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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대해 우리가 몰랐던 11가지 사실

  • 박세회
  • 입력 2015.07.07 11:10
  • 수정 2015.07.10 00:59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1961년 7월 2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허핑턴포스트는 그를 기억하기 위해 오래된 인터뷰와 개인적인 회상록에서 발췌한 헤밍웨이의 삶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모았다.

1. 헤밍웨이는 한때 곰과 같이 살고 술을 마시고 잠도 같이 잤다.

뉴요커의 기자였던 릴리언 로스는 1950년에 헤밍웨이에 대한 긴 글을 낸 적이 있다.

그녀가 헤밍웨이와 바에 갔던 이야기를 적은 부분에서 브롱크스 동물원의 곰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로스는 헤밍웨이가 동물들과 잘 지냈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이렇게 썼다. “몬태나에서 그는 한때 곰과 같이 산 적이 있다. 곰은 그와 같이 잤고, 함께 술도 마셨고 친한 친구였다.”

이 사실은 미친 소리로 들리는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로스의 일화가 그녀의 인터뷰에서 독점적으로 알아낸 이야기인지 전설에 가까운지는 확실하지 않다.

2.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이만하면 괜찮은 크기인지 확인해 달라고 헤밍웨이에게 성기를 보여준 적이 있다.

헤밍웨이가 파리에서 살았던 1920년대의 이야기들을 모은<파리는 날마다 축제 A Moveable Feast>에는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와 교류했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헤밍웨이에 의하면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아내 젤다가 자기 성기가 너무 작다고 말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크기에 관한 문제’라고 했다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에게 남자 화장실로 따라오라고 한 뒤 이렇게 말했다고 적었다.

“자넨 완전히 정상이야.” 내가 말했다. “자네는 문제없어.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어. 자기 것을 볼 때는 위에서 내려다 보니까 작아보이는 거야. 루브르에 가서 조각상을 보고, 집에 가서 거울에 옆 모습을 비춰 봐.”

3. 헤밍웨이는 샴페인에 돈을 쓰는 것보다 더 나은 돈 쓰는 방법은 생각할 수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50년 뉴요커에 실린 글에서 헤밍웨이는 사람들과 점심을 먹다가 샴페인을 다 비우지 않고 일어서려는 일행들에게 불만을 품는다.

로스는 뉴요커에 이렇게 적었다.

“샴페인 반 병은 인류의 적이오.” 헤밍웨이가 말했다. 우리는 모두 다시 앉았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샴페인을 더 따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수중에 돈이 있을 때면, 나는 샴페인에 돈을 쓰는 것보다 더 나은 돈 쓰는 방법은 생각할 수가 없어요.”

4. KGB는 헤밍웨이를 비밀리에 간첩으로 채용했고, 헤밍웨이는 받아들였다.

가디언이 2009년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헤밍웨이는 KGB를 위해 일하며 ‘아르고’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스탈린 시절에 헤밍웨이가 미국 내의 KGB 정보원 목록에 올라 있었다고 주장하는 예일 대학 출판부의 ‘간첩들: 미국 내 KGB의 흥망성쇠 Spies: The Rise and Fall of the KGB in America’라는 책에 대한 기사다.

이 책에서 입수한 문서에 따르면 헤밍웨이는 1941년에 채용되었고 적극적으로 협조할 의사가 있었으나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 적은 없다고 한다. 헤밍웨이가 장난으로 했기 때문인지 간첩 활동 능력이 떨어져서인지는 알 수 없다.

5. FBI는 말년의 헤밍웨이를 사찰했다.

헤밍웨이의 전기 작가이자 14년 동안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냈던 A.E. 호치너는 2011년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헤밍웨이는 말년에 FBI가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며 엄청난 피해망상을 겪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사실이었다고 했다.

“최악의 지옥이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지옥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도청했다. 그래서 우린 듀크의 차를 썼다. 내 차도 도청당했다. 모든 게 다 도청당했다. 전화도 쓸 수 없었다. 편지도 중간에 뜯어보았다.” 호치너는 헤밍웨이가 환갑을 맞은 얼마 후에 했던 이야기를 전한다. 호치너는 헤밍웨이가 자기 전화가 도청당하고 있고 편지를 가로챈다는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을 때 헤밍웨이가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걸 기억한다.

FBI가 정보 열람의 자유 청원 때문에 헤밍웨이에 대한 파일을 공개했을 때 호치너는 충격을 받았다. J. 에드가 후버가 1940년대에 헤밍웨이를 감시 대상 목록에 넣었다는 것을 FBI가 인정했던 것이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요원들이 그에 대한 보고서를 내고 전화를 도청했다.” 사실은 헤밍웨이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 호치너는 헤밍웨이가 말년에 미쳐간다고 생각했던 – 철저한 전기 충격 치료를 받았던 이유 중 일부이기도 하다 - 자신의 기억을 재조정했다.

6. 헤밍웨이는 1년에 여러 번 권투를 보러 가지 않는 것은 ‘아주 위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50년 뉴요커의 글에서 로스는 헤밍웨이가 재미없는 시합이라고 생각한 경기를 추천했을 때의일을 기록했다.

헤밍웨이는 한참이나 나를 비난하듯 바라보았다. “아가씨, 나쁜 권투는 안 보느니만 못하다는 걸 배워야 해요.” 그가 말했다. 그는 자기가 유럽에서 돌아오면 다 같이 권투를 보러 가자고 말했다. 매년 반드시 좋은 권투 시합을 몇 번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 가지 않으면 근처에도 안 가게 되죠. 그러면 아주 위험할 거예요.” 그는 갑자기 기침이 터져나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결국 한 방에 들어가서 움직이지 않게 되는 거죠.” 그가 결론내렸다.

7. 제임스 조이스는 술집에서 싸움에 휘말린 뒤 헤밍웨이를 시켜 상대를 때리게 했다.

케네스 린은 자신의 책 ‘헤밍웨이’에서 헤밍웨이와 제임스 조이스가 함께 놀러 나갔을 때에 대한 헤밍웨이의 말을 인용했다.

“같이 술을 마시러 가곤 했죠.” 헤밍웨이는 타임 기자에게 50년대 중반에 말했다. “조이스는 싸움에 말려들곤 했죠. 상대를 잘 보지 못할 정도로 취한 상태여서 이렇게 말했어요. ‘해치워, 헤밍웨이! 해치워!’”

8. 헤밍웨이에 의하면 그의 눈꺼풀은 유난히 얇아서 늘 동이 틀 때 잠에서 깼다.

이것 역시 뉴요커에 나온 사실이다. 로스는 이렇게 적었다. “그는 눈꺼풀이 유난히 얇고 눈이 유난히 빛에 민감해서 늘 동이 틀 때 깬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인용되어 있다. “나는 내 평생 일출을 전부 다 보았고, 그게 반백 년이오. 아침에 일어나면 내 머리는 문장을 만들기 시작해요. 나는 그 문장들을 얼른 치워 버려야 해요- 말로 하거나 적거나.”

9. 헤밍웨이는 벽에 판지를 붙여 놓고 매일 몇 단어를 썼는지 기록했다.

미국 저널리스트 조지 플림턴은 1954년 5월에 마드리드의 카페에서 헤밍웨이를 인터뷰했다. 플림턴은 이렇게 적었다.

그는 벽의 가젤 머리 아래에 박스에서 뜯어낸 판지로 만든 큰 표를 두고 매일 작업량을 기록한다. ‘내 자신을 속이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매일 몇 단어를 적었는지 기록한 표의 숫자는 450, 575, 462, 1250, 512 등이다. 높은 숫자가 적힌 날은 그가 다음 날 멕시코 만류에서 낚시를 할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일을 더 많이 한 날이다.

10. ‘무기여 잘 있거라’의 엔딩 부분은 39번 다시 썼다.

1954년 마드리드의 카페에서 플림턴은 헤밍웨이의 가장 유명한 작품의 엔딩을 다시 쓴 이야기를 끌어냈다.

플림턴은 헤밍웨이에게 고쳐 쓰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물었고, 헤밍웨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때 그때 달라요. 나는 마음에 들 때까지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페이지를 39번 고쳐 썼어요.”

플림턴은 이렇게 물었다.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나요? 무엇 때문에 힘드셨나요?”

헤밍웨이의 대답은 이랬다. “제대로 쓰느라고.”

11. 헤밍웨이는 나이가 들면 이렇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뉴요커의 글에서 헤밍웨이는 나이가 들면 이렇게 지내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이라고 길게 묘사했다.

“나이가 들면 남을 따분하게 만들지 않는 현명한 노인이 되고 싶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웨이터가 아스파라거스와 아티초크 접시를 놓고 타벨을 따르는 동안 잠시 말을 멈추었다. 헤밍웨이는 와인을 맛보고 웨이터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는 새로 등장하는 권투 선수, 발레, 자전거 선수, 여자들, 투우사들, 화가들, 비행기들, 개새끼들, 카페에서 죽치는 사람들, 거물급 국제 창녀들, 레스토랑들, 같은 와인의 다양한 빈티지들, 뉴스 영화들을 다 보고 거기에 대해서 한 줄도 쓸 필요가 없으면 좋겠소. 친구들에게 편지를 많이 쓰고 답장을 받고 싶어요. 클레망소가 그랬듯 85세까지 사랑을 잘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버나드 바루크처럼 되고 싶진 않소. 가끔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러 공원에 갈 수는 있겠지만, 공원 벤치에 앉아있고 싶지는 않아요. 긴 수염을 기르지도 않을 겁니다. 조지 버나드 쇼 같아보이지 않는 노인도 있어야죠.” 그는 말을 멈추고 손등으로 수염을 쓰다듬더니 생각에 잠겨 실내를 둘러보았다. “쇼 씨를 만난 적은 없어요.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본 적도 없소. 그나저나, 마차 경주는 해볼 생각이에요. 75세를 넘지 않으면 아주 나이든 게 아니에요. 그때가 되면 맥 씨처럼 실력있는 젊은 야구팀을 살 수도 있겠죠. 나중엔 프리티 보이 플로이드 이후 제일 예쁜 시체가 될 거요. 영혼을 구원하는 걸 걱정하는 건 멍청이들 뿐이에요. 지적으로 영혼을 잃는 게 사람의 의무인데 누가 영혼을 구원할 걱정을 합니까. 지키지 못할 자리라면 최대한 비싸게 파는, 사상 가장 비싼 자리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는 입을 벌리고 웃었다. 처음에는 소리없이, 곧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더 걱정할 필요가 없죠.” 그는 긴 아스파라거스를 집어들고 무관심하게 바라보았다. “죽으면서 이치에 맞게 행동하려면 꽤 훌륭한 사람이어야 해요.”

*본 기사는 허핑턴포스트 US의 '11 Things You Didn't Know About Ernest Hemingway'을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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