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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봉사를 거부할 권리

올해도 어김없이 자원봉사 모집 공고가 떴다. 학장이 설립해 지금껏 예술감독을 담당하고 있는 음악축제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다. 자그마한 한국 클래식 시장에서 자립해 생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다들 교수가 되기만을 바라는 형국이니 그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 홍형진
  • 입력 2015.06.15 07:21
  • 수정 2016.06.15 14:12

※실화에 근거해서 소설 느낌을 버무려 쓴 글입니다. 한겨레에 게재됐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자원봉사 모집 공고가 떴다. 학장이 설립해 지금껏 예술감독을 담당하고 있는 음악축제다. 공고는 작년의 기억을 들추어 아버지의 낯선 모습을 끄집어낸다.

어? 아빠가 왜 여기 있어?

단지 형식에 지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아버지는 축제 자원봉사단의 유니폼을 입고 가슴에 이름표까지 달고 있었으니까. 거기엔 '안내 자원봉사 최○○'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애써 빙그레 웃으며 날 반겨주었지만 당혹스러운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나를 마주칠 일은 없다고 확신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난 학교에서 레슨을 받고 있을 시간이었다. 지도교수가 개인사정을 이유로 일정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객석에서 음악회의 연주를 감상하는 두 시간 내도록 속이 부글거렸다. 내가 23년간 겪어온 아버지는 그런 곳에서 친절한 얼굴과 다정한 말씨로 자원봉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낯선 자리엔 아예 걸음하지 않을 만큼 낯을 가리는 성격인 동시에, 자식 교육은 아내에게 전담시키다시피 해온 가부장적 가치관의 보유자이기도 했다. 클래식에 별다른 애정이나 소양이 있지도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이유는 단 하나. 볼 것도 없이 바로 나였다. 학장 이하 교수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그 의도는 무척이나 온화하고도 노골적이었다.

궁금했다. 혹시 이전에도 이런 자리에 계속 참여해왔지만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괜스레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일부러 숨겨왔던 건 아닐까? 설마 이것 외의 다른 자리에도 아버지가 나가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질문이 계속 떠올랐지만 난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함께 귀가하는 길의 아버지는 평소처럼 라디오를 틀어놓고 묵묵히 운전에 집중했고 난 고개를 푹 숙인 채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렸다. 왠지 죄인이 된 기분이어서.

다 공짜네, 다 공짜야. 걸쭉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쳐다보니 더블베이스를 전공하는 선배가 냉소적인 표정으로 공고게시판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의 시선은 다른 두 장의 게시물을 향해 있다. 하나는 M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객원단원 모집공고이고 다른 하나는 학교 선배들이 창단한 오페라단의 정기공연 광고다. 음대생들 사이에선 양측에 다 불만의 목소리가 은근하다.

M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단원들에게 제때 연주료를 지급하지 않기로 악명이 높다. 대학생 신분의 객원단원들은 아예 떼어먹히는 경우도 잦다. 연 100여 차례씩 공연을 한다고 대외에 그럴싸하게 홍보를 해대지만 단원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는 않는다. 선배들의 오페라단 또한 마찬가지다. 학교 차원에서 음대생들을 동원해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꾸리지만 연주료는 지급되지 않는다. 경험을 쌓게 해주었으니 만족하라는 의미인 걸까. 올해엔 나도 동원되어 열정페이만 받았다. 2주를 고스란히 바쳤음에도.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다. 자그마한 한국 클래식 시장에서 자립해 생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다들 교수가 되기만을 바라는 형국이니 그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교수가 되지 못한 대부분은 레슨으로 밥벌이를 하게 된다. 연주료를 제때 지급하지 않는 그런 악단에라도 계속 남아있으려는 건 그 타이틀로 학생을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프로로서의 음악활동이 레슨을 위한 스펙 쌓기란 소리. 선배 말마따나 이 세계는 정말이지 죄다 공짜다. 자원봉사를 거부할 권리 따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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