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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앤드로지너스 패션'일까?

  • 남현지
  • 입력 2015.06.27 19:24
  • 수정 2016.06.27 14:12
ⓒLOEWE

나에게 남성잡지 중 최고를 꼽으라면 단연 <판타스틱 맨>(FANTASTIC MAN)이라고 말할 수 있다. 편집 디자인, 패션 화보, 판에 박히지 않은 인터뷰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지만 이 잡지가 위대한 이유는 '지금 가장 핫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의미있는 것들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지난 10년간 크고 작은 잡지들이 판타스틱맨의 영향을 받았다. 판타스틱맨이 쓰는 산세리프(sans-serif) 폰트, 텍스트의 이단 혹은 삼단 배열, 거슬거슬한 내지까지 '세련된 잡지'의 기본 요소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판타스틱맨이 10주년의 표지모델로 1984년생 패션디자이너 조나단 앤더슨을 선정했다.

디자이너 조나단 앤더슨

조나단 앤더슨이 말 그대로 다음 세대의 '끝내주는 남자'(판타스틱 맨)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유력한 이유는 21세기형 앤드로지너스(양성적인)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앤드로지너스가 그의 패션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형용사가 된 건 그의 브랜드 제이 더블유 앤더슨(J.W. Aderson) 남성복 2013 가을·겨울(F/W) 컬렉션부터였다. 팬티를 겨우 가릴 만한 길이의 민소매 원피스, 프릴이 달린 반바지, 어깨를 훤히 드러낸 오프숄더 상의, 무릎까지 오는 타이트한 부츠. 여자 옷을 입은 남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충격'과 '파격'이란 단어로 컬렉션에 대한 느낌을 버무렸다.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그때의 쇼를 '미니스커트를 입은 이수혁'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당시 모델 이수혁이 쇼에 섰었다).

J.W. Anderson MEN 2013 F/W

여자가 남자 옷을 대중적으로 입은 건 1920년대부터다. 코코 샤넬은 남성용 속옷으로 쓰이던 '저지'를 이용해 여성을 위한 편안한 옷을 만들었으며, 남성용 의복에 착안해 샤넬만의 정장을 개발했다. 이후 70년대에는 이브 생로랑의 팬츠슈트 '르 스모킹'이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현재 '남성만의' 전유물로 꼽히는 의복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반대로 남성들에게 드레스, 치마와 같은 옷은 여전히 성역처럼 존재하는 듯하다. 장 폴 고티에, 존 갈리아노 같은 디자이너들이 '치마를 입은 남자'를 런웨이에 종종 세우긴 했지만, 일상화된 옷이라기보다는 '코스튬'(무대의상)에 가까웠다. 그래서 여자의 옷을 입은 남자의 패션은 '여장' 혹은 '드랙'(공연을 위한 여장)과 같은 비일상적인 개념이 되었다.

하지만 앤더슨의 등장 뒤 2010년대 남자 패션의 지형도는 새롭게 바뀌고 있다. 우선 후드바이에어와 같은 스트리트 브랜드는 남자 모델에게 과감히 무릎 위, 그것도 '핫팬츠' 라인인 위쪽 허벅지를 드러내게 했다. 생각해보라. 이제까지 남성들에게 반바지의 마지노선은 무릎 위였다. 이를 젊은 디자이너의 실험정신으로만 바라볼 순 없다. 명품 브랜드 지방시의 가죽치마는 카니예 웨스트 같은 래퍼들이 애용했으며 최근 구찌, 프라다까지 모두 '걸프렌드 룩'(여자친구의 옷을 입은 것 같은 패션, 보이프렌드 룩의 반대)을 속속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보다 앤드로지너스 패션이 각광을 받는 건 트랜스젠더의 권리가 신장되고 있으며, 성 정체성에 구애받지 않는 '성 중립' 화장실이 설치된 2015년의 흐름도 한몫할 것이다.

앤더슨의 패션이 기존의 앤드로지너스 패션에서 더 나아간 점이 있다면 '셰어드 워드로브'(Shared Wardrobe), 즉 옷장을 공유하는 개념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과 남성 모두를 위해 만들어진 '유니섹스' 패션이 아니라 여성이 남성의 옷을 사고, 남성이 여성의 옷을 사는 것이다. 앤더슨의 '공유 옷장'을 듣고 떠올린 건 내 방에 나란히 있는 남동생과 나의 옷장이었다. 나와 체격이 비슷한 남동생은 내 옷장에서 종종 옷을 뒤져서 입곤 했다. 왜 90 사이즈의 '남방'에는 허리선이 들어가 있느냐며 불평하던 남동생은 투덜거림도 잠시, 별로 상관없다는 듯 옷을 입곤 했다. 나 또한 동생의 옷장에서 투박한 패딩을 꺼내 입었다. 이미 앤더슨의 개념을 실행하고 있던 나와 남동생에게 최근의 흐름은 그저 반갑게 느껴진다. 앤더슨이 말했듯 패션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개인에게 옷이 어떤 의미인지"가 중요하니 말이다.

*이 글은 한겨레 신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정정: 르 스모킹의 시대를 70년대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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