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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도서관에 황당한 '분서갱유' 강요하고 있다

ⓒMaciej Toporowicz, NYC

문화체육관광부와 경기도교육청 등이 최근 전국 도서관의 어린이·청소년 추천도서 선정 기준 및 과정을 강화하고 폐기 여부를 자체 결정하라는 공문을 내려보낸 뒤, 한 보수우익단체가 ‘좌편향·왜곡 도서’로 지목한 책들이 일부 도서관에서 실제 빠지고 있다. 공문은 앞서 보수단체인 청년지식인포럼 스토리 케이가 10개 출판사의 책 12권을 좌편향·왜곡 도서로 규정하며 추천 취소와 폐기를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해당 출판사 등 출판계와 저자들은 ‘새로운 도서 검열과 출판 탄압’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고, 사서들도 공용 사이트 ‘도서관 메일링 리스트’(도메리) 등을 통해 반발에 가세했다.

<10대와 통하는 한국전쟁 이야기> 등 3권이 리스트에 포함된 출판사 철수와영희 박정훈 대표는 11일 “좌편향이 아니라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책을 찍어 문제삼은 뒤 도서관에서 빼는 작업을 하고 있다”며 “출판의 자유를 매카시적 선동으로 억압하고 도서관의 자기검열을 유도하는 새로운 금서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비판했다. 역시 ‘아주 심각’한 좌편향 도서로 지목된 만화 <어느 혁명가의 삶 1920~2010>(<나는 공산주의자다>의 개정판)을 낸 보리 출판사의 담당 편집자는 “2006년에 출간돼 평가받은 책을 만화로 개작한 이 책을 새삼 문제삼고 있다”며 “뜬금없다”고 말했다.

출판계는 이번 사태를 새로운 형태의 출판·사상 탄압으로 보고 있다. 이전에는 정부 기관이 직접 문제를 제기했다면 이제 민원이나 우익단체를 통한 문제제기 형식으로 ‘좌편향 도서’로 낙인찍고 이를 보수우파 매체들이 보도하면, 교육부와 문체부, 교육청 등이 추천·우수도서 지정 취소 압력을 넣고 도서관이 서가에서 관련 책을 빼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는 지난 5월19일 스토리 케이가 ‘정부 및 교육청 산하 전국 도서관 어린이·청소년 근현대사 추천도서 모니터링’ 결과를 발표하며 촉발됐다. 왜 전쟁 반대와 평화가 중요한지 이야기하고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을 비판한 <10대와 통하는 한국전쟁 이야기>가 사실을 왜곡하고 소련을 우호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산천재)가 이승만과 단독정부에 대해 부정적 평가만 서술했다는 점을 들어 ‘아주 심각’한 좌편향 도서라고 지목했다.

이밖에 <나는 통일이 좋아요>(대교), <교과서 밖에서 배우는 역사공부>(살림터), <오천년 한반도 역사 속을 달리는 한국사 버스>(니케주니어)(이상 ‘아주 심각’ 지목), <10대와 통하는 한국사>(철수와영희), <10대와 통하는 문화로 읽는 한국 현대사>(철수와영희),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스마트주니어), <꼬마역사학자의 한국사 탐험>(토토북)(이상 ‘심각’), <용선생의 시끌벅적 한국사 10권>(사회평론, ‘개선 필요’),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 ‘연구 필요’) 등이 리스트에 포함됐다. 이 단체는 전국 17개 시·도 각급 도서관 460여곳의 어린이·청소년 추천도서 약 9000여권 가운데 문제 도서를 추려냈다며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 이승만과 미국 비판 등을 판단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이종철 대표는 18대 대선 때 새누리당 대통합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지난 3일엔 대통령 직속 국민대통합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인물이다.

몇몇 매체들이 이 발표를 보도한 뒤 지난달 21일 문체부는 각 시·도 교육청들에 ‘공공도서관 추천도서 관련 협조요청’ 공문을 내려보냈다. 이어 경기도교육청은 지난달 28일 ‘언론보도 관련 논란 도서 처리 협조’ 공문을 각급 학교와 도서관들에 내려보내 문제의 책들에 대해 △부적절하다고 판단될 시 폐기 여부를 결정하여 처리하고 △해당 도서를 읽은 학생들을 지도하며 △추천도서 선정기준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주요 단행본도서 출판사들 단체인 한국출판인회의는 지난 4일 경기도교육청의 공문이 “객관적이고 엄격한 검증도 없이 편향적 보도에 의존하여 청소년이 읽기에 부적절한 사실 왜곡과 좌편향적 내용이 담겨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고 항의하며 해명을 요구하는 질의서를 보냈다. 문체부와 경기도교육청은 추천도서 선정기준과 절차를 제대로 하라는 권고일 뿐 특정 단체 주장을 옹호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건 아니라고 해명했으나 출판계는 수긍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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