 초년병이었던 나에게 조언과 충고, 상담까지 아낌없이 해주곤 했다.

방송으로 가까워진 사이긴 하지만, 나 역시 많은 또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아나운서가 되기 전엔 그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다. 과연 그 시절 여고생들 중엔 한 번쯤 그를 흠모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던 이가 있었을까. 우리 동네에 살던 한 남학생은 윤상처럼 쌍거풀 없는 눈에 비슷한 뿔테 안경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굉장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으니, 이 정도면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히트곡과 화려한 앨범들을 낸, 두말하면 잔소리인 최고의 뮤지션. 그런 그가 작년 겨울, 20년 만에 직접 가사를 쓴 이라는 앨범을 들고 나타났을 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이번 만남은 그때부터 기약된 것이었기에 더욱 고대할 수밖에 없었다. 깊어가는 여름의 초입, 한낮의 뜨거운 에너지만큼이나 푸르게 빛나는 6월의 어느 밤 그를 만났다.

- 오랜만입니다. 최근 근황 좀 얘기주세요! 그야말로 요즘 대세이시죠?

"최근 방송 일이 많습니다. 지금 <집밥 백선생>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백종원 씨의 제자가 되어 요리를 하고 있어요. 김구라, 박정철, 손호준 씨와 함께 출연하는데 현재까지 가장 꼴찌예요. 분발해야죠. 저는 요리를 즐겨 해본 적도 없고, 요리를 해야지 하는 의지도 없었어요. 그렇지만 막연히 '50대가 되면 요리를 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은 있었어요. 이젠 남자들도 요리를 할 줄 알아야 사랑받는 시대잖아요. 저처럼 권위적인 시대에 살았고, 또 약간은 그 시대의 유산을 물려받은 남자들이 이렇게 살다간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할 것 같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요리를 배워봐야겠다는 생각만 있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와서 2-3년 정도 앞당겨졌네요. 게다가 최고의 선생님이시잖아요. 열심히 배워서 가까운 사람들부터 대접해야죠. 손미나 씨도 곧 초대할게요."

요리하는 윤상이라니. 그를 근 20년 간 보아온 나로서는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그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그는 도전하고 있고, 곧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윤상의 모습으로 모두를 놀라게 할 것이다. 사실 그의 새로운 모습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얼마 전 tvN <꽃보다 청춘-페루편>에 출연하면서 '인간 윤상'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일 터. 윤상뿐 아니라 유희열, 이적 등 다른 멤버들에 대한 높은 관심과 여행지로서 페루의 인기 등 숱한 화제를 낳았던 그 여행에 대해 가장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좀처럼 여행을 즐기지 않는 윤상을 나영석 피디는 어떻게 집 밖으로, 아니 그 멀고먼 미지의 땅, 페루까지 데려간 것일까!

"하하, 다들 만나면 여행 얘기밖에 안 해요, 요즘엔. 나 그 여행 안 갔으면 어쩔 뻔했어. 작년 7월에 <꽃보다 청춘> 여행을 떠났는데, 떠나기 전까지 진짜 몰랐어요. 누구와 가는지, 언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아시겠지만, 저는 여행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예전에 군대 제대하고 박창학 씨랑 잠깐 업무 차 파리에 간 적은 있었지만 3-4일 머물면서도 거의 가본 곳이 없어요. 박창학 씨는 이왕 파리에 왔으니 많이 봐야 한다고 오전 7시부터 돌아다니는데, 저는 그냥 호텔에만 있었죠. 에펠탑도 차 타고 지나가면서 멀리서 봤을 정도니까요. 근데 정말, 신기하게도 어느 딱 한 곳을 집어 이야기하기가 어려울 만큼 페루에서의 모든 여행지가 다 좋았어요. 스태프들 고생이 많았지요. 스케줄링도 정말 잘 해주었고. 가는 곳마다 인상적이었어요. 아, 제가 우겨서 갔던 곳이 딱 하나 있어요. 와카치나 사막이요. 사막을 보는 것은 저의 오랜 로망이 있었거든요. 사막이라는, 아무것도 없이 모래로 가득 찬 공간은 어떤 곳일까, 주변을 돌아봐도 모래 언덕만 있는 그 공간에 서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고 막연히 궁금했었어요. 사막을 태어나서 처음 봤는데, 굉장하더라고요. 상상만 하던 척박한 자연 공간이 실제로 존재하고,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걸 목격할 때의 감동이랄까."

와카치나. 인공 오아시스가 고요하게 흐르고 있는 곳. 나의 페루인 친구의 할머니가 한 증언에 의하면, 수십년 전 페루인들에겐 최고의 워너비 신혼 여행지였단다. 사실 윤상은 엄지를 치켜들며 버기카를 꼭 타라고 추천했는데 나는 지난 3월 페루 여행 때 그 속도와 모래 바람이 두려워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두려워했던 버기카를 적극 추천하는 윤상을 보면서, 또 한 번 여행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막연히 가지고 있던 내 안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감정을 경험하며,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용감한 모습까지 알게 되는 것!

- 유희열씨와 이적씨는 워낙 오랜 동료이기에 여행이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요? 여행 파트너... 정말 중요하잖아요.

"사실 그 친구들 덕분에 그 여행의 의미가 더 깊어졌죠. 충분히 친하고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여행 가서 그 친구들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게 많거든요. 유희열 씨나 이적 씨 보면서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 듣지 못했던 것들, 지나온 제 삶, 제 주변의 사람들까지 깊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유희열 씨는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가족과도 자주 가고, 적이도 가족과의 시간들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예요. 그런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음악하는 사람으로서만 살아왔지 내 주변을 챙기고 남을 위해 배려하는 일들을 너무 소홀히 하면서 살았구나 생각했어요. 아차 싶더라고요. 특히나 가족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내한테도 그렇지만, 아이들에게도 아빠와의 여행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미안했어요. 여행 사진엔 항상 이모, 할머니, 할아버지만 있었으니까. 이젠 페루도 다녀왔고, 버기카도 타봤고, 나스카 라인도 봤으니 아이들한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생겼잖아요. 다음번엔 아이들과 다시 한 번 꼭 페루에 가려고요."

소녀들의 우상에서 이제는 두 아이의 아빠가 된 뮤지션은 애틋한 얼굴로, 그렇지만 담담하게 말했다. 그에게 페루는 더 이상 혼자만의 추억이 아니었다. 20년을 동고동락한 동료들과의 우정을 아로새긴 '도원결의'의 장소이자 아빠로서의 뜨거운 다짐을 깊이 묻은 '약속'의 땅이었다. 그의 이유 있는 끄덕거림에 나는 깊이 공감했다. 나 역시 지난 3월 출장 차 페루에 다녀왔을 때 내 주변 사람들, 특히나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던 것이다. 모든 생명들이 태동하고 태고적 모습들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그 땅을, 당신이 살아 계셨다면 언젠가 꼭 가보셨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을 거다. 아니면 수많은 탄생과 죽음의 역사를 간직한 땅에서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던 것일 수도. 알 수 없는 물음들이 자꾸만 마음속에서 용솟음치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던 수많은 페루의 밤들을 윤상 역시 경험했으리라.

- 많은 생각을 남긴 여행이었네요, 그런가요?

"그렇죠. 가족들 생각뿐 아니라 제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내 뒷모습을 본 것 같은 느낌? 제가 알던 저를 다시 한 번 깨고 나온 것 같아요. 윤상 인생의 전환점이 된 여행이 아닐까 생각해요."

확실히 그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멀리만 있던 스타 뮤지션 윤상을 인간의 적나라하고 솔직한 모습이 마구 발현되면서 우리에게 더욱 친근한 사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그가 고수해 오던 음악적 노선에서 벗어났다거나, 그가 만들어 온 커리어를 반감시켰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채우지 못한 음악적 영감을 수혈받기 위해, 넘지 못할 것처럼 보였던 한계를 넘기 위해 가장 정상에 있을 때 스스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알지 않는가. 그는 200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2007년 버클리 음대를 졸업하고, 다시 뉴욕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명반이라고 불리는 3집 와 4집 <이사>를 발표한 직후였다.

- 미국 유학 얘기 좀 해주세요. 한창 인기가 많았을 당시였으니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요?

"제가 운 좋게 19살 때부터 음악 일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음악 공부에 대한 갈증 같은 게 항상 있었어요. 대중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학교에 대한 로망도 있었고요. 그래서 3집을 준비하면서 유학을 생각하게 됐죠. 관심을 갖고 알아보니, 대중음악을 전공으로 한 체계적인 커리큘럼과 강사진을 가진 학교가 잘 없더라고요. 그래서 미국의 버클리 음대를 선택했어요. 솔직히 버클리라는 곳에 대한 환상도 약간 있었고요. 존경하는 피아니스트 김광민 선배도 80년대에 버클리에서 공부하기도 했던 곳이지 않습니까. 아무튼 당시에 여자친구였던 지금의 아내가 먼저 유학의 뜻을 품고 보스턴에 가 있었습니다. 그때가 아니면 유학을 가기도, 결혼을 하기도 힘들었을 거예요. 생각해보면 그 모든 일들이 운명이 되려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갔던 것 같아요. 물론 힘든 일도 많았죠. 특히 언어문제 때문에 가서 애를 먹었어요. 버클리에서 음악 공부보다 영어 공부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네요. 수업을 도저히 못 알아듣겠어서 녹음기를 켜놓고 강의를 듣고, 집에 와서 와이프와 같이 공부했죠. 신혼이니까 가능했던 것 같아요. 오래된 부부라면 갈라설 이유로 충분할 걸요(웃음)? 또 그 당시 버클리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엄청 많았어요. 저를 알아보는 학생들도 많고요. 그래서 그들 앞에서 망신당하면 안 되니까 더 마음잡고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 버클리에서는 뮤직 신서시스, 뉴욕대에선 뮤직 테크놀로지를 전공하셨는데요. 말로만 들으면 많은 분들에게 여전히 생소할 전자 음악이죠. 전공으로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전자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은 뭐라고 생각해요?

"음, 일반적인 음악을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연극 혹은 연기라고 한다면 전자 음악은 한 명이 그려내는 애니메이션에 가까운 거라고 생각해요. 작가가 얼마든 자기 마음대로 창작할 수 있는 거죠. 상상력에 제한받지 않고 가상의 악기들로 소리를 만들고, 음악을 만드는 것이니까요. 요즘은 여럿이서 하기도 하지만. 누구든 랩탑(laptop) 하나만 있으면 노래를 만들고, 아티스트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온 거죠. 그런 면에서 볼 때 점차 뮤지션들에게 기술적인 역할이 중요해졌어요. 즉 어떻게 음악을 더욱 세련되게, 사람들이 더 질리지 않고 더 오랫동안 들을 수 있도록 레코딩을 할까가 중요해졌지요. 이런 고민들 때문에 제가 뮤직 테크놀로지를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거예요. 지금도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이 -그는 현재 상명대학교 문화기술대학원 뮤직테크놀로지학과 교수다- 기술이에요. 결국 예술이란 오래 기억되는 기술이거든요. 물론 음악 자체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기술로써 잘 포장할까 하는 것은 지금도 저의 가장 큰 고민입니다."

한창 바쁘게 활동하며 절정의 인기를 누릴 때 결정한 유학 생활. 힘든 점도 많았지만 그를 더욱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음악적 배움은 물론이고 평생을 함께 할 사람과의 의미 있는 새출발, 게다가 그 시기에 그에게는 크나큰 축복인 아들이 태어났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생겼고, 행복의 무게만큼 책임감도 늘었다. 10년에 가까운 유학 생활은 가수 윤상에게 어떤 시간이었을까.

"전자 사운드, 음향학, 컴퓨터 프로그래밍... 공부로 할 수 있는 건 다 배운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그 전공 분야 안에서 어떤 가치로 인정받고 있는지, 내가 손을 댈 수 있는 것과 댈 수 없는 것의 경계는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죠. 또 스스로 만들어왔던 내 음악관에 대한 선입견이라든지 고집을 많이 깰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좋은 방향으로요.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 아이돌 혹은 어린 친구들이랑 작업을 많이 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작업에 대해서 굉장히 회의적이었을 거예요. 여긴 내 자리가 아닌데 하는 생각들 때문에요. 실제로도 2007,8년쯤에는 그런 생각들 때문에 괴로웠던 적도 많아요. 대중음악 시장이 제가 생각했던 것들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더 이상 사람들이 음악을 '귀로 듣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보는 것'으로 생각하고, 음악인보다는 비디오 스타에 열광하고, 앨범 자체로가 아니라 조각조각 난 노래들을 모바일 기기 등으로 소비하는 현상들 때문이었죠. 사람들이 생각하는 음악의 가치와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이 이렇게 다른데, 과연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 많이 극복이 됐어요. 내가 좋아했던 음악들은 쇠퇴하더라도, 음악은 역시 음악 자체로 남고 또 다른 가치들이 그 자리에 새로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달까. 그런 새로운 가치들과 공생하는 방법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간들이었어요. 실제로 어린 친구들과 작업해보니까 이런 것들이 나한테 그렇게까지 걸맞지 않은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특히나 최근에 함께 작업했던 '러블리즈'라는 친구들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많고 뿌듯하기도 합니다. 만약 유학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한국 음악계에서 조금 벗어나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까지 느끼지 못하는 부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최근 신인 그룹 '러블리즈'의 메인 프로듀서로서 작업하고 있다.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어 즐겁기도 하고, 그 전과는 다른 음악적 책임감이 들기도 해 어깨가 무겁단다. 그들이 험난한 가요계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갑옷과 무기를 장착해줘야 한다며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그 농담에 실린 뮤지션 윤상의 진심과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돌이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나와 -혹은 거의 입지 않은 채로- 멋진 군무를 추는 것이 '대세'가 된 시대. 주류라기보다 차라리 마이너적 성향, 혹은 제 3의 음악에 가까웠던 윤상이 아이돌의 프로듀서라니. 혹자들은 의문스러워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 또한 '윤상식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돌=상업성'이라는 공식이 많은 이의 공감을 얻고 있음은 무시할 수 없다. 그에게 음악 산업에서의 대중성과 상업성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결국 대중음악이란 대중이 없으면 고독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대중성과 상업성은 분명히 차이가 있죠. 대중적일수록 상업적으로 잘 팔리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대중성=상업성'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상업성은 사람들의 취향을 읽어내서 거기에 맞는 결과물을 내는 것이지만, 대중성은 작가의 취향이 담겨 있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것이죠. 상업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부할 수 없게 만들지만, 대중성은 사람들에게 선택권을 주지요. '이런 것도 있어. 한 번 들어봐' 라고요. 보이지 않는 선이 분명히 있고, 그것을 잘 지켜나가야 하겠죠."

- 그럼 윤상 씨가 프로듀싱한 곡이 아니더라고 본인의 곡들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나 앨범이 있다면어떤 걸 꼽으시겠어요?

"보통 유명한 감독들이나 뮤지션들이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게 최근에 했던 작업을 꼽아요. 저 또한 가장 최근에 했던 앨범에 가장 애착이 가요. 이요. 이게 공식 6집 이후에 6년 만에 나온 거니까... '아, 지금까지 내가 음악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더 애착이 가는 거 같아요.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은 'Waltz'예요. 다빈크(Davink)라는 친구가 쓴 곡에 제가 가사를 썼는데, 제가 쓴 가사로는 거의 20년 만에 쓴 거니까, 꽤 오래 됐죠? 사람들이 저를 싱어송라이터로 아는데, 저는 곡을 쓰고 편곡하는 사람이에요. 가사는 10, 20대 이후로는 거의 쓴 적이 없어요. 그 이후로는 거의 모든 가사를 박창학 씨가 썼으니까. 그런데 이번 곡은 특별했어요. 다빈크가 곡을 가지고 왔는데 듣자마자 이건 어떻게든 내가 써야겠다는 충동이 바로 들었거든요. 제가 먼저 남의 곡에 가사를 붙여 본 것도 처음이고요. 제겐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음악 인생 20년, 아직도 부를 노래와 만들 음악이 많이 남아 있는 이 남자. 강산이 두 번 변할 만큼 긴 시간 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가요계에 몸담은 그에게 음악이란 무엇일까.

"윤상에게 음악이요? 뭐랄까. 결혼 이전에는 거의 운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혼 후에 가정이 생기고 아이가 생긴 뒤에는 음악이 내 운명의 전부라기보다는 내가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숙제 같다는 생각을 해요. 나이가 들어도 음악을 하면서 느꼈던 즐거움이나 의미를 잃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 만들면서 그 숙제를 해나가고 싶어요. 또 제가 만드는 음악이 듣는 사람들한테도 위로나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게 바로 제가 음악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누구나 질풍노도의 시기에 가슴을 후벼 팠던 가사 한 줄쯤은 외우고 있을 게다. 나의 가슴 속엔 윤상의 노래가 그렇다. 많은 이들의 가슴에도 윤상의 노래는 짙게 각인되어 있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가사와 한 음절 한 음절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 부르는 나긋한 음색. 윤상의 노래는 많은 이들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며 동시에 박제되지 않은 진행형의 추억이었다. 아이들에게 밥 한 끼 차려 줄 정도의 요리 솜씨를 갖고 싶다는, 소박한 아빠가 된 그에게서 더 이상 과거 여고생들이 사랑했던 '우수에 찬 오빠'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뜨거움도 차가움도 아닌 딱 36.5도씨의 목소리를 가진 이 뮤지션을, 기분 좋은 6월초의 하늬바람에 가벼이 실려 오는 그의 목소리를, 꾸미지 않은 무채색의, 그래서 가장 빛나는 음악인 윤상은 그 존재 자체로 언제나 청춘이라는 것을.

정리 | 조승희

*보다 자세한 윤상과의 인터뷰 내용은 팟캐스트 <손미나의 싹수다방> 7/26, 8/2일자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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