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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파인듯 계파아닌 계파같은 친노

친노는 엄밀한 의미에서 '계파'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친노라는 정서공동체는 몇몇 중요한 순간에 당과 문재인 대표의 행보에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비공식적이고 비체계적인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제2정당에서 가장 큰 상징적 자산을 가진 집단이 나름의 일관적인 라인과 논의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지난 4.29 재보선도 친노 때문에 패배했다고 보는 분들이 계시던데, 저는 오히려 친노가 정상적인 계파로서 구실했다면 지난 4.29 재보선을 적어도 그토록 그르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 이범
  • 입력 2015.06.22 11:19
  • 수정 2016.06.22 14:12
ⓒ한겨레

<나홀로 사상운동> 1. 계파인듯 계파아닌 계파같은 친노

저는 작년 10월에 새정치민주연합 산하 연구소인 민주정책연구원의 부원장으로 여의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제 본업은 정치라기보다는 정책에 가깝습니다만, 지금 당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제아무리 훌륭한 정책을 만들어봤자 이런 정당에서 내놓는다면 신뢰와 호소력을 얻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원래 <나홀로 사상운동> 연재글로 쓰려고 했던 내용은 조금 뒤로 미루고, 새정치민주연합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볼까 합니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데 저는 내년 총선에 출마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직업적 정치인이 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저의 개인적 욕망으로 인해 글의 논지가 흐려지거나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많은 분들이 새정치민주연합의 핵심 문제가 계파 간 다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친노 핵심으로 분류되는 분들은 '친노라는 계파는 없다'고 합니다. 기자들 앞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사석에서도 하나같이 정색을 하고 부인합니다. 그리고 친노/비노 구도 자체가 보수진영에 의해 덧씌워진 허구적 프레임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분들이 친노의 실체를 감추기 위해 기만행각을 벌이는 걸까요? 그렇게 보기엔 이분들의 태도와 발언이 너무나도 일관적입니다. 실제로 친노는 여느 계파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선 그 경계가 매우 모호합니다. 국회에는 많은 공식적인 의원 모임들이 있는데 '친노 모임'이라고 말할 만한 모임이 특별히 눈에 띄지도 않습니다. 언론에서도 '범친노'라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용어로 온갖 사람들에게 친노 딱지를 붙이는데, 세상에 이렇게 구성원이 불분명한 계파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요?

구성원만 불분명한 게 아닙니다. 수장이 누군지도 애매합니다. 문재인 대표가 친노 계파의 수장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문재인 대표는 2012년 4월 총선에야 국회의원으로서 여의도 정치권에 데뷔했고, 그 이전 몇 년 동안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2012년 이전에는 누가 친노 계파의 수장이었나요? 이해찬 의원? 한명숙 의원?... 그러다가 문재인 의원이 국회에 진입하자마자 바통터치한 것일까요? 초선의원인데? 세상에 이렇게 수장이 애매모호하고 또 이렇게 스리슬쩍 교체되는 계파도 있나요?...

저는 친노가 계파라기보다 '정서 공동체'라고 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및 참여정부의 노선과 업적에 대한 높은 공감에 기초한 정서적 공동체라는 거죠. 상당한 수준의 소명의식, 도덕적 우월감,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계파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친노의 행태와 성격이 온전하게 이해됩니다.

친노가 계파가 아니라고 해서 친노라는 '실체'가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지난 2.8 전당대회를 며칠 앞두고, 당대표 경선에서 여론조사 규칙을 어떻게 적용하느냐를 놓고 당 내에서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경선 규칙은 진즉 정해져 있었으므로, 통상적인 경우라면 당 선거관리위원회가 그 규칙(문구)에 대한 합리적 해석에 집중하여 유권해석을 내리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결론을 내릴 것이냐를 놓고 당 선거관리위원회는 당 지도부(비상대책위원회)로 공을 넘겼고, 당 지도부는 이를 또 전당대회준비위원회로 넘기는 등 핑퐁을 거칩니다. 결국 문재인 후보를 맹추격하던 박지원 후보에게 불리하다고 여겨지는 방향으로 결론이 내려집니다. 최종 경선 결과 문재인-박지원 후보간 지지율 차이는 3.5%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상황은 언론에 자세히 보도된 바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은 기사검색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당대표 경선 규칙과 관련된 핑퐁 과정을 지켜본 비노 의원들은 매우 깊은 공포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이야기를 나눠본 비노 의원들 중에, 누가 봐도 신망 있고 합리적인 분이 이런 표현을 하더군요. "친노가 저런 일까지 벌이는 걸 보니 내년 총선에서 나도 공천 탈락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인의 입장에서 보면 공천을 받느냐 여부는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절대적 중요성을 가집니다. 공천 논란은 불가피합니다. 2012년 총선에서 한명숙 당시 민주통합당 대표가 친노 공천 논란에 휩싸였고, 결국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당대표직에서 사퇴했습니다. 2008년 총선에서는 당시 한나라당에서 친박에 대한 이른바 '공천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공천 탈락한 친박은 '친박연대'라는 급조 정당으로 혹은 무소속 연대로 출마했는데,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당시 탈당 후 무소속으로 부산에서 당선되었다가 나중에 재입당한 바 있습니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은 야당이기 때문에 공천이 더욱 중요합니다. 여당 정치인은 현직 의원이 아니어도 이런저런 자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당에서는 의원 배지를 달지 못하면 정치인으로서나 생활인으로서나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배지를 달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으로 공천을 받아야 하지요. 그렇다면 총선 공천에 대한 비노 의원들의 공포심은 단순한 피해의식의 발로일까요? 친노는 정말로 실체가 없는 것일까요?...

당대표 경선 규칙의 귀결이 친노의 작용이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저에게 없습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친노 패권주의의 증거라고 주장되어온 여러 사건들, 특히 최근의 일례로 김경협 수석사무부총장이 비노계 의원들을 새누리당의 세작(스파이)이라고 지목한 발언 등을 고려해 보면 친노에 실체가 없다는 주장이 무색해집니다. 물론 비노 측의 반응에는 엄살과 과장이 섞여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총선 공천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그들의 우려와 공포심에는 적어도 최소한의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 보입니다.

친노는 엄밀한 의미에서 '계파'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친노라는 정서공동체는 몇몇 중요한 순간에 당과 문재인 대표의 행보에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비공식적이고 비체계적인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제2정당에서 가장 큰 상징적 자산을 가진 집단이 나름의 일관적인 라인과 논의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지난 4.29 재보선도 친노 때문에 패배했다고 보는 분들이 계시던데, 저는 오히려 친노가 정상적인 계파로서 구실했다면 지난 4.29 재보선을 적어도 그토록 그르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계파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비현실적인 얘기는 여의도 정치권 한복판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친노가 '계파화'를 추진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봅니다. 정상적인 계파를 만들어서 정상적으로 권한을 행사하고 책임지는 그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름도 당연히 새로 지어야 합니다. 돌아가신 분의 호칭을 계파 명칭으로 쓰는 것은 퇴행적이니까요. 대안으로 '문재인계'를 만드는 걸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모호한 친노를 문재인계라는 명실상부한 계파로 재구성해내는 것이 최선의 대안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재인계를 구성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딜레마가 있습니다. 문재인 대표는 차기 대권주자입니다. 대선에 재도전할 의지를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파 수장' 이미지는 대선에서 명백히 불리합니다. 대선의 맞상대를 고려해 보면 이러한 불리함이 더욱 잘 드러납니다. 변화무쌍한 한국 정치판에서 2년 뒤의 대선 구도를 예측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만약 문재인 대표가 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다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맞붙을 가능성이 꽤 높다고 봐야 하겠지요. 그런데 김무성 대표의 이미지는 계파 수장이 아니거든요.

김무성 대표는 자신의 대권 라이벌인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당 혁신위원장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2012년 총선 때 당에서 탈당하고 '국민생각'을 창당했던 박세일씨를 대담하게도 새누리당 산하 여의도연구소 소장에 앉히려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모로 자신과 상이한 가치지향을 가진 유승민 의원을 원내대표로 맞아들였습니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경우는 김무성 대표가 지명한 것이 아니라 의원들의 선출에 의한 것이긴 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김무성 대표의 인사와 행보를 통해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한마디로 '통큰 형님'입니다. 나홀로 잘난 게 아니라, 전체 진용과 배치를 근사하게 만들고 그 한가운데에 자신이 자리잡고 있는 모양새라는 말입니다.

자, 평균적인 국민의 눈높이로 봅시다. '통큰 형님'과 '계파 수장'이 맞붙으면 어느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질까요?

지난 2.8 전당대회에서 문재인 의원이 당대표로 선출되고 나서, 저는 천정배 의원을 당 사무총장에 앉히자고 제안했습니다.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당 혁신위원회에 위원으로 위촉되어 3개월간 활동하고 나서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이 당에는 여태까지 혁신위원회가 여러번 있었고, 당시에는 문희상 비대위 체제에서 원혜영 의원이 위원장을 맡은 혁신위원회가 가동되었습니다.) 제가 천정배 의원과 친하냐구요? 헤아려 보니 만나본 적이 2009년과 2012년, 단 두 번에 불과하네요. 그런데 왜 천정배 의원이었냐구요? 문재인 대표의 성공을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문재인 대표가 '계파 수장'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면 고만고만한 탕평책이 아니라 보다 화끈하고 공격적인 돌파가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호남 민심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작년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처럼 광주에서 고전하면서 전체 판을 그르치는 사태를 예방하려면 호남에 대한 선제적이고 강력한 조처가 필요했는데, 천정배 의원이 안성맞춤이었지요. 사무총장 직을 제안받았다는 것이 알려지면 천정배 의원이 수용하든 거부하든 간에 적어도 탈당할 명분이 사라질 것이겠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4.29 재보선의 스코어는 1:3에서 출발해서 적어도 2:2, 심지어 3:1이나 4:0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저의 제안은 문재인 대표의 귀에 들어가지도 않았더군요. 문재인 대표와 가장 가까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중 두 분에게 부탁했는데,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제 불찰이었지요. 돌이켜 보면 이런 얘기는 문재인 대표를 직접 대면해서 주장해도 수용될지 불확실한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결론을 내려보지요. 지금 문재인 대표는 양자택일 상황입니다. 첫번째 옵션은 정서 공동체이던 친노를 '문재인계'로 계파화하는 대신 대권 행보에 있어 상당한 마이너스 요인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처음엔 쉽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당 전체의 입장에서나 문재인 대표 개인의 입장에서나 어려움이 가중될 가능성이 큽니다. 두번째 옵션은 강력한 탕평 행보를 통해 계파수장 이미지를 탈색시키고 보다 통큰 리더의 면모를 구축해가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를 선호합니다만, 천정배 의원 카드가 없어진 지금 어떻게 강력한 탕평 행보를 할 수 있을지 별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군요. 그리고 이때 여전히 '비공식적이고 비체계적인' 방식으로 나타날 것으로 보이는 친노의 작용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지도 걱정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혁신위원회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세 줄 요약

1. 친노는 계파가 아니라 정서 공동체로 간주해야 그 행태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친노와 연관된 문제는 계파 청산을 통해서가 아니라 친노의 정상적 계파화를 통해 해소되어야 한다.

3. 문재인 대표는 자신 중심의 계파화가 대권 행보에 장애가 된다는 딜레마 상황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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