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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남기고 사라진 지허스님

지허스님은 서울대를 나왔다거나 1975년에 이미 입적했다거나 하는 소문 또는 진술이 있긴 했지만 모두 확실치는 않다고 2010년에 나온 재출간본의 편집자들은 밝히고 있다. 지허라는 법명도 사실 필명일 가능성이 높고, 조계종에서도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의 말처럼 '책만 남기고 사라진 사람'인 것이다. 이 책을 되살리려는 불광출판사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선방일기 저작권 조회 공고>를 내고, 각처에 지허스님의 행방을 문의하였지만 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서 결국 '한국저작권위원회의 법정허락 제도(공탁)'을 통해서 간신히 출간을 했다.

  • 박균호
  • 입력 2015.07.02 12:04
  • 수정 2016.07.02 14:12
ⓒ한겨레

살아가면서 일이 뜻대로 안 풀리고, 온 세상의 불운이 모두 자신에게 향한다고 느낄 때 한번쯤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가 '중'이나 돼버려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부지기수다. 나만 해도 그랬다. 사는 것이 고달프고, 산사의 생활이 유유자적하다고 철없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지허스님의 <선방일기>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선방일기>는 제목 그대로 어느 해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안거(冬安居)라고 부르는 선방의 수행의 일상을 담백하게 그려낸 책이다. 안거란 바깥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로지 산사에서 극한의 육체적인 고통이 뒤따르고, 기본적인 욕구를 거칠게 절제해야 하는 수행에 전념하는 일을 말한다. 더구나 극심한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강원도 산골에서의 동안거(冬安居)는 일상적인 인내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리라.

새벽3시부터 시작되는 고된 수련과 무려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결코 눕지 아니하고 꼿꼿이 앉은 채로만 수행하는 (장좌불와) 용맹정진에 이르러서는 산사의 생활이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기겁을 했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거창하고 심오한 불교의 원리나 말씀을 애써 가르칠 생각으로 가득찬 것은 아니다. 그저 묵묵히 선방에서의 생활을 이야기 할 뿐이다.

산사에서의 수련생활에 대한 환상은 접게 만들었지만 이 책은 의외로 재미나기까지 하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아끼고 곁에 두면서 몇 번 이고 읽는 까닭은 스님들의 고매한 수련과정의 대단한 때문이 아니라 지허스님의 유머스러운 필체가 주는, 읽은 즐거움 때문이다. 1973년 월간 신동아에 연재되었고, 유려한 필체 덕분에 서울대를 졸업한 인재라고 알려진 지허스님의 유머스러한 글은 언제 읽어도 즐겁고 배꼽을 쥐고 웃게 만든다.

1970년대에, 그것도 스님이, 누구나 고된 일이라고 여기는 '선방'의 일상을 이토록 재미나게 쓸 수 있다는 것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심지어 중간중간에 불교의 심오한 가르침을 알려주는 일을 놓치지 않고서 말이다. <선방일기>를 읽는 즐거움의 압권은 '뒷방'이야기를 꼽고 싶다.

11월 3일

선방의 역사는 뒷방에서 이루어진다.

뒷방의 생리를 살펴보자.

큰방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기다랗게 놓인 방이 뒷방(혹은 지대방)이다.

일종의 휴게실이다.

개인 장구가 들어 있는 바랑이 선반 위에 줄줄이 담을 쌓고 있어서 누구나가 드나든다.

휴게시간이면 끼리끼리 모여앉아 법담을 주고 받기도 하고 잡담도 한다.

길게 드러누워 결가부좌에서 오는 하체의 피로를 풀기도 하고 요가도 한다.

간병실과 겸하고 있어 병기가 있으면 치료도 한다.

옷을 꿰매는가 하면 불서를 보기도 한다.

편지를 쓰기도 하고 일기도 쓴다.

어느 선방이거나 큰방 조실이 있음과 동시에 뒷방 조실이 있다.

큰방 조실은 법력으로 결정되지만 뒷방 조실은 병기와 구변이 결정 짓는다.

큰방에서 선방의 정사(正史)가 이루어진다면 뒷방에서는 야사가 이루어진다.

선방에서는 뒷방을 차지하는 시간에 의해 우세가 결정되기도 한다.

뒷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많은 스님은 큰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적고

큰방을 차지하는 시간이 적은 스님은 점차로 선객의 옷이 벗겨지게 마련이다.

상원사의 뒷방 조실은 화대(火臺)스님이 당당히 차지했다.

위궤양과 10년을 벗하고

해인사와 범어사에서도 뒷방 조실을 차지했다는 경력의 소유자이고 보니 만장일치의 추대다.

사회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불가에서는 사교(四敎)까지 이수했고 절밥도 십년을 넘게 먹었고,

남북의 대소 선방을 두루 편력했으니 뒷방조실로서의 구비요건은 충분하다.

금상첨화격으로 달변에다 다혈질에다 쇼맨십까지 훌륭하다.

경상도 출신이어서 그 독특한 방언이 구수하다.

낙동강 물이 마르면 말랐지 이 뒷방 조실스님의 화제가 고갈되지는 않았다.

때로는 파라독스하고 때로는 페이소스하다.

때로는 도인의 경계에서 노는 것 같고 때로는 마구니의 경계에서 노는 것 같다.

제불조사가 그의 입에서 사활을 거듭하는가 하면

현재 큰 스님이라고 추앙되는 대덕스님들의 서열을 뒤바꾸다가

때로는 캄캄한 밤중이나 먹통으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무불통지요 무소부지인 체하면서 거들먹거리지만

그의 천성이 선량하고 희극적인 얼굴 모습과 배우적인 소질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버림받지는 않지만 추앙받지도 못했다.

천부적인 뒷방 조실감이라는 명물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이 뒷방 조실이 가끔 치명적으로 자존심에 난도질을 당하고

뒷방 조실의 지위를 위협당하는 때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원주스님 때문이다.

선방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원주스님은 대중들의 생필품 구입 때문에 강릉 출입이 잦았다.

강릉에 가면 주거가 포교당인데 포교당은 각처의 여러 스님들이 들렀다가 가는 곳이어서

전국 사찰과 스님들의 동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더구나 요즈음처럼 교통이 발달되고 보면 신문보다도 훨씬 빨리 그리고 자세히 알 수 있다.

원주스님도 꽤 달변이어서 며칠 동안 들어 모은 뉴스원을 갖고 돌아오면

뒷방은 뒷방조실을 외면하고 원주스님에게 이목이 집중된다.

그때 뒷방의 모든 헤게모니를 빼앗기고 같이 경청하고 있는

뒷방조실의 표정은 우거지상이어서 초라하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뉴스가 한토막씩 끝날 때는 막간을 재빨리 이용하여

뉴스에 대한 촌평을 코믹한 사족(蛇足)을 붙이거나 독설을 질타하는 것으로

체면유지를 하다가 원주스님의 뉴스원이 고갈되자마자

맹호출림의 기상으로 좌중을 석권하기 위해

독특한 제스처로 해묵은 뉴스들을 끄집어 내어 재평가를 하면서

일보통[뉴스통]의 권위자임을 재인식 시키기에 급급하다.

면역이 된 대중 스님들은 맞장구를 치지도 않지만 삐에로의 후신인양 지껄여댄다.

어디 이뿐인가? 허기진 배를 채우려는 욕심으로 상원사의 부식창고에서 감자를 훔쳐내서 구워먹다가 부식창고를 책임지는 '계량심의 천재' 원주스님에게 응징당하는 대목도 뭇 독자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수행자들에게는 수행의 거울이 되며, 일반인들에게는 불교의 기본 덕목을 쉽게 알려주며, 책 읽기의 재미를 추구하는 독자들에게는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웃음을 주는 이 책은 종교와 세대를 초월하는 가치를 지닌다.

단행본으로 나온 1993년과 2000년 당시에도 지허스님과 연락이 닿지 않아, 조심스럽게 출간이 된 이 책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지허스님은 서울대를 나왔다거나 1975년에 이미 입적했다거나 하는 소문 또는 진술이 있긴 했지만 모두 확실치는 않다고 2010년에 나온 재출간본의 편집자들은 밝히고 있다.

지허라는 법명도 사실 필명일 가능성이 높고, 조계종에서도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의 말처럼 '책만 남기고 사라진 사람'인 것이다. 이 책을 되살리려는 불광출판사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선방일기 저작권 조회 공고>를 내고, 각처에 지허스님의 행방을 문의하였지만 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서 결국 '한국저작권위원회의 법정허락 제도(공탁)'을 통해서 간신히 출간을 했다.

수행자들에게는 '귀감'을 그리고 독자들에게는 '감동'과 '웃음'을 주는 이 책의 가장 감동적인 구절은 따로 있다.

우리는 월정사 층층계 밑에서 헤어졌다.

"성불하십시오."

"성불하십시오."

남방행인 그 스님은 월정사로 들어갔고 나는 월정사를 뒤로 한 채 강릉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뭇 독자들의 관심을 뒤로 한 채 지허스님은 다만 수행의 길로 나아갔을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을 두고두고 읽고 가까이하며 붙잡아 두려는 독자들이 많다.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은 글의 분량이 너무 적어서 아껴가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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