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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로 산다는 것

기술자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기획자가 평가절하 되어 있다는 말이다. 정확히는 기획이라는 <생각의 기술>의 부가가치가 무료로 인식되어 있다는 말이다. 15년을 기획자로 살면서 무수히 많은 제안서를 썼지만, 선정되지 못한 제안서의 값을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기술의 시제품을 의뢰하면 적어도 그 원가는 받는다. 기술과 기획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증명하는 이야기다.

  • 김우정
  • 입력 2015.06.17 15:00
  • 수정 2016.06.17 14:12

나의 아버님은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셨다. 피난민이셨던 할아버님이 낯선 땅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기술을 배우는 것이라 굳게 믿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님은 적응하지 못하셨는지 삼수 끝에 대학에 진학하셨고, 기술자에서 기획자로 인생 항로를 변경하셨다. 아버님의 영향이었는지, 나의 운명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15년간 기획자로 살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뭔가 만드는 기술자의 생이 참 부럽다.

기술자가 부러운 이유는 단순하다. 머리로 떠올린 기획을 직접 현실로 옮겨 놓고 싶기 때문이다. 기획에 맞는 기술자를 찾고 협상하고 논의하고 수정하는 작업이 어렵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이 땅에선 기획에 적합한 가격을 책정하는 일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 많은 기획자들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생각이란 이유로 기획력을 대부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정규직이 아닌 경우엔 거의 그렇다.

기획은 생각을 정리하는 기술이다. 적게는 2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을 하나로 묶는 설계도를 만드는 작업이 바로 기획이다. 기획의 본질은 정리된 아이디어고, 체계적인 계획이고, 실행을 위한 매뉴얼인데 대부분이 머리에서 나오고 그 일부분이 장표로 보인다. 기획의 본질은 기획서가 아니라 머릿속에 정돈된 생각이지만, 우리는 기획의 결과물을 기획서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기획은 기술에는 있는 원가가 없다.

기획의 원가는 생각에 투자하는 시간으로 계산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기획의 원가를 장표의 장수로 계산한다. 기획사를 다니다가 퇴사한 사람들은 기획서를 대신 써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용의 계산법은 장표 한 장당 얼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획이 기술로 현실화되면 엄청난 부가가치가 발생하지만, 그 영광은 기술자의 몫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기획자는 사기꾼이 되어 간다.

훌륭한 생각에 지불하는 가격이 없어지자 기획자들은 사업가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업의 본질은 기획이 아니라 경영이다, 생각이 아니라 관리다. 그래서 경영자가 된 기획자는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기꾼으로 오해받는다. 생각의 몫을 챙겼다는 이유로 사기꾼으로 몰리기 일쑤다. 만질 수 없는 기획과 만질 수 있는 기술의 가치 격차는 정보화가 이루어진 2000년대 이후 더더욱 벌어지기 시작했다.

성공한 벤처기업 CEO 중에는 개발자 출신이 많다. 기획을 아는 개발자 출신이 우대받는다는 말이다. 기획자가 아무리 세상을 놀라게 만들 아이디어를 내놓아도 현실로 만들지 못하면 투자 받기가 어렵다. 페이스북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마크 저커버그가 아니라 윙클보스 형제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획을 구현한 것은 저커버그였고, 성공의 영광은 그에게 돌아갔다. 물론 소송을 통해 어렵게 보상은 받았지만.

기술자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기획자가 평가절하 되어 있다는 말이다. 정확히는 기획이라는 <생각의 기술>의 부가가치가 무료로 인식되어 있다는 말이다. 15년을 기획자로 살면서 무수히 많은 제안서를 썼지만, 선정되지 못한 제안서의 값을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기술의 시제품을 의뢰하면 적어도 그 원가는 받는다. 기술과 기획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증명하는 이야기다.

사실 이러한 인식은 기획자들 스스로가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훌륭한 기획은 기술보다 더 깊은 공부와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발현되는 법이지만, 영리한(?) 기획자들은 그런 시간이 아깝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깊이보다 속도와 포장을 좋은 기획이라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만든 달콤한 함정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훌륭한 기획자를 선뜻 떠올리지 못한다. 검색해도 없다.

나는 기억한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한국의 정서를 보여준 굴렁쇠의 기획을, 예술인들을 헤이리로 모여들게 만든 기획의 힘을, 그리고 스마트 혁명을 일으킨 한 기획자의 위대함을. 기획자는 기획으로 승부해야 한다. 기획자는 생각 전문가다. 세상의 모든 기술은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훌륭한 생각은 세상을 바꾸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이 땅에서 기획자로 사는 일은 위대한 여행을 떠나는 일이다. 성공하면 영웅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사기꾼이 되는 모험.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방법은 어차피 없다. 어쩌겠는가? 즐겨라, 힘들면 마셔라.

※ 내가 만난 최고의 기획자 故강준혁 선생이 남기신 기획자의 길을 마지막으로 선물하며, 이 땅의 기획자들 건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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