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일본 만화, 오타쿠를 벗어나라

지난 십 수 년간 일본의 만화 잡지는 작품을 대량으로 사주는 오타쿠 시장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다. 오타쿠는 헤비 유저를 의미하고 고정적인 수익을 창출해준다. 하지만 이들이 요구하는 만화는 너무 고도로 발전되어 있는 것이고 미소녀나 모에와 같이 특정 코드가 들어간 것이 대부분이다. 만화 문법이 고도로 발전하고 진화의 극한까지 간 것은 좋으나, 대중의 진입장벽을 올리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개탄을 했다. 일본의 모 유명 출판사 K사가 새로 낸 만화 잡지를 보고서다. K사는 최근 몇 년간 대히트작 만화로 꽤나 건실한 성적을 내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작품의 효력이 거의 다했는지 실적이 다시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등장한 만화 잡지라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뚜껑이 열리자 주력 작품이 이미 한 물 가버린 어떤 애니메이션의 스핀오프라는 걸 알고는 혀를 끌끌 차게 됐다.

지난 십 수 년간 일본의 만화 잡지는 작품을 대량으로 사주는 오타쿠 시장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다. 오타쿠는 헤비 유저를 의미하고 고정적인 수익을 창출해준다. 하지만 이들이 요구하는 만화는 너무 고도로 발전되어 있는 것이고 미소녀나 모에와 같이 특정 코드가 들어간 것이 대부분이다.

스퀘어 에닉스가 만든 만화 작품은 일본의 대중 잡지가 수행할 수 없는, 틈새시장 독자를 노렸다. 게임을 보고 자란 세대가 좋아할 만화나, 특정 오타쿠를 노린 작품들 말이다. 스퀘어 에닉스의 잡지『영 간간』의 히트작 『사키』같은 경우에는 미소녀와 마작을 결합시켜서 대히트를 쳤지만, 권당 20만부 정도를 판매하는 것이 잠정적인 상한선 이었다. 신작이 나오면 오타쿠들은 무조건 산다는 게임인 [####대전]의 판매 한계는 40만장이라고 한다. 오타쿠 상품의 한계지점을 웅변해주는 수치다. 무시할 수 없는 수치의 판매량이지만, 이런 작품은 대중에게는 생경할 뿐이다. 만화 문법이 고도로 발전하고 진화의 극한까지 간 것은 좋으나, 대중의 진입장벽을 올리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모에한 그림체 때문에 일반인에겐 진입장벽이 높거나 오해받지만, 반전을 꾀하는 스토리로 지지층을 얻은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그런데 최근에 소수를 위한 잡지의 신인 작가를 메이저 만화 잡지사들이 경쟁적으로 빼가고 있다. 만화잡지를 보고 자란 예비 작가군을 믿지 않고, 소수 마켓을 전제로 길러낸 작가를 빼가는, 한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떤 검증을 하기도 전에 일단 만화상을 수상한 신인작가라면 무조건 스카우트 해버리기까지 한다. 이러니 일반인-잠재적인 독자-은 점점 만화에서 손을 떼는 일이 벌어진다. 대중문화의 최전선이라는 만화 잡지가 점점 대중들에게 등을 돌리는 광경이다. 그러니 신규독자는 영입되지 않고 독자 평균연령은 계속 올라간다.

젊은 세대는 적극적인 소비층이지만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느낀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80%를 넘는다. 사실 그들은 끝없는 경쟁사회에 지친 심신을 위로해줄 만화들을 원한다. 그런데 격렬한 작화와 진지한 테마로 무장한 작품들이 통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편집 일선을 지배하는 논리나 사고방식은 아직도 어떤 가능성이든 시험해볼 수 있고 만화에 에너지와 활력이 강력하던 1980년대 적인 사고방식이다. 잡지가 더 이상 팔리기 어려운 불황인데 오프라인 잡지를 만들어내는 출판사의 행보는 아직 위기를 절감하지 못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악순환을 벗어나려면 지금의 틀을 부수고, 대중이 원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런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작가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수밖에 없다. 일본의 평범한 독자층에게 『에반게리온』이나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등의 걸작들을 피력해봐야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만화는 여가를 즐기는 다양한 문화 상품 중 하나다. 여기서 인생을 안내해줄 테마나 만화 표현의 궁극적인 지향점 따위는 찾지 않는다.

오타쿠 역사의 한 획이라 할 수 있는 『 에반게리온』

일본의 거치형 게임기 시장이 승승장구 하던 시절, 일본의 게임회사들은 국내 유저만이 원하는 JRPG 장르 안에서 고도의 완성도만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가장 막대한 숫자의 유저를 창출해낸 회사는 마리오를 만들어 낸 닌텐도다. 스마트 폰이 등장하면서 이제는 닌텐도조차도 급속도로 쇠락하는 중이다. 이전에는 문화 산업에서 3년 주기설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초기의 라이트 유저 시장에서 3년 정도가 지나면 헤비 유저 시장이 열리고 그 다음에 다시 라이트 유저 시장이 온다는 논리다. 하지만 웹이 등장하면서 논리는 설득력을 잃었다. 스마트 폰으로 게임을 즐기는 라이트 유저는 게임기 시장이라는 헤비 유저 시장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이제는 유저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이다.

일본 만화도 어쩌면 이미 새로운 중심 이동에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열린 2페이지 연출과 400페이지 잡지, 자금 회수는 단행본이라는 50년짜리 알고리즘에 갇혀있다. 만일 한국 만화 산업에 기회가 찾아온다면, 10년을 먼저 라이트 유저에게 어필하는 방법을 연구해왔다는 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글_ 이현석/한일 간 만화 기획자, 스토리 작가.

* 이 글은 에이코믹스에 게재된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만화 #문화 #오타쿠 #일본만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