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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6월 26일 11시 43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6월 26일 14시 12분 KST

나이먹기의 괜찮은 기술

또 다른 문제는 치매다. 아니, 치매에 걸릴까 두려운 치매 공포증이다. 3년 전 퇴직 후 건망증이 부쩍 심해졌으며 급기야 정상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는 자가 진단. 알츠하이머를 비롯한 각종 치매를 점검하는 체크리스트를 거의 정기적으로 들여다본다. 얼마 전엔 50대 치매를 소재로 한 영화 '스틸 앨리스'를 보러가자는 친구 제안을 거절했단다. "혹시나 닥칠지 모르는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아서"다. 암 환자들이 "치매보다는 암에 걸리는 게 낫다"는 농담으로 서로를 위로하는 걸 보고 소스라쳤다는 선배.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오전 10시 경, 지하철 속 맞은편에 앉은 50대 후반의 남성.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다. 스마트폰을 조금 들여다보더니 곧 눈을 감고 졸기 시작한다. 말쑥하게 닦인 구두, 질감이 좋아 보이는 여름 재킷을 떨쳐입은 옷매무새와 달리 얼굴에 피로가 짙게 배어있다. 오늘 그가 짊어진 하루치 삶의 무게를 짐작하게 하는 낯빛. 왠지 짠하다.

나이 40 이후에는 얼굴이 곧 이력서라고 한다. 한 인간이 태어난 이후 축적된 경험이 얼굴에 몽땅 실려 있다는 거다. 얼굴은 그간의 개인사뿐 아니라 지금 삶의 현실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지하철이나 버스, 또는 길에서 마주치는 중년 이상 노년들의 얼굴이 어둡다. 어두워도 너무 어둡다. 느닷없는 감염병의 기습 때문일까. 아니면 날로 축 처지는 피부와 주름 때문? 하지만 이것들만으로는 설명 되지 않는 어두침침한 분위기가 있다. 그건 뭐지?

"60대 후반이 되니 웃을 일이 별로 없다"던 어느 선배의 말이 생각난다. 그분의 경우, 건강이 첫 번째 우려 사항이다. 어깨의 석회화로 인한 통증과 수면 장애가 발단. 그 다음엔 심장의 불규칙 박동이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있다. 혈당 지수와 콜레스테롤도 당연히 관리해야 할 사안.

또 다른 문제는 치매다. 아니, 치매에 걸릴까 두려운 치매 공포증이다. 3년 전 퇴직 후 건망증이 부쩍 심해졌으며 급기야 정상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는 자가 진단. 알츠하이머를 비롯한 각종 치매를 점검하는 체크리스트를 거의 정기적으로 들여다본다. 얼마 전엔 50대 치매를 소재로 한 영화 '스틸 앨리스'를 보러가자는 친구 제안을 거절했단다. "혹시나 닥칠지 모르는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아서"다. 암 환자들이 "치매보다는 암에 걸리는 게 낫다"는 농담으로 서로를 위로하는 걸 보고 소스라쳤다는 선배. 얼마 전엔 "웃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남에게 화난 얼굴로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우울해졌다고 한다. 웃어넘길 수가 없다. 누구에게나 다가올 미래이기에.

그래서일까. 나를 포함한 베이비부머 세대는 늘어난 평균수명에 결코 기뻐하지 못한다. 무병장수가 아니라 유병장수를 살아야 할 운명의 가혹함 앞에 속수무책이어서다. 65세 이후 삶의 질은 결국 건강의 질에 좌우될 것임이 분명할 터. 게다가 늘어나는 수명은 노후 준비에 필요한 예산 규모를 자꾸 늘리고 있다. 부모 봉양과 자식 부양이라는 '사람 노릇' 만으로도 숨이 턱에 차는 처지에 각자 노후 자금까지 도모해야 하는 현실이다. 자식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지만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70 이후 앞가림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전망. 급기야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는 건가. 65세 이후 집 한 채와 연금 외에도 최소 5억 원이 있어야 된다느니, 친구들 모임에서 토론이 많아진다. "노후에 대한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다"는 아우성.

그러니 표정이 밝을 리 없다. 60 이후가 되면 여성이나 남성을 막론하고 무표정하거나 심술궂어 보이는 얼굴이 늘어난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늘어진 볼살 때문에 심술 맞게 보인다는 분석. 척추협착이나 디스크 같은 만성적인 척추 통증이 얼굴 근육을 찌그러뜨려 칙칙해 보인다는 설명도 설득력이 있다. 내 뜻을 존중해주지 않는 자식들이 짜증 유발자라는 지적에 다들 고개를 끄덕거린다.

밝은 표정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이구동성. 외출 직전 화장을 마치고 거울 앞에서 한번 방긋 웃는 표정을 수시로 연습해야 한다고 한 친구가 말한다. 연습이 거듭되면 습관으로 굳어진다는 거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표정 관리 연습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보다 근본적인 건 내면의 평화겠지. 앞으로의 삶, 다가올 노년에 대한 태도가 어쩌면 표정을 좌우하는 게 아닐까. 지금보다 가난해질 게 확실시 되는 노후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 친구가 말한다. 한편 유병장수의 시대, 어차피 병이란 노년을 함께 할 친구 같은 존재가 아닌가. 피할 수 없다면 함께 놀아줘야 한다. 각자의 지병을 연구하고 병에 능동적으로 적응해 나가면서 병으로 인한 스트레스 관리를 해야 한다는 데 이의가 없다. 이게 말처럼 쉬울 리는 없다. 그 누가 병과 약물의 격전지가 되어가는 자신의 몸을 태연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아직 내 몸이 내 것이라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이 지상의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렌탈'이다. 내 몸을 포함해 소위 '내 것'이란 것들은 잠시 내 것일 뿐, 모든 소유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바로 내가 살아있는 동안만이다. 내 몸을 렌터카처럼 바라보기 연습? 모두들 하하 웃어댄다. 길어야 백년 미만인 유한성이 가져오는 존재의 불안, 노후에 대한 두려움은 원래 우리의 삶에 내장된 정서의 품목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로·병·사의 사이클을 풀코스로 체험하도록 설계된 프로그램이 바로 각자의 생애일 터. 그 점에 관한 한 인생은 공평하다. 결국 삶이 제공하는 온갖 쓴맛과 단맛을 인정하고 온전하게 체험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몫이다. 나이 먹기의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그에 대처하는 방식으로서의 우울증까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품위 있는 노년에 대한 야심을 조금 내려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멋있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도 욕심일 테니. 어딘가 뒤뚱거리고 온전치 않은 육신과 마음의 불안정을 바라보면서 마치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살아가기. 이것이 나이 먹기의 괜찮은 기술이 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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