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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투사 박근혜

박 대통령은 약 16분 정도 이어진 국무회의 모두 발언에서 메르스와 관련해 짧게 언급했을 뿐 나머지 12분을 의회와 여야에 대한 맹공으로 채웠다. 박 대통령은 왜 이처럼 국회법 개정안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것일까? 박 대통령이 메르스 실정을 대결정국으로 희석시키려는 의도를 가졌을 수도, 내년 총선 공천권을 행사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새누리당에 천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 이태경
  • 입력 2015.06.26 06:08
  • 수정 2016.06.26 14:12
ⓒ연합뉴스

이번에도 박근혜 대통령이 이겼다. 박 대통령은 여야가 합의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고 재의를 요구했다. 박 대통령의 서슬에 화들짝 놀란 새누리당은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재의결하지 않을 태세고. 국회법 개정안은 결국 자동폐기될 운명이다. 국회법 개정안의 핵심골자라고 해 봐야 국회상임위원회가 행정입법의 수정.변경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고,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요청받은 사항을 처리하고 그 결과를 상임위원회에 보고하는 정도다. 정부의 시행령이 모법의 위임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입법기관인 의회가 미약한 통제를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행정업무마저 마비시키는 것은 국가의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며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해, 과거 정부에서도 통과시키지 못한 개정안을 다시 시도하는 저의를 이해할 수 없다" 등의 말을 하며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권을 행사했다. 박 대통령은 약 16분 정도 이어진 국무회의 모두 발언에서 메르스와 관련해 짧게 언급했을 뿐 나머지 12분을 의회와 여야에 대한 맹공으로 채웠다.

아래에서 보듯 박 대통령의 발언은 살벌하다.

"정치가 국민들을 이용하고 현혹해서는 안 된다"

"늘상 정치권에서는 언제나 정부의 책임만을 묻고 있고, 정부와 정부정책에 대해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 비판만을 거듭해 왔다"

"일자리 법안들과 경제 살리기 법안들이 여전히 국회에 3년째 발이 묶여 있다. 정치권에서 민생 법안이 아닌 정치적 이해관계에 묶인 것들부터 서둘러 해결하는 걸 보고 비통한 마음마저 든다"

"국회가 꼭 필요한 법안을 당리당략으로 묶어놓고 있으면서 본인들이 추구하는 당략적인 것을 빅딜을 하고 통과시키는 난센스적인 일이 발생하고 있다"

"앞으로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이 저에게 준 권한과 의무를 국가를 바로세우고 국민을 위한 길에만 쓸 것"

"여당 원내사령탑도 정부·여당의 경제살리기에 어떤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 가는 부분"

"민의를 대신하고 국민들을 대변해야지, 자기의 정치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

"저도 결국 당과 후보를 지원하고 다녔지만 돌아온 것은 정치적, 도덕적 공허함"

"오로지 선거에서만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신의를 저버리고 국민의 삶을 볼모로 이익을 챙기려는 구태정치는 이제 끝을 내야 한다"

"선거를 수단으로 삼아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

("선거에서 심판해달라"... 박 대통령, 국회에 선전포고)

박 대통령의 발언을 보면 박 대통령만 나라와 시민을 생각하고 의회와 여야는 시민은 안중에 없이 당리당략을 일삼으며 정부의 발목만 잡는 존재다. (대통령을?) 배신한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섬뜩한 저주의 의미도 읽힌다.

박 대통령은 왜 이처럼 국회법 개정안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것일까? 박 대통령이 메르스 실정을 대결정국으로 희석시키려는 의도를 가졌을 수도, 내년 총선 공천권을 행사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새누리당에 천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아무튼 박 대통령은 승리했다. 무엇보다 이반 조짐을 보이던 새누리당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한 것이 최대 성과다. 야당과의 대결구도를 만들어 열혈지지자들을 결속시키는 건 덤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정치적 승리가 오로지 본인만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또렷하다. 박 대통령이 뭐라고 하건 이번 국회법 개정안 파동은 박 대통령의 독점적 권력행사 욕망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다.

의회와 여야를 적으로 규정하고 싸우는 듯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자연스럽게 겹치는 이미지는 검투사다. 원형경기장에 선 검투사는 자기를 제외한 사람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죽기살기로 싸운다. 박 대통령의 모습이 꼭 그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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