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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 | 슈퍼히어로 만화 속 전염병

최근 대한민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메르스 사태처럼 우리가 통제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소재인 만화도 하나 있다. 바로 배트맨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이자 최근 가장 '뜨는' 악당인 할리퀸의 창작자 폴 디니가 거장 알렉스 로스와 수년간 공들여 내놓은 『JLA: 자유와 정의』다. 어느 날, 아프리카에 의문의 전염병이 발생한다. 하루 만에 급파된 구조팀마저 병마에 쓰러진 상황에서 정부는 저스티스 리그에 긴급 지원을 요청한다. 리그는 정부 역시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눈치챈다. "명심하게. 정부는 우리가 공유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숨기고 있어."(배트맨).

  • 이규원
  • 입력 2015.06.29 10:00
  • 수정 2016.06.29 14:12
ⓒ시공사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

─슈퍼 히어로 만화 속 전염병

이번 이야기를 하기 전에, 1990년대 배트맨의 역사를 정식 출간된 만화책 중심으로 잠깐 정리해 보자. 먼저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가 1986년 출간된다. 모던 배트맨의 효시로 알려진 이 작품은, 그러나 연대기 순으로는 가장 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배트맨을 은퇴한 미래의 브루스 웨인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다음이 1987년의 『이어 원』이다. 이 책은 모던 배트맨의 가장 첫 이야기를 다룬다. 1988년 『킬링 조크』가 출판되고, 『패밀리의 죽음』은 같은 해 시작되어 1년 뒤 제이슨 토드의 사망으로 완결되었다. 이후 3대 로빈 팀 드레이크가 1989년 처음 등장해 1990년 12월 공식적인 로빈으로서 범죄와의 전쟁에 뛰어든다. 1990년은 바버라 고든이 『킬링 조크』의 부상을 딛고 오라클로서 활동을 시작하는 해이기도 한데, 그녀가 오라클로 처음 등장한 만화는 (2016년 영화 개봉이 예정된)『수어사이드 스쿼드』였다. 배트맨의 조수인 로빈과 배트걸의 운명이 바뀐 시기가 이때이다. 한편 1989년에는 배트맨에게 새로운 시공간을 주려는 시도가 '엘스월드'의 시초로 불리는 『가스등 아래의 고담』으로 결실을 맺는다. 1992년에는 1대 아즈라엘인 장 폴 밸리가 새롭게 등장하는 『배트맨: 섀도 오브 배트』, 『배트맨: 소드 오브 아즈라엘』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배트맨 최악의 적 중 하나인 베인이 등장하고, 베인에게 몸과 마음을 '꺾인' 브루스 웨인은 밸리에게 자신의 망토를 맡긴다. 1994년 허리 부상에서 회복한 그가 밸리에게 배트맨을 돌려받기까지의 이야기가 『나이트폴』이다. 밸리는 1년 후 『아즈라엘』이라는 단독 시리즈를 가진다.

배트맨, 바이러스와 싸우다

새로운 시공간, 아군, 사이드킥, 숙적까지 배트맨의 외연을 계속 넓혀 나가던 DC는 1996년 지금까지의 악당과는 차원이 다른 위협적 존재를 선보인다. 바로 '에볼라 걸프 A'라는 이름의 바이러스였다. 1989~1990년 아프리카에서 수입된 원숭이가 보균자임이 알려지면서 한때 전 미국을 공포에 빠뜨렸던 에볼라를 만화로 재구성한 바이러스다. 이 바이러스의 특징은 12시간 안에 감염자를 괴물과 같은 모습으로 바꿈과 동시에, 전신성 출혈이 특징인 에볼라처럼 눈에서 계속 피를 흘린다는 것이었다. 이 바이러스는 최초 감염자의 기침 한 번으로 곧바로 2차 감염자가 발생할 정도의 무서운 전염력을 자랑한다. 바이러스의 정보를 가장 먼저 입수한 배트맨은 곧바로 감염자를 찾아 나서지만, 전염병의 확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군대가 투입되고 로빈마저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는 등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배트맨은 이 배후에 악당 라스 알 굴과 그의 딸 탈리아 알 굴, 그리고 이전에 그를 꺾었던 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배트맨은 자연 재해로부터 고담을 지킬 수 있을까? 배트맨『컨테이전』, 『레거시』, 『노 맨스 랜드』 표지.

(사진 출처: 배트맨 컨테이전 https://en.wikipedia.org/wiki/File:Batman_Contagion_TPB_cover.jpg, 배트맨 레거시 http://dc.wikia.com/wiki/Batman:_Legacy?file=Detective_Comics_Vol_1_700_Variant.jpg, 배트맨 노 맨스 랜드 http://dc.wikia.com/wiki/Batman:_No_Man's_Land?file=Batman_No_Mans_Land_Vol_1_TP.jpg /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이상이 1996년 『배트맨: 컨테이전』과 『배트맨: 레거시』의 내용이다. 『나이트 폴』에서는 아캄을 부수고 나온 미치광이 악당들이 고담에 풀려나더니, 『컨테이전』과 『레거시』에서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가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DC는 여기서 한술 더 떠서 1999년의 크로스오버 이벤트『노 맨스 랜드』에선 고담을 대지진으로 초토화시키기까지 한다. 악당들이 고담에 풀어놓는 공포가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던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라이즈」 같은 영화와 관련해 이런 만화들을 곁들여 본다면 새로운 감흥을 얻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나이트폴』 외에 『컨테이전』, 『레거시』, 『노 맨스 랜드』는 아쉽게도 아직 정식 출간되지 않았다.

바이러스 나에게 능력을 주시니: 아이언맨과 케이블

이렇게 만화 세계에서 바이러스는 공포의 대상이 될 때도 있지만, 엄청난 능력을 선사하는 도구로도 종종 사용된다. 대표적인 예가 마블 코믹스의 익스트리미스 바이러스와 테크노 오가닉 바이러스다. 익스트리미스 바이러스는 영화 「아이언맨 3」에서 처음 접한 사람이 많겠지만, 원래 2005년 만화 『아이언맨: 익스트리미스』에 등장한 것이 원조다. 슈퍼 솔저 약물에 더 가까운 이 기계 조직 바이러스를 주사 받은 사람은 초인적인 힘과 스피드, 회복력은 물론 입에서 불을 뿜는 능력까지 얻는다. 만화에서도 토니 스타크는 익스트리미스를 조금 고쳐 주사함으로써 아머를 자신의 골격에 넣고 다닐 수 있게 된다.

사이클롭스의 아들, 미래전사 케이블의 활약상을 다룬 세 편의 작품.

(사진 제공: 시공사)

테크노 오가닉 바이러스는 2016년 개봉 예정인 영화 「데드풀」의 등장인물 케이블이 걸린 '몸이 기계로 변해 죽는' 바이러스다. 국내 정식 출간작 중 케이블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만화는 일명 '메시아 삼부작'이라고 불리는 『엑스맨: 메시아 콤플렉스』, 『엑스포스/케이블: 메시아 워』, 『엑스맨: 세컨드 커밍』, 그리고 『데드풀과 케이블』이 있다. 케이블을 평하자면 한마디로 단순하고 우직한 군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케이블 역에 「아바타」에서 마일즈 대령을 연기했던 스티븐 랭이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케이블의 사연은 이렇다. 케이블은 엑스맨의 리더 사이클롭스가 죽은 진 그레이의 복제인간 메들린 프라이어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다. 케이블은 아포칼립스라는 악당에 의해 테크노 오가닉에 감염되어 죽을 위기에 놓이는데, 현재 기술로는 치료할 수 없기에 케이블은 2000년 후의 미래로 보내진다. 공교롭게도 그 미래는 아포칼립스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였다. 케이블은 아포칼립스와 맞서는 전사로 성장하였고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텔레파시 능력을 이용해 바이러스의 확산을 왼쪽 팔만으로 억제할 수 있었다. 이 금속 팔은 첨단 컴퓨터의 기능을 함은 물론, 시간 여행 능력까지 갖고 있다. 그는 시간 여행 능력을 이용해 아버지의 과거로 돌아와 암울한 미래가 도래하지 못하도록 싸워 나간다.

바이러스보다 더 큰 불신의 위협

배트맨의 사례처럼 최근 DC의 뉴52에서도 렉스 루터가 바이러스를 만들어 세상에 퍼뜨린 사건이 있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어쨌든 만화 세계에서는 주로 인간이 연구해서 개발한 바이러스, 최소한 누군가는 통제력을 지니고 있는 바이러스를 소재로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대한민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메르스 사태처럼 우리가 통제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소재인 만화도 하나 있다. 바로 배트맨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이자 최근 가장 '뜨는' 악당인 할리퀸의 창작자 폴 디니가 거장 알렉스 로스와 수년간 공들여 내놓은 『JLA: 자유와 정의』다.

큰 힘만큼이나 큰 책임감을 가진 영웅들의 이야기. 『JLA: 자유와 정의』표지.

(사진 제공: 시공사)

어느 날, 아프리카에 의문의 전염병이 발생한다. 하루 만에 급파된 구조팀마저 병마에 쓰러진 상황에서 정부는 저스티스 리그에 긴급 지원을 요청한다. 리그는 정부 역시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눈치챈다. "명심하게. 정부는 우리가 공유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숨기고 있어."(배트맨). "이 관료들은 자신들이 겪어본 적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무기를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군."(마샨 맨헌터).

현장에 도착한 초능력자들은 곧바로 샘플의 채취를 시작하고, 이를 통해 전염병의 근원이 외계 바이러스임이 밝혀진다. 바이러스가 공기를 통해 전 세계로 퍼질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세계는 공포의 도가니에 빠진다. "진실은 찾기 힘들어지고 소문과 추측이 난무하기 시작했어."(슈퍼맨). 이 와중에 병원균이 외계의 것임을 근거로 리그를 위협의 근원으로 지목하는 사람까지 나타난다. "외계의 질병입니다. 슈퍼맨과 다른 세 멤버는 지구 출신이 아니죠."(언론 보도)

바이러스가 외계인 침공의 전조라는 의견과 리그가 전염병의 원흉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폭동과 약탈이 들불 붙듯 일어나며 세계는 무법천지가 된다. 저스티스 리그가 병의 전파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백신으로 사람들을 치료하는 한편 병원균 자체를 박멸하는 데 성공했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저스티스 리그가 원하지 않던 결과였다. 위기의식은 그들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확대되었다."(마샨 맨헌터)

이때 저스티스 리그는 어쩔 수 없이 힘으로 사람들을 제압해 소란을 진정시킨다. "단 하루 만에 자비로운 인류의 수호자들은 무서운 감독자로 변했다."(마샨 맨헌터) 슈퍼맨 역시 문제를 제기한다. "우린 우리가 지키기로 약속했던 사람들에게 우리 힘을 사용했어. 전염병의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 우리가 취한 방법이 문제였지. 저스티스 리그가 회복이 가능할지. 나는 그게 염려돼."(슈퍼맨)

하루 만에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막아냈음에도 리그는 UN 본부에 가서 바이러스에 대한 모든 정보를 공개한다. 그들 중 누구도 바이러스를 막아낸 공을 칭찬받기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바이러스 퇴치와 혼란 진정 과정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중대한 잘못을 깊이 사과하고 뉘우치며 신뢰를 회복하는 일에 나선다.

누가 감시자를 감시하는가?(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저스티스 리그는 자유와 질서를 지키기 위해 혼란을 힘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혼란과 불신을 키운 원인이 자신들이었음을 시인한다. 전 세계를 분열의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바이러스 이전에 리그의 문제 해결 방식에 있었다는 것이다.

1988년 휴고상을 수상한 20세기 최고의 그래픽 노블.

앨런 무어의 『왓치맨』 표지.

(사진 제공: 시공사)

평화와 질서라는 거룩한 이상을 내세우면서 진실을 은폐하는 히어로. 우리를 지키는 수호자들이 감독자로 돌변할 때 '누가 감시자를 감시하는가.' 이것은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함께 슈퍼 히어로 만화 역사에서 모던 에이지를 연 작품으로 인정받는 『왓치맨』의 테마이기도 하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를 바꾸기 위해 뉴욕 시민의 절반을 외계인의 침략으로 꾸며 살해해 버린 이 작품에서 전지전능한 초능력자인 닥터 맨해튼은 "생명을 지키고 싶다면 우리가 입을 다물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진실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로어셰크를 제거한다. 그러나 로어셰크를 죽였다고 진실이 전부 어둠 속에 덮인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일기장만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한 기자의 손에 전해진다. 기자에게 던져지는 마지막 한 마디. "모든 것은 네 손에 달렸어."

어찌 됐든 앞선 『컨테이전』, 『레거시』, 『노 맨스 랜드』로 이어지는 배트맨 스토리와 『JLA: 자유와 정의』 둘 다 바이러스 이후에 다가오는 또 하나의 거대한 위협을 그리고 있다. 배트맨에서 그것은 물리적인, 고담 전체가 문자 그대로 갈라지고 무너지는 대지진이었다. 『JLA: 자유와 정의』에서는 슈퍼 히어로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불신의 대지진이 리그를 덮친다. 만화에서 슈퍼 히어로는 참회와 자기반성을 통해 역경을 이겨내고 정당성의 회복에 성공했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는 권력의 참회와 자기반성을 얼마나 목격해 왔는가? 만약 『왓치맨』의 세계가 현실이라면, 우리를 지키려 만들어진 초월적 집단이 독단을 행한다면, 이를 막고 정당성을 회복할 방법은 무엇인가? 『왓치맨』의 작가 앨런 무어는 진실을 세상에 펼쳐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스마일 문양 티셔츠를 입고 햄버거를 씹어대는 주근깨투성이 기자, 평범한 청년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네 손에 달렸어."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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