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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은 껍질과 내장의 요리다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 파는 가슴살이 딱 그 모양이다. 닭은 껍질이 상수요, 고기는 하수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살의 그 아름답고 맛있는 껍질은 몽땅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헐벗은 가슴살에는 밋밋하고 푸석한 고기 맛만 남았다. 그게 껍질이되 그냥 껍질이 아니라는 것을 이 땅의 닭 공급업자는 모른다. 오직 바삭바삭하게 익힌 껍질을 먹기 위해 닭고기를 찾는다는 미식가들에겐 실망스러운 일이다.

  • 박찬일
  • 입력 2015.06.14 06:29
  • 수정 2016.06.14 14:12
ⓒgettyimagesbank

R은 내가 좋아하는 후배 요리사다. 그는 우리나라 요리판에 몇가지 전설을 남겼는데, 그중 하나로 '천마리'라는 암호 같은 것이 있다. 군대 시절 매복호가 있던 마을 이름 같기도 하고 할아버지의 고향 같기도 한데, 그건 문자 그대로 '1천마리'를 뜻한다. R이 시내의 모 호텔에서 일할 때 하루에 무려 닭 천마리를 잡았다고 해서 생긴 전설이다. 요리판에서는 '잡았다'는 표현이 살아 있는 무엇을 죽였다는 사전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냥 재료를 손질했다는 뜻이다. 어쨌든 그가 천마리의 닭을 손질한 경위는 이렇다.

"위 요리사 R은 서울특별시 중구 소재의 모 호텔에 재직 중이던 19○○년 3월경, 상기 호텔 지하에 위치한 정육처리실에서 육계 일천두를 지급된 주방용 도검을 이용하여 분할 및 처리한바 당 장면을 목도한 상기 호텔 내 노무직원 다수(연령 및 주거 불상)가 혼절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던 연고로 이는 미증유의 고속 처리 기술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으며 차후 육계 분할 사유 발생 시 초치되어 지속적으로 당 업무를 수행하는 이유가 되었던바......"

R의 닭고기 처리 기술은 그렇다 치고, 이 무슨 말도 안되는 문장이냐고 할 것 같아 부연하자면 이렇다. 나는 한때 잡지기자로 일했다. 일간신문의 사회부 기자는 아니지만 간혹 경찰서에 취재 갈 일이 있었다. 사기를 쳐서 고소당한 연예인을 다룬다거나 지존파를 잡아들인 형사반장을 인터뷰하러 가는 일 따위였다. 그 시절엔 기자들이 형사과에 무시로 드나들곤 했는데 사건기록을 보는 게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담당 형사 책상에 기록이 올려져 있으면 태연히 들고 복사기에 팍팍 돌리기까지 했다. 어떤 형사는 친절하게도 복사하거나 열람하기 편하게 '이 대목에서 저 대목까지가 하이라이트'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피의자 인권 같은 건 거의 없던 시절이었고, 심지어 기자들이 보는 데서 주로 잡범인 어린 피의자들은 뒤통수를 얻어맞기도 했다.

어쨌든 그런 기록물을 보다보면 일종의 쾌감을 얻곤 했다. 형사가 갱지를 끼워넣고 독수리 타법으로 쓴 글이 참 대단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 B, C라는 세명의 인물이 술을 마시고 누굴 두들겨팼다는 걸 그들은 이렇게 표현했다.

"......상호 불상의 무도주점(춤추는 주점)에서 맥주 27병을 분음코 만취상태에서 인접 취객과 시비가 발생하여 정권으로 흉부를 일차 가격당한 데 격분, 앙심을 품고 맥주병을 전도 파지 후 취객 D의 두부를 가격, 전치 4주의 상해를 입히고......"

혹시라도 모르실 분이 있을까봐 설명을 하자면 '분음코'는 '나눠 마시고', '전도 파지'는 '거꾸로 들고'가 된다.

R이 진짜로 닭 천마리를 하루 만에 처리했을 것 같지는 않다.

'천'이라는 숫자는 그저 '아주 많이'에 해당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만큼 그는 귀신같은 솜씨가 있었나보다. 그는 닭 잡던 시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행님, 가슴살만 발라낼 때는 말이에요, 모가지를 꽉 잡고 가슴패기 있는 데를 칼로 쭉 그으면요, 왼짝 오른짝으로 가슴살이 나오죠. 이걸 칼을 45도로 눕혀 살을 발라내는데요, 단번에 안심까지 발라내는 기술이 생기더라고요. 다리는 관절에 정확하게 칼날을 넣어야 이쁘게 잘라집니다. 안 그러면 인대가 늘어져서 모양을 영 버립니다......"

문득 유해진을 스타덤에 올렸던 영화 「공공의 적」이 생각난다.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 파는 가슴살이 딱 그 모양이다. 닭은 껍질이 상수요, 고기는 하수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슴살의 그 아름답고 맛있는 껍질은 몽땅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헐벗은 가슴살에는 밋밋하고 푸석한 고기 맛만 남았다. 그게 껍질이되 그냥 껍질이 아니라는 것을 이 땅의 닭 공급업자는 모른다. 오직 바삭바삭하게 익힌 껍질을 먹기 위해 닭고기를 찾는다는 미식가들에겐 실망스러운 일이다. 오븐에서든 프라이팬에서든 잘 익힌 껍질의 맛이란!

생선구이도 껍질을 어떻게 익히는가에 맛의 비결이 숨어 있다. 껍질이 천천히 익으면서 수분과 기름을 내어주고 다시 그 기름에 껍질이 바삭하게 익는다. 영어로 크리스피(crispy)라거나 이딸리아어로 끄로깐떼(crocante)라고 하는 그 바삭함이다. 외국어지만 듣기만 해도 바삭한 소리가 들리는 듯 의성어의 느낌이 꽂힌다.

잘라낸 닭가슴살을 맛있게 굽는 법. 껍질을 살리고, 살은 최대한 퍽퍽함을 줄인다. 이는 양식을 전공하는 초보 요리사들의 첫번째 관문이 되곤 한다. 팬에 오리기름을 두르고--돼지기름을 쓰기도 한다. 오직 파삭한 닭껍질 맛을 돋우기 위함이다--껍질이 붙은 쪽으로 가슴살을 얹는다. 중간 불에서 노릇하게 지진 후 낮은 불에 천천히 익힌다. 그러면 닭껍질의 기름과 오리기름 또는 돼지기름이 뒤엉겨 푸르스름한 연기를 피워올리며 갈색으로 멋지게 익는다. 속살도 분홍의 복숭아 색깔로 익어서 그런대로 먹음직스럽다. 아아, 이렇게 맛있는 가슴살을 다이어트나 근육을 키우기 위해 껍질은 홀랑 벗기고 살만 푹 삶아 먹는 이들에게 위로를! 그들이 입에 욱여넣고 내뱉는 '닭가슴살은 퍽퍽해'라는 하소연에도 격려를!

닭껍질을 맛있게 살려서 통닭을 굽는 법이 있다. 기름을 발라 오븐에 천천히 구워도 좋지만, 이딸리아의 주부들은 비장의 솜씨를 부린다. 바로 삼겹살이다. 그 비싼 삼겹살을 닭 굽는 데 쓴다고? 주객전도 아냐? 천만의 말씀이다. 이딸리아에서 삼겹살은 그야말로 기름값에 불과하게 싸다. 삼겹살은 구워 먹는 고기가 아니라 양념이다. 베이컨이 그러하듯이.

커다란 닭을 사서 깨끗하게 씻은 후 물기를 닦아 커다란 오븐용 도기에 놓는다. 속에 버섯이든 무엇이든 이것저것 채워넣어도 좋다. 로즈메리와 레몬을 넣으면 닭의 누린내를 잡고 향긋한 냄새를 피운다. 얇게 저민 삼겹살로 닭을 친친 감는다. 그러고는 올리브유를 조금 뿌리고 오븐에 집어넣는다. 닭껍질에서 나오는 기름과 삼겹살의 기름이 지글지글, 껍질을 바삭하게 익힌다. 닭을 썰어 접시에 올리면 칼을 대자마자 껍질이 센베이 과자처럼 부서진다. 레몬즙이나 술술 뿌려 입에 넣으면 천국의 맛이 따로 없다. 잘 구운 닭고기는 어지간한 쇠고기 스테이크보다 맛있다는 사람도 있다. 그 '잘 구운'이라는 게 생각보다 큰 시련을 주는 말이긴 하지만.

닭은 누가 뭐래도 껍질과 내장의 고기다. 우리는 그 맛있는 두 부위를 버리고 얌전한 살코기만 슈퍼마켓에서 사들인다. 랩에 싸인 그 분홍색 고기에 미각을 흥분시키는 요소는 없어 보인다. 닭내장은 못 본 지 오래되었다. 포장마차의 쇠락 이후 모래집구이의 추억도 그 연기처럼 아스라하고, 닭내장탕을 파는 집은 수소문을 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나의 청춘 시절은 늘 안주가 모자랐다. 새우과자나 심지어 몰래 훔친 초콜릿을 안주로 깡소주를 부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결핍으로 우리는 징징거렸다. 그러다 지전이 조금 생기면 모래내시장의 닭내장탕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시장통의 질척거리는 통로를 뚫고 대로 쪽 은좌극장-그 은좌란 일본의 긴자(銀座)를 우리말로 옮긴 것일 테지-으로 나오면 허술하게 자리잡은 집이었다. 당시는 닭전에서 아직 생닭을 잡던 시절인 모양으로, 닭 부산물이 그 술집의 부엌 입구에 그득하게 쌓여 있었다. 빨리 끓고 양이 많아 보이라고 얇고도 넓게 만든 스테인리스 냄비에 닭내장을 가득 담아주었다. 거기에 조미료와 닭대가리로 만든 육수를 부었다. 주인 아줌마는 꼭 쌍란을 하나 넣어주었다. 부화도 못되고 닭의 배 속에서 발견된 껍질 없는 쌍란이었다. 우동가락 같은 창자에서는 구린내가 났지만, 배고픈 청춘들은 마구 내장을 퍼넣고 소주를 부었다. 그 시절 우리들의 몸은 아마도 닭의 내장으로 만든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뜨거운 한 입>(창비, 2014) 내용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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