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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어린이 669명 구했던 윈턴, 숨을 거두다

ⓒgettyimageskorea

반세기 동안 아무도 니컬러스 윈턴이 ‘또다른 쉰들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부인 그레테가 영국 메이든헤드의 집 다락에서 낡은 노트를 발견하기 전까지, 결혼한 지 40년 된 부인도 몰랐다. 먼지 쌓인 노트 속 이름과 사진, 문서들은 홀로코스트를 피해 극적으로 살아남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세상은 윈턴이 2차 세계대전 직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669명의 유대인 아이들의 탈출을 도왔던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됐다. 그는 영국 왕실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고, 체코 정부로부터 최고 훈장도 받았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파란만장했던 106년의 삶을 뒤로하고 1일 메이든헤드에서 숨을 거뒀다.

모든 것은 1938년 체코에서 걸려온 친구의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됐다. 런던의 주식중개인이었던 29살의 윈턴은 난민 구조활동을 하던 친구의 부름에 스위스 스키여행 대신 체코로 향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나치 대원들이 유대인 가게를 약탈하고 유대교회당에 불을 지른 ‘수정의 밤’이 일어난 직후였다. 체코에 도착해 본 난민캠프의 상황은 참혹했다. 전쟁은 임박했고, 탈출은 불가능해 보였다. 당시 영국은 ‘킨더트랜스포트’라는 정책으로 보호자가 없는 17살 이하 유대인 어린이들의 영국 입양을 허가했다. 이 정책으로 전쟁 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1만여명의 유대인 아이들이 영국으로 탈출했다.

체코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윈턴은 호텔방을 사무실 삼아 기꺼이 자신의 아이들을 타국의 생면부지의 가정으로 떠나보내려는 유대인 부모들과 상담했다. 5000명의 지원자 중 영국으로 보내질 900명이 추려졌다. 윈턴은 영국에서 모금한 돈과 자비를 합쳐 나치 비밀국가경찰 게슈타포와 국경 철도 관계자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아이들의 탈출을 묵인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39년 3월14일 아돌프 히틀러가 체코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나치 ‘보호국’으로 선포하기 몇시간 전 20명이 처음으로 프라하를 떠났다. 이후 8편의 기차를 더 예약했으나, 그해 10월의 첫날 마지막 열차에 탔던 250명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발이 묶였다. 이들은 대부분 아우슈비츠 등 수용소로 끌려가 숨진 것으로 보인다고 <뉴욕 타임스>가 1일 보도했다. 이들이 영국에 도착했다면 윈턴이 계획한 대로 900여명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터였다.

2009년 10월1일 프라하에서는 70년 전 출발하지 못한 마지막 여정을 재현하는 기차가 떠났다. ‘윈턴의 아이들’과 후손들은 이 기차를 타고 영국 리버풀에서 갓 100살이 넘은 윈턴과 재회했다. 윈턴이 목숨을 구한 아이들과 그 후손은 현재 60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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