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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썸남 시대

언제부턴가 남자는 소개팅의 기회비용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식사라도 맛있게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종의 진화다. 사실 이미 기회비용을 이용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심심하니까 소개팅할 때도 있어. 특별히 어떤 남자를 만나고 싶다기보단 특별한 계획이 없는데 소개팅 제안이 들어오면 그냥 나가는 거야. 맛있는 것도 먹고, 그냥 놀다 들어오는 거지." B양의 말처럼 어떤 여자들에게 소개팅이란 킬링 타임 무비 같은 것이다.

  • 민용준
  • 입력 2015.07.02 07:49
  • 수정 2016.07.02 14:12
ⓒgettyimagesbank

줄기차게 소개팅을 하는데도 만날 남자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요즘 남자들 속을 도통 모르겠단다. 만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썸 타는 남자들이 늘었다. 이유가 뭘까?

언젠가부터 A군은 심심찮게 괜찮은 레스토랑을 물었다. 소개팅 때문이라고 했다. 한 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소개팅을 했다. 어차피 같은 여자를 매주 만나는 것도 아닐 텐데 그렇게 열심히 장소를 옮겨 다니는 이유를 물었다. "장소가 중요하니까." 너무 당연해서 당황스러운 답변이었다. 하지만 곧 3면에서 불어오는 냉기 같은 멘트에 정신이 맑아졌다. "나도 같은 곳을 여러 번 가면 질리거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하면 최소한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유레카! 그렇다. 시간과 돈을 투자했으니 손실을 최소화해야 한다. 언제부턴가 남자는 소개팅의 기회비용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식사라도 맛있게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종의 진화다. 사실 이미 기회비용을 이용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심심하니까 소개팅할 때도 있어. 특별히 어떤 남자를 만나고 싶다기보단 특별한 계획이 없는데 소개팅 제안이 들어오면 그냥 나가는 거야. 맛있는 것도 먹고, 그냥 놀다 들어오는 거지." B양의 말처럼 어떤 여자들에게 소개팅이란 킬링 타임 무비 같은 것이다. 소개팅 자리에서 여자에게 계산을 시키는 남자를 만난다는 건 벼락을 맞을 확률과 비례할 것이니 나갈 준비만 하면 된다. 그래서 여자들은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라도 두세 번 만나는 게 부담스럽지 않다. 남자들은 계산하라는 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여자들에게 애프터 신청은 중요하다. 소개팅에서 애프터 신청을 받지 못한다는 건 치욕적인 일이란다. 하지만 요즘 남자들은 예전 같지 않다. 대부분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매너 모드를 유지한다. 하지만 헤어지면 꺼진 전화기처럼 울리질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은 여자와의 관계를 한 발 이상 내딛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은 여자에게 돈과 시간을 쓰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는 거다. 남자의 애프터 신청은 더 이상 매너가 아니다. 확실한 투자다. 어차피 소개팅 기회는 차고 넘친다.

"소개팅에서 만났을 때 진짜 괜찮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은 대부분 콧대가 높다." C양이 말한 '진짜 괜찮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기준은 무엇일까? "키 크고, 나이는 적당하고, 학벌 좋고, 직장도 번듯하고, 얼굴은 그냥 못 볼 정도만 아니라면야." 왜 얼굴보다 키일까? "키가 큰 남자는 대부분 잘 꾸며놓으면 괜찮아지거든. 얼굴까지 잘생기면 더 좋고." 하지만 요즘 그런 남자들은 이미 자신의 몸값을 안다. 시간은 남자의 편이다. 30대 여자들은 소개팅 시장에서 30대 남자들보다 단가가 낮게 책정된다. "원래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기보다 더 나은 수준의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30대가 넘어가면 점점 자기랑 비슷한 수준의 남자랑 결혼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니까." 30대 이후의 미혼 남자들은 결혼 시기를 놓쳤거나 결혼이 절실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한쪽은 매력이 없고, 한쪽은 믿을 수 없다. 고로 이상적인 남자를 찾기 어렵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어"라고 D군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어제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다. 마음에 드는 여자는 없어도 여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사실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여자는 많지. 하지만 마음에 드는 여자는 정말 없다니까. 그냥 요즘은 섹스하려고 여자 만나는 거 같아." D군은 잘생기고, 키도 크고 결정적으로 능력이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여자가 많았다. 혹자는 이게 무슨 된장녀 아메리카노 원샷 하는 소리냐 하겠지만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다. 지하철 3호선 타고 다닌다며 당당하게 말하는 남자의 말에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이던 여자도 외제차 키를 무심한듯 시크하게 테이블에 올려놓은 남자 옆에 앉는 법이다. 키도 크고, 잘생기고, 돈도 많아 보이는 남자가 매너도 좋으니까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체크인과 체크아웃 시간이 정해진 호텔 같은 남자라서 안타까울 뿐이다. 룸 서비스 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의 원 나잇에 투숙한 뒤 새로운 방을 찾아야 한다. 제로섬 게임이다. 자신이 머물 방을 찾아야 하는 여자는 반복되는 패턴이 지겹고, 방에 새로운 여자를 끌어들여야 하는 남자는 자신의 욕정이 허망하다.

100세 시대라는데, 인생은 길어졌지만 서로 어떤 사람인지를 천천히 알아갈 만한 인내심은 줄었다. 여유가 사라졌다. 적자생존의 진화 과정을 거친 동물적 본능으로 더 나은 사람을 선택하고자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그러다 보니 선택을 위한 인내심은 증발하고 만남과 이별의 패턴에 대한 익숙함만 남는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소개팅을 아무리 해도 남자를 만날 수 없다니. 소개팅을 하러 나갔는데 음식에 반해야 한다니. 여자들은 성에 차는 남자를 찾기 어렵다고 말한다. 정말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콧대가 너무 높다고 말한다. 덧셈, 뺄셈 수준이었던 남자들이 언젠가부터 미분, 적분 수준으로 진화했다. 상대적으로 남자들은 여자를 만나는 게 쉬워졌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기는 역시 어렵다고 말한다. 왠지 이 여자보다 더 괜찮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내가 투자한 자리인데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하는 게 이치에 맞다. 그리고 여자를 만나지 않아도 놀 사람은 많다. 주변에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도 적지 않다. 플레이보이들이 넘친다. 남자끼리 모여 와인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도 지겹지 않다. 여자에게 쓰던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은 넓고 기회는 많다. "아무래도 요즘 남자들은 박력이 줄어들었지." 여자의 입에서 발음된 게 아니다. E군은 계속 말했다. "사실 여자들도 이젠 남자한테 기댈 필요 없잖아. 나름대로 사회적 지위가 생긴 여자도 많고. 그만큼 남자들이 여자들을 압도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 줄어든 거 아냐. 그러니까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그러니까 계속 썸만 타는 거지." 일리 있는 말이다.

터프가이의 시대는 끝났다. 화끈했던 남자들은 맹탕이 됐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사랑은 쟁취하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거라고. 나를 보고 자꾸 웃어주는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착각하던 남자들은 그녀의 미소를 닮은 매너로 여자들을 착각하게 만드는 법을 익혔다. 썸 태우는 기술을 익힌 것이다. 경제적인 우월감을 창처럼 휘두르던 남자들은 이제 '썸'이라는 방패 뒤로 숨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우월한 존재여야 했다. 그 수단은 경제력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남자들의 경제력은 여자를 압도하지 못한다. 그만큼 비슷한 여건을 지닌 또래 여성에게 자격지심을 느끼는 남자들도 늘어났고,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점할 수 있는 어린 여자들을 살피게 된다. 그런데 이건 남녀 관계가 평등해지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남자들의 지배력이 떨어진 건 여자들의 지위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페어플레이가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보다 명확해진다. 남자가 계산하는 게 당연하다는 암묵적 룰도 깨져야 한다. 페어 게임을 원한다는 신호는 분명 매력적이다. 뺨 맞은 재벌 2세처럼 '이런 여자 처음인데'라는 인상만 줘도 일단은 성공이다. 남자는 단순하다. 그러니 알려줘야 한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 역시 이런 관계에 있어 동등한 투자자임을 어필해야 한다. 같은 출발선 위에 서 있음을 깨우치게 해줘야 한다. 물론 남자가 당신의 지갑을 사랑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썸'을 타고 말지.

(ELLE KOREA에 게재된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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