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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건 '김대중-이희호' 부부 문패

  • 원성윤
  • 입력 2015.06.23 09:48
  • 수정 2015.06.23 09:49
ⓒ김대중평화센터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

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이 일대기는 매주 한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삼아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

이희호는 결혼 이듬해 1963년 11월12일 아들 홍걸을 낳았다. 마흔한살 노산이었으나, 6대 총선에서 목포에 출마한 남편 김대중은 선거일(26일)을 코앞에 둔 때여서 홀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았다. 사진은 1964년 어느 날 새 가족이 모처럼 창경원으로 나들이를 갔을 때로, 김대중이 안고 있는 아이가 막내 홍걸, 이희호 오른쪽이 고교 1년생 맏아들 홍일이다. 중학교 3학년이던 둘째 홍업은 빠져 있다. 뒷줄에 선 여자는 가사도우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결혼은 또다른 시련의 전주곡이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열흘째인 1962년 5월20일 이희호는 남편이 ‘반혁명’이라는 죄목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6월1일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민주당 반혁명 음모사건’을 적발해 41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옛 장면 정권의 민주당 간부들이 모여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것이었다. 군사정권에 짓밟혀 숨도 쉬지 못하는 사람들이 쿠데타를 꾸몄다니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 사건은 정치적 반대파를 ‘용공’이나 ‘반국가’로 몰아 탄압하는, 이후 끝없이 이어질 조작극의 서막이었다. “남편은 잡혀간 지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어요.” 아무리 뒤져도 나오는 것이 없으니 풀어준 것이었다.

김대중이 연행당한 곳은 서대문구 대신동의 30만원짜리 전셋집이었다. 이희호가 들어간 집에는 홍일·홍업 두 아이 말고도 ‘호랑이 할머니’로 불리던 시어머니와 아픈 시누이가 있었다. 시누이는 남편이 풀려나 집에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시누이는 이화여대 국문과에 다니던 중 심장판막증에 걸려 병석에 누웠다. 외모가 수려하고 문학 창작에 재능이 있어 주위에서 기대가 컸다. 시누이는 꽃도 피우지 못하고 육체와 재능이 시들어버렸다. 서울적십자병원에서 동생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김대중은 정치에 나선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동생마저 잃었으니 모진 운명이 원망스러웠다.

이희호가 자식으로 거둔 홍일과 홍업은 그때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홍일은 배재중학교 2학년, 홍업은 이화여대 부속중학교 1학년이었다. 홍일과 홍업은 새어머니와 가까워지는 데 시간이 걸렸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품에 안기고 싶은 다감한 사람이었는데, 새어머니는 세련된 지식인의 느낌이 강해서 응석을 부리기 어려웠다. 홍일의 회고다.

“오늘의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신 어머니와는 여러 면에서 분위기가 달랐다. 새어머니는 주로 영어로 된 책을 읽으시고 신문도 영어로 된 것을 외부에서 구해 숙독하셨다. 그리고 당시 이화여대에서 강의도 하시고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일하고 계셨기 때문에 집에 계시기보다는 나가시는 때가 많았다. 어린 나에겐 이런 것도 괜히 낯설고 불만스러웠다.”

두 형제는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때여서 새어머니에게 쉬 다가가지 못했다. “새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데리고 시내에 나가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나는 함께 외출하는 일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가능한 한 어머니와 눈길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간 뒤에야 홍일의 입에서 ‘어머니’라는 말이 나왔다.

이희호는 잔정을 쏟는 사람이 아니라 원칙에 따라 아이들을 대하는 사람이었다. 홍일은 새어머니가 “우리의 환심을 얻으려는 행동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고 기억했다. 김대중은 아이들 교육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아내에게 맡기고 간섭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새어머니와 가까워지려면 아버지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김대중이 딱 한번 매를 든 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국제회의에 참석하러 일본에 가셨는데, 어머니가 안 계신 그 집이 왜 그렇게 넓고 편안했는지….” 어머니가 멀리 갔다는 사실이 홍일에게 해방감을 안겨주었던 모양이다. 두 형제는 방바닥에 널브러져 세상 편한 자세로 텔레비전을 보았다. 일찍 집에 들어온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난 표정으로 회초리를 들었다. “네가 고작 그 정도냐? 나는 너를 믿었는데, 공부도 안 하고 동생하고 텔레비전 앞에 누워? 이런 꼴을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면 어떻겠느냐?”

이희호는 결혼한 뒤에도 여성단체 활동과 대학 강사 등으로 가정과 일을 양립하고자 애썼다. 특히 1952년 창립을 주도한 여성문제연구회는 64년부터 7년 가까이 회장을 맡아 여성권익 보호 운동에 앞장섰다. 사진은 60년대 후반 이혼시 재산분할 청구권을 포함한 가족법 개정 청원서와 지지 서명부를 국회에 제출할 때로, 이희호(왼쪽 둘째)와 여성문제연구회의 초대 회장이자 가정법률상담소 공동창설자인 황신덕(가운데)이 함께했다.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결혼 이듬해 4월 이희호·김대중 부부는 마포구 동교동으로 이사했다. 그 시절 동교동은 서울의 변두리 지역이었다. 일대는 호박밭이었고 도로는 포장이 안 돼 비만 오면 땅이 질척거렸다. 장화 없이는 걷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사 온 집은 단층에 방을 세 개 들인 국민주택이었다. 손님이 많은 정치인 집치고는 공간이 넉넉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전세로 살다가 김대중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이듬해 은행 융자를 얻어 그 집을 사들였다. 이후 이희호와 김대중은 몇 년의 망명시절과 1990년 중반 일산에 살던 시절, 그리고 청와대 시절을 빼고는 그 집을 떠나지 않았다. 동교동은 정치인 김대중을 부르는 또다른 이름이 됐다.

집을 사서 수리를 마친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이희호는 대문에 문패가 두 개 걸린 것을 보았다. 김대중과 이희호의 이름이 각각 새겨진 문패였다. 김대중이 자기 이름의 문패를 주문하다가 문득 아내가 생각나 아내 이름의 문패도 함께 주문했던 것이다. 남편이 집안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에 부부 문패가 걸린 대문은 낯선 풍경이었다. 김대중의 회고다.

“(부부 문패를 단 건)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발로였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고 나니 문패를 대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동지의식이 자라났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감정이다.” 부부 이름이 새겨진 동교동 문패는 이희호와 김대중의 동반자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다.

이 문패에서 드러나듯 김대중은 그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확실히 진보적인 여성관을 지닌 사람이었다. 김대중의 그런 여성관은 여성운동가 이희호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희호는 이런 추측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내가 어떻게 하자고 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본래 여성 차별을 하지 않았어요. 나 자신이 남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는 성격도 아니고요.” 김대중의 여성관이나 여성정책은 스스로 터득한 것이라는 얘기지만, 김대중이 남긴 고백은 좀 다르다.

“내가 나름대로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행동을 실천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조언 덕이었다.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도 여성을 비하하는 여러 행동들이 옳지 않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지만, 나 역시 가부장적인 전통 관념에 찌들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비하와 멸시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되고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서 여성을 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도움 때문이다. 아내 덕분에 나는 인류의 나머지 반쪽을 찾을 수 있었다.”

이희호가 김대중과 결혼한 뒤 고수한 것 가운데 하나가 모태신앙이었다. 이희호는 남편이 천주교 성당에 다니는 중에도 부모로부터 받은 감리교 신앙을 굳게 지켰다. 김대중은 1956년 명동성당의 노기남 대주교 방에서 중림동성당 신부 김철규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당시 부통령 장면을 대부로 모셨다. 신부가 준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였다. <유토피아>를 쓴 인문주의자이자 정치가인 토머스 모어는 영국의 헨리 8세가 가톨릭을 버리고 국교회를 세울 때 왕을 따르지 않아 결국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세례를 준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도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순교할 각오를 하고 이 이름을 받으시오.” 김대중은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토머스라면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도 있는데 왜 하필 목 잘린 사람 이름을 세례명으로 주는가.’ 세례명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 후 김대중의 정치 역정은 험로의 연속이었다. 김대중의 가톨릭 입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가 남기고 간 선물이기도 했다. 처가가 믿음 깊은 가톨릭 집안이어서 김대중이 그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동교동으로 이사한 뒤 이희호는 창천교회에 나가고 김대중은 두 아이와 함께 서교동성당을 다녔다. 이희호는 이화여전에 입학한 1942년 학교에서 가까운 창천교회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동교동으로 이사한 뒤 다시 창천교회에 나가기 시작해 뒷날 이 교회 장로를 지냈고 성가대 대장으로도 활동했다. 이희호와 김대중의 그런 신앙생활을 에큐메니컬운동(세계교회통합운동)의 실천 사례로 볼 수도 있다. 한 가정을 이루되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결혼한 이듬해 11월12일 아들 홍걸이 태어났다. 마흔한살의 노산이어서 미리 날짜를 정하고 제왕절개 수술을 했다. “세브란스에 예약하고 혼자 가서 아이를 낳았어요.” 그때 김대중은 제6대 국회의원 선거일을 코앞에 둔 터라 목포를 떠나지 못했다. 이희호는 아들을 낳고 백일이 됐을 때 친정아버지에게 인사하러 갔다. “그놈 참 잘생겼다. 뒤통수 나온 것이 머리도 좋겠다.” 말수가 적은 아버지로서는 손자에게 성의껏 축복을 내려준 셈이었다. 아버지는 외손자가 돌이 될 무렵 세상을 떠났다. 일찍 여읜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이희호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쳤다. “큰오빠 집에 누워 계실 때도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임종도 못했지요.”

이희호는 결혼하고 한동안 와이더블유시에이연합회 총무 일을 계속하다가 그해 12월에 후배 박영숙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사임했다. 총무 일이 워낙 많아 결혼생활과 병행하기 어려웠다. 총무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그걸로 여성운동을 모두 접은 것은 아니었다. 남편이 정치활동을 재개한 뒤에도 이희호는 1960년대 내내 여성운동가로서 독자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2년 동안은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했다. 사회사업학과에서 사회학 원서 강독을 하고 사회학과에서는 ‘도시와 농촌 비교사회학’을 가르쳤다.

이희호는 와이더블유시에이에 애착이 컸기 때문에 연합회 총무를 그만둔 뒤에도 1964년부터 상임위원으로 참여했다. 1982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을 갈 때에야 상임위원직에서 물러났다. 1961년부터 1970년까지 여성단체협의회의 이사로도 활동했다. 이희호가 활동하는 곳마다 정보부가 미행하거나 기관원이 간섭해 사람들을 괴롭혔다. 1968년부터 1972년까지는 범태평양·동남아시아 여성연합회 한국지회 부회장을 지냈다. “임원 중에 공화당 정권 고위층 부인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김대중씨 부인이 부회장으로 있으면 우리가 그만두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사퇴서를 냈어요.”

결혼 뒤 이희호가 가장 열심히 활동한 곳은 창립을 주도했던 여성문제연구회였다. 1964년부터 1971년 1월까지 회장을 맡았다. 초대 황신덕 회장에 이은 두번째 회장이었다. 회장이 된 첫해에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 환경을 조사해 개선 방향을 제시하는 보고서를 냈다.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가 있던 1967년에는 여성 정치의식을 조사했다.

여성들은 여필종부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해 주권 행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무렵 다른 여성단체들과 함께 요정정치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희호는 여성문제를 민주주의 문제와 하나로 보았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가 한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판단하는 척도이며,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참여할 때만이 민주주의의 정통성이 확보된다고 생각했다.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이 됐을 때 이희호는 돌이 안 된 아들을 키우는 중이었다. 그때 처음 만나 여성문제연구회 연구원이 된 백경남은 이희호를 이렇게 기억했다. “1964년 초가을에 만난 이희호 선생은 그때까지 만난 여성계 지도자들의 인상과는 무척 달랐다. 판에 박은 듯한 인자함이나 주체할 수 없는 권위와는 거리가 먼, 쉽게 이야기를 걸고 나눌 수 있는 분이었다. 등에 칭얼거리는 아기를 서툴게 업고 있어서 남다른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을 것이다.”

사회운동을 하던 시기에 이희호가 풀어야 했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아이를 키우는 일이었다. 국제회의나 다른 일로 집을 오래 비워야 할 때면 이희호는 막내 홍걸을 필동의 큰올케 집이나 또래가 있는 친구 집에 맡기기도 했다. “집에 시어머니가 계셨는데 편애를 하셨어요. 시동생이 이혼하는 바람에 어린 조카를 시어머니가 키우셨는데 조카가 불쌍하다고 그러신 거예요.”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아주 살가운 관계는 아니었다. 여성운동을 하는 지식인 며느리와 성격이 강한 시어머니가 한집에서 정겹게 지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고부는 서로 조심하면서 살았다. 결혼 10돌이 되는 날이던 1972년 5월10일에 시어머니가 별세했다. 시어머니는 아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어머니였다. 어린 대중이 방물장수의 물건을 훔쳤을 때 회초리를 들어 혼낸 사람도 어머니였고, 아들을 가르쳐야 한다며 목포로 이사하자고 남편을 설득한 사람도 어머니였다. “남편은 시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셨어요.”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얼마 안 되어 아들에게 생사를 넘나드는 고난이 닥쳤다. “남편은 어머니가 그때 돌아가셔서 험한 꼴을 더 안 보신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지요.”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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