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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식당 팬들이 당황하고 분노한 이유

  • 허완
  • 입력 2015.07.05 09:51
  • 수정 2015.07.05 10:06

[토요판]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원작을 무시할 수도 없고, 한국적 색깔에 맞게 각색하기 위해 일본 색깔을 기술적으로 어떻게 뺄까 생각했다. 일단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일본 원작 캐릭터 중에 게이 마담이 있는데 우리 드라마에선 과감히 빼버렸다.” 지난 2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열린 에스비에스 드라마 <심야식당> 제작발표회 현장, 황인뢰 감독은 일본 원작을 한국판으로 리메이크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콕 집어 게이 캐릭터를 뺐다고 말했다. 극본을 집필하는 최대웅 작가 또한 “아무래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소수자들을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이는 분들이 적은 것 같다. 그래서 한국적 상황을 고려해 게이 마담과 스트립걸이 빠지게 됐다”며 “한국 상황에 맞춘 것이지, 소수자를 배제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원작의 게이바 마담 ‘고스즈’가 한국판엔 등장하지 않는다는 소식에, 원작의 팬들은 죄다 당황하기 시작했다.

물론 작품을 번안할 때 꼭 모든 등장인물을 다 고스란히 옮겨올 의무나, 원작의 내용을 고스란히 답습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할 거면 그냥 원작의 방영 판권을 사오는 편이 빠르지, 굳이 리메이크를 하는 의미가 없을 테니까. 한국과 일본 간의 정서적 차이 때문에 적잖은 각색이 들어갈 것이란 사실은 한국 팬들 또한 어느 정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스즈 캐릭터가 사라진 것에 팬들이 당황하고 심지어는 분노한 이유는 무엇일까? <심야식당>의 팬들이 대중 일반에 비해 소수자 감성이 특출하게 더 뛰어나다거나, 인권 감수성이 더 뛰어난 사람들이라서?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원작만화 <심야식당>의 세계관 자체가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거나 소외된 이들에게 시선을 두고 있다는 점은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아베 야로의 원작 만화 <심야식당>에는 낮의 세계, 밝고 공공연한 세계에서 한 뼘쯤 밀려난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단순히 남들이 자는 밤에도 일을 해야 하는 서민들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야쿠자, 건달, 사채업자, 성인 풍속업소 직원, 스트립걸, 게이바 마담 등 사회로부터 그리 큰 환대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단골이 되어 드나드는 것이다. 그러나 극중 가게 ‘밥집’의 주인 ‘마스터’는 이들을 모두 남들과 똑같은 손님으로 대한다. 문턱은커녕 정해진 메뉴도 없는 ‘밥집’에서만큼은, 직업, 나이, 성별, 성적 지향과는 무관하게 모든 손님들이 마스터의 과묵한 환대를 받을 수 있다. 원작 자체가 편견에 시달리는 이들, 고단하고 갑갑한 사연을 지닌 이들을 폭넓게 포용하고 그들이 다른 손님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작품인 셈이다.

그런 작품의 정서를 잘 보여주는 주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업계에서 40년 넘게 현역으로 살아남은 게이바 마담 고스즈다. 그는 게이라는 점에서 성소수자이고, 동기들 중 천수를 다한 친구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노인이란 점에서 외로운 노년층이며, 그럼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밥집’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즐겁게 살아간다는 점에서 “소수자는 불행할 것”이라는 다수자들의 편견을 깨뜨리는 캐릭터다. 2012년 한국에서 제작된 뮤지컬 <심야식당> 초연에서 고스즈를 연기한 배우 김늘메는 배역이 극중에서 가지는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고스즈는 단순히 성소수자라기보단 외로움의 대명사예요. 우리 시대의, 티는 나지 않지만 외롭고 소외된 계층이죠. 하지만 심야식당에 와서 ‘음식’이라는 작은 것 하나에 행복해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해요.”(‘잘나가던 ‘개그맨’ 김늘메, 여기서 행복 찾았습니다.’ <오마이뉴스> 2012년 12월26일 이미나 기자) 이렇게 작품의 핵심 정서를 담아낸 캐릭터가 ‘한국적 색깔’과 ‘한국적 상황’을 이유로 빠진다니, 안 그래도 로컬라이징에 꾸준한 불신을 표출했던 원작 팬들로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적 상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제이티비시 <선암여고 탐정단>(2015)은 서로 사랑하는 여고생 사이의 키스신을 집어넣었다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중징계를 받은 바 있다. 심의에 참여했던 위원들은 “우리 사회의 인식이 동성애를 인정은 하되 권장하지는 않는 것 아니겠냐”라거나 “과연 동성애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같이 고민해봐야 한다”는 식의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일삼으며 ‘경고’ 조치를 내렸다. 더구나 올해 들어 혐오세력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게 준동하고 있는 중이어서, 얼마 전 서울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 폐막식 퍼레이드 현장에선 혐오세력이 행사 취재를 위해 나온 인터넷매거진 <직썰> 에디터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예상되는 논란을 피해 작품을 잘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창작자의 입장에선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아직까진 (성적 지향을) 드러내 이야기하는 일은 드물다는 한국적인 상황”을 고려했다는 최대웅 작가의 말 또한 마냥 틀린 말이라고만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때론 드라마는 단순히 대중의 인식에 맞춰 가는 것을 넘어 대중의 인식을 견인하고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노인성 치매’라는 단어보다 ‘노망’이란 단어가 더 폭넓게 쓰이던 시절, 이금림 작가는 한국방송 <옛날의 금잔디>(1991)에 치매를 앓는 노인을 등장시킴으로써 다들 외면하기 바빴던 노인성 치매 문제를 한국 사회 토론의 장에 던졌다. 치매를 앓는 부모를 모시기 싫어하는 자식들간의 갈등은 그저 각자의 집안에서 쉬쉬하며 알아서 해결할 문제처럼 여겨졌지만, <옛날의 금잔디>는 그 유쾌하지 않은 진실을 묵직하게 안방극장에 들이민 것이다. 방영 초반엔 불쾌함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덕분에 사람들은 노인성 치매에 대해 보다 더 터놓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드라마판 <심야식당>의 마쓰오카 조지 감독 또한 “만화와 실사판의 차이라는 대전제는 있지만, 인간의 삶을 그린다는 의미에선 만화에 그려져 있는 것을 더 넓혀가야 한다. 조금 진화시켜서, 깊게 파고드는 것을 의식했다”고 밝힌 바 있다. 매체의 차이에도, 인간의 삶을 깊게 들여다본다는 원작의 미덕만큼은 타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아직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식이 광범위하게 합의된 건 아니지 않냐고. 난 이렇게 답하고자 한다. 세계인권선언은 제2조에서 “모든 사람은 어떠한 종류의 구별도 없이 이 선언에 제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하고 있고, 제30조에서 “이 선언의 그 어떠한 조항도 특정 국가, 집단 또는 개인이 이 선언에 규정된 어떠한 권리와 자유를 파괴할 목적의 활동에 종사하거나, 또는 그와 같은 행위를 행할 어떠한 권리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되지 아니한다”고 못박았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 3항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하는 행위를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로 규정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미 한국은 국제협약으로든 국가인권위원회법으로든 헌법으로든 그 누구도 차별해선 안 된다고 반복해서 천명한 바 있다. 성소수자도 예외일 수 없다. 사회의 인식이 인권을 보장하는 제도에 미치지 못하면, 후진적인 인식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제도에 맞게 인식을 견인해야 한다.

물론 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 꼭 현실의 인식과 맞서 싸워야 할 의무를 진 것도 아니며, 한국판 <심야식당>을 만드는 이들에겐 자유롭게 자신들만의 버전을 선보일 자유가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길게 아쉬움을 이야기하게 되는 이유는 원작이 지향했던 이상향, 낮의 세상이 애써 외면하고 소외시킨 사람들까지도 넉넉하게 품어내는 공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한국판 <심야식당>에서 식당이 위치한 곳은 서울 종로타워 인근으로 설정되어 있다.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2010)에서 그려진 것처럼 게이들이 커뮤니티를 이루고 친구를 만나고 대화를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지역인 낙원동이 바로 지척이다. 비록 고스즈 캐릭터는 나오지 않는다 해도, 출출한 배와 헛헛한 마음을 채우러 심야식당을 찾는 성소수자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반가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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