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배트맨은 조커를 죽여야 할까? │ 슈퍼히어로의 도덕관념

'절대 살인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으로 유명한 또 한 명의 히어로가 있다. 바로 배트맨이다. 배트맨은 절대 살인하지 않는다. 총도 쓰지 않는다. 적어도 그가 표방하는 바는 그렇다. 모두가 정한 약속인 법의 공정한 심판에 판단을 맡기고, 자신은 그저 자경단으로서 범죄자들과 끝없는 싸움을 벌이는 데 충실하다고 자부하는 배트맨. 그러나 고담은 해가 갈수록 더욱 부패하고 타락해 범죄자들을 처리할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다. 그는 조커를 죽이는 것이 옳을까?

  • 이규원
  • 입력 2015.06.15 06:08
  • 수정 2016.06.15 14:12

배트맨은 조커를 죽여야 할까?

-슈퍼히어로의 도덕관념

2013년 「맨 오브 스틸」 개봉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영화 속 슈퍼맨의 행동이 과연 정당한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더듬어 보자. 슈퍼맨은 조드 장군과 도시 한복판에서 시가지 전체를 때려 부수는 대 결전을 벌인다. 마지막 순간 조드는 무고한 시민의 목숨을 위협하고, 슈퍼맨은 희생을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조드를 죽인다. 슈퍼맨이 살인을, 그것도 마지막 남은 자신의 동족을 죽인 것이다.

다수의 생명을 위해 부득이하게 행한 정당한 행동이란 의견도 있었지만, 논쟁의 초점은 상황 자체를 벗어나 슈퍼히어로의 살인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주제로 확대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슈퍼맨이라는 전능한 영웅이 악을 방치하며 끝없는 싸움을 되풀이하는 데 지쳐 있었다. 히어로가 확고하게 악을 처단한 것이야말로 환영할 일이라고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반대로 최소한 히어로라면, 법의 집행자나 군인이 아닌 자경단으로서의 히어로가 독단으로 악을 심판하고 처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슈퍼맨의 살인은 너무나 불편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각자 대답이 다르겠지만, 이는 아마도 슈퍼히어로만이 아니라 여러 사회 문제를 대할 때 그것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개인의 관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이때 슈퍼맨의 절친인 배트맨이라면 과연 어떤 말을 할까?

할 조던은 용서받을 수 있는가?

여기 '절대 살인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으로 유명한 또 한 명의 히어로가 있다. 바로 배트맨이다. 배트맨은 절대 살인하지 않는다. 총도 쓰지 않는다. 적어도 그가 표방하는 바는 그렇다. 국내에 정식 출간된 도서 중에 두 가지 예를 들어 보자. 하나는 『그린 랜턴: 리버스』, 또 하나는 『인피닛 크라이시스』다.

『그린 랜턴: 리버스』의 주인공은 할 조던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DC에서 배트맨, 그린 애로우와 더불어 초능력 없는 히어로라면 첫손가락에 든다. 「어벤저스」의 멤버들이 아스가르드의 신 토르 외에는 전부 지구인인 것과 달리, DC의 히어로에는 특별한 혈통을 지닌 초인이 많다. 슈퍼맨부터가 크립톤 행성 출신의 외계인이고, 원더 우먼은 아마존의 공주이며, 아쿠아맨은 해저 왕국 아틀란티스의 왕이다. 마샨 맨헌터는 화성인이다. 가장 강력한 히어로로 손꼽히는 이들 모두가 인류가 아닌 '고대 종족'이거나 '외계인'이다. 그런데 이들은 엄청난 초능력을 지녔음에도 우리와 함께 살아가면서 인류를 동경하고 인류에 희망을 건다.

물론 인간에 해당되는 대표 히어로도 넷 정도 들 수 있다.(비율로는 반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배트맨, 그린 랜턴, 그린 애로우, 그리고 플래시다. 이 중에서 플래시는 낙뢰 사고를 통해 엄청난 빠르기라는 능력을 얻었고, 나머지 셋은 전부 직접 만들거나 누군가에게 물려받은 도구를 사용한다. 그린 애로우는 오늘날 인기 미드 「애로우」를 통해 거물급으로 성장하였지만, 본래는 배트맨의 짝퉁격인 영웅이었다. 복장과 싸움 방식 등만 좀 다를 뿐 똑같이 거대 기업 소유주이며, 소년 조수를 데리고 다녔고, 비밀 기지가 있고, 자신의 재력(각종 탈것과 장비)을 사용해 활동했다. 한편 그린 랜턴은 우주를 무대로 활약하는 우주 경찰로 슈퍼맨 급의 힘을 발휘할 수도 있는 인물이지만, 그의 힘은 사실 손가락에 낀 파워 링이라는 반지에서 나온다. 파워 링을 빼면 그저 보통의 지구인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인 최초의 그린 랜턴, 할 조단의 부활을 그린 『그린 랜턴: 리버스』

(사진 제공: 시공사)

DC의 작가들은 초능력을 지닌 거물급 히어로에게 '종족의 마지막 생존자', '외톨이', '지구에 대한 동경',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 등의 설정을 주었다. 그들은 지구를 제2의 보금자리로 여기며 보호한다. 자신들보다 하등한 인류에게 실망도 많이 하지만, 그러면서도 희망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반대로 배트맨과 그린 랜턴 같은 휴먼히어로는 인간이 지닌 불완전성이 중요한 테마가 된다. 그린 랜턴이란 원래 3,600개의 구획으로 나누어진 우주에서 가장 의지가 강한 자로서 선발되어 우주를 지키는 '그린 랜턴 군단'의 일원을 말하는 것인데, 지구는 그동안 미개한 곳으로 취급되어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우연한 사건으로 지구인 할 조던이 대원으로 뽑혔고, 인류 특유의 용기와 오기, 끈기와 집념, 다양한 감정에 충실할 줄 아는 능력으로 고등 문명의 외계인은 생각조차 못할 기발한 해결책을 거듭 찾아내며 가장 위대한 그린 랜턴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인류의 이런 강점은 때때로 약점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감정에 충실한 인간인 만큼, 상실감과 분노에 잠식당해 우주 최악의 악인으로 변모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최악의 적 패럴랙스가 된 할은 동료 그린 랜턴 대원들을 죽이며 군단을 궤멸시켰다. 『그린 랜턴: 리버스』는 우주 최고의 영웅과 우주 최악의 악인을 거쳐 신에게 속죄 받고 다시금 돌아오는 할 조던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큰 고난과 시련을 겪고 돌아오는 영웅은 저스티스 리그의 다른 동료들의 환영을 받을 만했지만, 그를 절대 반기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배트맨이다. 배트맨은 할 조던의 귀환을 이렇게 평가했다. "할 조던이 변했을 리가 없어. 나는 할을 신용할 수 없어."

글쎄. 배트맨 나름대로 황당했을 수도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빛의 광채 속에서 나타난 할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을 테니까. '나 이제 패럴랙스가 아니야. 하느님께 용서받았어. 나 다시 히어로할 거야.'

배트맨을 구하고서도 미움 받은 원더 우먼.

초능력을 가진 히어로에 속하는 원더 우먼 또한 비슷하게 배트맨의 눈 밖에 난 적이 있다. 2005년 진행된 DC의 거대 크로스오버 이벤트인 『인피닛 크라이시스』 첫 장면에 보면 배트맨이 원더 우먼을 원수 대하듯이 한다. "너는 영웅 자격이 없어!" 사연인즉 이렇다. 맥스웰 로드라는 인물이 슈퍼맨의 정신을 조종해서 배트맨을 죽이려 한 것이다. 이미 수많은 작품에서 전용 갑옷도 입고, 슈퍼맨의 약점인 크립토나이트 반지도 끼고 슈퍼맨을 여러 차례 때려눕힌 바 있는 배트맨이었지만, 진심으로 달려드는 슈퍼맨 앞에 제아무리 잔머리와 첨단 장비를 들이민들 당해낼 재간은 없다. 마치 「맨 오브 스틸」의 마지막 장면 같은 상황. 속수무책으로 배트맨이 슈퍼맨에 맞아죽기 바로 직전, 원더 우먼이 나타나 맥스웰 로드의 목을 꺾어 버린다. 세뇌되어 있던 슈퍼맨이 정신을 차리고 배트맨도 목숨을 건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난다. 원더 우먼이 맥스웰 로드를 죽이는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어 버린 것. 졸지에 히어로들은 전 지구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고, 배트맨도 고마워하기는커녕 살인이라는 수단을 택한 원더 우먼을 벌레 보듯 하게 된다.

평행 우주의 영웅, 빌런들이 총출동하는 거대 크로스오버 이벤트 『인피닛 크라이시스』

(사진 제공: 시공사)

불신으로 인한 정체성의 위기

꼭 살인이 아니어도 다른 히어로에 대한 배트맨의 의심은 이 무렵 극에 달해 있었다. 2004년작인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닥터 라이트라는 악당이 저스티스 리그의 멤버인 일롱게이티드맨의 아내를 강간하는데, 히어로들에게 붙잡히자 적반하장으로 그들의 정체를 온 세상에 까발리겠다고 협박을 한다. 가족의 목숨이 위협받자 히어로들은 닥터 라이트의 기억을 지워 버리기로 결정한다. 물론 배트맨은 저스티스 리그에 그런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며 반대한다. 하지만 리그 멤버들은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배트맨의 기억까지도 조작해 닥터 라이트를 처리한다. 그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자, 배트맨은 히어로에 대한 믿음을 잃고 그들을 감시하기 시작한다.

슈퍼히어로가 진정으로 지켜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

(사진 제공: 시공사)

배트맨의 감추고 싶은 과거

이 정도만 봐도 「맨 오브 스틸」에서 슈퍼맨이 저지른 짓에 배트맨이 어떤 대답을 할지는 명약관화하지만, 그렇다고 배트맨이 원래부터 철저하게 도덕적이었던 히어로는 아니다. 어떤 팬은 배트맨의 과거를 들추면서 그 역시 고고하고 깨끗한 영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배트맨의 역사적인 첫 작품인 1939년의 『디텍티브 코믹스 27』에서 이미 배트맨은 살인을 저지른 바 있다. 고의는 아니고, 몸싸움 과정에서 악당이 염산 통에 떨어져 버린 것인데 살인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죽은 자에게 그가 던지는 말 때문이다. "저런 자에게 어울리는 최후요."라고 심판했던 것이다. 『디텍티브 코믹스 39』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이번에는 배트맨이 비행기에다가 줄을 걸고는 거기에 악인을 목매달아 죽인다. 이번에도 배트맨은 어김없이 "너 같은 놈은 이렇게 죽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세계 최고의 탐정' 또한 살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디텍티브 코믹스』이슈 27 표지.

(사진 출처: http://dc.wikia.com/wiki/Detective_Comics_Vol_1_27 / TM &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초기 배트맨이 이런 성향을 가졌던 것은 애초의 그의 캐릭터가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1920~1930년대 펄프 소설에서 악인들을 응징하던 '섀도우'나 '팬텀' 같은 펄프 영웅에게 많은 부분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에 배트맨은 1950년대의 발랄하고 코믹한 캐릭터를 거쳐 1970년대 들어 마침내 원칙을 지니고 범죄와 맞서 싸우는 현대적 투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름의 도덕 기준을 가진 슈퍼히어로로서 진화 과정을 거쳐 온 셈이다.

응징자로서의 배트맨

그의 욕망을 실현하는 또 다른 배트맨들

원조 히어로인 만큼 배트맨에겐 그를 모방하는 히어로도 많다. 21세기 들어 배트맨을 본따 만든 히어로들이 배트맨이 거부한 '살인'을 해결책으로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크 밀러의 『킥애스』와 워런 엘리스의 『어소리티』가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영화를 통해서도 알려져 있지만 마크 밀러의 『킥애스』에는 빅 대디라는 인물이 나온다. 빅 대디는 자신의 딸인 힛걸을 잔혹한 킬러로 키우고 범죄자들을 죽여 없애는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어소리티』에서는 배트맨의 외모를 닮은 미드나이터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과거 배트맨이 로빈과 동성애 관계라는 모함을 당한 적이 있는데, 그걸 빗댄 것인지 미드나이터는 동성애자이다. 『어소리티』는 지구 최고의 슈퍼히어로 팀으로서 마치 마블의 쉴드처럼 지구 전역에서 벌어지는 위협을 통제하는데, 웬만한 악당은 물론 시민들을 위협하는 독재자나 권력자들 역시 그들 손에 걸리면 거의 즉결처형을 당한다.

아저씨, 요즘 히어로들은 한 성질 하거든요? 『킥애스』와 『어소리티』 표지.

(사진 제공: 시공사)

그래서일까. 『다크 나이트 리턴즈』를 썼던 프랭크 밀러 역시 『올스타 배트맨』에서 새로운 배트맨을 탄생시키면서 배트맨의 방식을 훨씬 더 폭력적인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범죄자들을 응징한 후 그 자리에서 블랙 카나리(고담의 대표적인 여자 히어로로 그린 애로우의 연인이다.)와 거친 정사를 나누는 장면으로 팬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배트맨은 과연 조커를 죽여야 하는가?

슈퍼맨의 살인 문제와 더불어 팬들 사이에 논쟁거리가 되는 또 하나는 앨런 무어와 브라이언 볼랜드의 고전 『배트맨: 킬링 조크』다. 킬링 조크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진행된다. 배트맨과 조커가 서로 마주보고 웃는다. 멀리서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웃음소리가 그치고 사이렌 소리만 남는다. 이 때 배트맨은 조커의 어깨(혹은 목)에 손을 올리고 있다. 어떤 팬들은 이 장면이 마지막 순간 배트맨이 조커의 목을 꺾어 죽였기 때문에 웃음소리가 그친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저 두 사람이 끌어안은 것일 뿐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심지어 이런 사람들은 증거까지 들이민다. 스토리 작가인 앨런무가 쓴 스크립트가 그 증거. 거기에는 '배트맨과 조커 두 사람은 훗날 서로를 죽일 인물'이라는 말이 적혀 있는데, 그 때문에 적어도 이 사건이 벌어지는 오늘 만큼은 누가 누구를 죽일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인연은 이것으로 끝인가요. 『배트맨: 킬링 조크』의 마지막 장면.

(사진 제공: 세미콜론)

모두가 정한 약속인 법의 공정한 심판에 판단을 맡기고, 자신은 그저 자경단으로서 범죄자들과 끝없는 싸움을 벌이는 데 충실하다고 자부하는 배트맨. 그러나 고담은 해가 갈수록 더욱 부패하고 타락해 범죄자들을 처리할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다. 그는 조커를 죽이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조커를 끌어안는 것이 옳을까? 슈퍼맨의 살인은 정당한가? 아닌가? 배트맨 시리즈의 대표 작가인 그랜트 모리슨의 염려처럼 해를 거듭할수록 잔인한 악인이 나오는 이 세상에서 슈퍼히어로는 언제까지 순수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만화 속 히어로에게 더욱 어둡고 잔인해지기를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도덕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폭력에 대한 우리 취향이 변했기 때문일까?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

페이스북 팔로우하기 |

트위터 팔로우하기 |

허핑턴포스트에 문의하기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배트맨 #조커 #batman #세미콜론 #킬링조크 #슈퍼맨 #원더우먼 #그린랜턴 #히어로 #히어로물 #dccomics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