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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키우는 시골 아낙이 새정치연합 혁신위원 된 사연

  • 원성윤
  • 입력 2015.06.16 01:41
  • 수정 2015.06.16 01:42
ⓒ연합뉴스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가 처음으로 열린 12일, 경북 의성에서 올라온 혁신위원 임미애(49)씨는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오늘 1시50분에 새벽 기차 타고 서울에 왔습니다. 기차 타고 오는 도중에 참 이상하게 눈물이 나더군요. 시골에서 소 키우고 땅 일구는 이 ‘촌부’한테 어쩌다가 대한민국 제1야당이 혁신을 자문하는 지경에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에 정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임씨는 스스로를 ‘촌부’라고 칭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시골 아낙네는 아니다. 서울내기이고 이화여대 경제학과 84학번으로 1987년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을 지냈으니 6월 항쟁의 주역이다. 새정치연합의 이인영, 우상호 의원과 전대협 1기를 함께 이끌었고 서영교 의원이 임씨 직전의 이대 총학생회장이었다. 조명받기 좋은 조건을 갖춘 운동권 486인 셈이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길은 소박하고 조촐했다.

서울대 운동권 출신의 남편 김현권(52)을 만났고, 남편의 고향인 의성으로 조용히 내려와 사과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1992년이다. 의성의 시부모들은 한 6개월 시골에서 살다가 대처에 나가 직장을 잡겠거니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묵묵히 사과를 따고 소를 키우며 산 게 23년째다. 사과 농사를 짓다가 인건비도 나오지 않자 직접 트럭을 몰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사과를 팔러 다닌 적도 있다. 남편이 운전면허시험 공부를 해서 한 달 만에 면허증 따고, 면허증 나오던 날 1톤 트럭을 빚내서 장만해 바로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를 탔다.

농사꾼 부부의 삶에 돌풍이 인 건 2002년이다. 민주당이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국민경선을 할 때다. 당시 민주당 출입기자였던 나는 대구 경선장에서 우연히 남편 김현권씨를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의 기사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았다.

“경북 의성에서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김현권씨는 서울대 운동권 출신이다. 10년 전 시골로 내려온 뒤로는 서울 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묵묵히 땅만 팠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노무현씨가 부산에서 또 떨어지자, 그저 조용히 이름 석자를 가슴에 담아두었다.

10일 발표된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 위원들. 윗줄 왼쪽부터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최태욱 한림대 국제대학원 교수, 정춘숙 전 한국여성의 전화 상임대표, 임미애 경상북도 FTA 대책특별위원회 위원, 정채웅 변호사. 아랫줄 왼쪽부터 우원식 의원, 박우섭 인천 남구청장, 최인호 부산 사하갑 지역위원장, 이주환 당무혁신국 차장, 이동학 전국청년위원회 부위원장.

그러다 민주당 경선이 시작되면서 ‘열병’이 들었다. 국민선거인단 신청서를 받는다고 주변 사람들을 들쑤시더니, 마침내 농삿일은 팽개치고 의성군의 선거인단들을 찾아나섰다. 보름 동안 먼지 나는 시골길을 발품 팔며 돌아다닌 끝에 선거인단 130여명 중 100여명을 만났다. ‘노무현 바람’이 표로 굳어지는 순간들이었다. 그는 “‘노풍’이 어디에서 불어오나 궁금해했는데, 미쳐서 돌아다니는 내 모습을 보고는 ‘아하, 이게 노풍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고 말했다.”

남편 김씨의 열정은 2004년 총선 출마로까지 이어진다. 임미애씨는 절대 반대였다. 그러나 “중앙정치가 바뀐다고 지역정치가 바뀌지 않는다. 지역은 지역에서 뛰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남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물론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선거운동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의성·군위·청송 3개군이 한 선거구로 묶여 있는데, 찬조 연설해줄 사람 단 한명을 구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임씨가 연설용 차량을 타고 선거구를 누비며 눈물 어린 호소를 하고 다녔다.

그게 인연이 돼 임씨도 2006년 열린우리당 이름을 걸고 의성군의회 의원 선거에 나선다. 3명 뽑는 중대선거구에서 3등으로 겨우 당선됐다. 그러나 2010년 선거에서는 민주당으로 나와 1등으로 당선이 됐고, 임씨의 득표력에 힘입어 비례대표까지 의성군의회에 입성한다. 전국 시·군·자치구의회 의장협의회가 주는 ‘제3회 지방의정봉사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경상북도 농촌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해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임씨는 이렇게 말했다. “영호남 사이 지역의 벽도 높지만 새누리당에 실망해 바꿔보려는 주민들의 의지도 강해요. 4년 의정활동 열심히 하니 주민들과 동료 의원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거죠. 지역의 엄마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92년부터 의성에서 농민으로, 성당의 신도로 살아오면서 주민들과 나름대로 정성껏 소통해온 것이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도와줬던 엄마들에게 참 고맙죠.”

군의원을 두번 지냈지만 임씨는 여전히 촌부다. 그가 드문드문 쓰는 페이스북의 글이 그의 일상생활을 보여준다.

“아침에 우사에 나갔더니 송아지가 태어났다. 새끼를 돌보지 않는 어미는 제 몫의 사료를 먹느라 정신없고, 젖은 몸으로 태어난 송아지는 그 상태로 반쯤 가사상태고…. 급하게 안고 아파트에 데리고 와서 뜨거운 욕조에 담아 씻기고 전기장판 깔고 떨어진 체온을 올리기 위해 갖은 짓을 다했다. 살까? 살아야 하는데…!”

“마늘을 캐고 그 자리에 콩을 심었는데 날마다 비둘기들이 잔치를 벌인다. 이러다 콩은 안 올라오고 풀만 무성해지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이 더운날 모자 쓰고 밭귀퉁이에 앉아 새를 쫓아야 할지 아님 포기해야 할지 고민이다.”

혁신위원이 되고나서도 그의 삶은 변함이 없다. “밭에 일하러 가자는 남편 보고 모자, 장화, 그리고 이제 서울 자주 가야하니 얼굴 새까맣게 하면 쪼매 그러

니 썬크림 갖고 태우러 오라했더니, 이 사람 제 기대 저버리지 않고 챙겨왔네요. 핸드크림! 내가 미쳐~~”

임씨를 포함한 혁신위원들에 대해 비주류 의원들은 ‘친노 운동권’이라고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임씨가 살아온 길을 보면 영락없는 친노 운동권이다. 하지만 비주류 의원들이 얘기하는 친노 운동권이란 말에는 ‘권력을 누려본 집단’이라는 의미가 배어있다. 그런 의미라면 임씨를 비롯한 혁신위원 대부분은 권력을 누려본 경험이 없다. 임씨는 노무현 대통령을 직접 본 게 2002년 대선 때 아이들 손잡고 선거연설하는 걸 본 게 다라고 한다. 2004년 총선 때 남편이 출마했을 때 중앙당으로부터 지원받은 건 50만원이 전부였다.

“농사 짓던 사람이 빚내서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었죠. 선거 끝나고 난 뒤 남편이 너무 힘들어하고 먹고 살길도 막막했어요. 그래 있는 것 다 팔아서 소 다섯 마리를 샀죠. 그런데 동네에서 ‘선거 한번 하고 소 장만 했네’라는 식으로 소문이 난 거예요. 시골 동네에서는 집권여당의 국회의원 후보였으니 선거가 끝나고 한몫 챙겼을 거라 생각한 거죠. 나중에 저희들의 실생활을 보면서 자연스레 해결된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 당시에는 많이 마음이 상했죠.”

그러니 아무리 친노 운동권이라는 딱지가 당내 비판의 표적이라 하더라도, 임씨에게는 발언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혁신위 안을 만들어 집행할 권한이 있는 것이다.

경상북도 의성은 새정치연합 쪽에서 보자면 뿌리내리기 힘든 자갈밭이다. 그래도 임씨 부부는 맨손으로 그 자갈밭을 일구고 있다. 임씨는 그 자갈밭을 매는 심정으로 혁신위원회에 참가했다.

“당이 너무 늙은 느낌이에요. 당원도 그렇고 의원도 그렇고…. 결국은 다 사람이 하는 거잖아요. 사람을 길러내는 게 중요한데 당이 그런 데 관심이 없어요. 당에는 지금 노동 농민 여성 청년 등으로 전국위원회가 꾸려져 있어요. 이곳을 통해 실질적인 이해와 요구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고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사과를 키우고 소를 기르듯이 그렇게 사람을 길러내고 싶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러고 보니 임씨는 영락없는 ‘촌부’다. 새정치연합의 촌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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