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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하는 디자이너의 시대

놀랍게도 관심 있게 눈여겨본 부스들은 마치 한 편의 사례집을 열거해 놓은 것처럼 여실 없이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디자인을 아직도 데코레이션의 일부나 외주의 영역으로 이해하는 창업자들이 많은 게 국내 스타트업의 안타까운 현실이라지만 될성부른 떡잎을 파릇파릇 내보이는 이들 스타트업에게 디자인과 디자이너는 회사 내 의사 결정의 중심부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 전종현
  • 입력 2015.06.11 08:45
  • 수정 2016.06.11 14:12
ⓒbesuccess.com

지난 5월 중순 양일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비글로벌(BeGLOBAL) 서울 2015'가 열렸다. 작년까지 '비론치(BeLAUNCH)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개최하다가 올해부터는 실리콘밸리에서 열리던 '비글로벌' 행사와 통합해 국내 최대 규모의 스타트업 컨퍼런스로 부상했다는 주최 측의 설명을 듣자 꼭 가보고 싶었다. '제2의 창업 열풍'이 부는 시대인 만큼 그 움직임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 풍월로 듣고 읊기만 하던 스타트업과 디자이너 간의 관계를 실제로 캐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개발자와 경영자가 이끄는 스타트업보다 초기부터 디자이너가 긴밀히 관여하는 스타트업이 더 성공적인 모델이라는 말이 사실인지, 에어비앤비(Airbnb)처럼 공동 창업자로 지분을 가진 디자이너가 과연 우리나라에도 존재하는지 의구심과 동시에 기대감이 솟구쳤다. 더불어 요즘 실리콘밸리와 중국 심천에서 떠오르는 하드웨어 스타트업의 사례처럼 디자이너가 맡은 역할의 중요성이 어디까지 커질 수 있을지도 궁금한 터였다.

사람들이 끝없이 모여드는 특정 부스마다 인파를 헤치며 빠지지 않고 들러 실제 서비스와 제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중 디자이너의 역할이 궁금한 몇몇 부스에 좀 더 머무르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행동을 이틀 내내 반복했다. 놀랍게도 관심 있게 눈여겨본 부스들은 마치 한 편의 사례집을 열거해 놓은 것처럼 여실 없이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디자인을 아직도 데코레이션의 일부나 외주의 영역으로 이해하는 창업자들이 많은 게 국내 스타트업의 안타까운 현실이라지만 될성부른 떡잎을 파릇파릇 내보이는 이들 스타트업에게 디자인과 디자이너는 회사 내 의사 결정의 중심부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디자인을 전공한 창업자와 공동 창업자의 존재뿐 아니라 지분을 가지고 있는 파트너들이 회사 전반에 걸쳐 디자인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주입하는 경우가 낯설지 않았다. 지분 소유의 여하와 상관없이 디자이너의 역할을 높이 존중해주는 태도는 기본이었다. 웨어러블 기기의 하드웨어 디자인을 대학교 학부생에게 맡긴 용기 있는 기업(이미 양산 준비까지 마쳤다!)을 비롯해 개발자 스스로 말하길 디자이너가 구상한 아이디어가 이치에 맞는다면 가타부타 이유를 달지 않고 무조건 맞춘다는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이런 예에 속하지 않더라도 구성원들이 높은 수준의 미적 감각과 이해도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빈번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바로 사람들의 눈빛이었다. 대학교를 아직 졸업하지도 않은 어떤 디자이너는 핀테크 스타트업 CPO(Chief Product Officer)의 직함을 단 채 부스를 지키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분명 이곳에는 방문객과 연사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곤 하던 디자인 페어, 컨퍼런스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존재했다. 열정과 집요함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기운은 기둥 없는 구조로 설계된 행사장을 보이지 않게 굳건히 떠받들며 단단한 불꽃으로 승화되는 듯했다. 그 이질적인 분위기에 휩싸이자 나도 모르게 두뇌가 멈추는 느낌마저 들었다. 뇌 신경을 뜨겁게 마비시키는 그들은 분명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였다. 모험을 향한 열정을 발산하는 디자이너가 외국에만 있던 게 아니었던 거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디자인 산업은 대기업 중심으로 고착화되며 능력 있는 디자이너가 모두 대기업으로 쏠린다고 말한다. 부인할 수 없는 슬픈 현실이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모두 안전한 곳으로 몰릴 때에도 전혀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망망대해로 호기롭게 뛰어드는 이들이 존재한다. 배의 존재 이유는 항구에 정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모험하는 디자이너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지금, 용기와 젊음을 동력 삼아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진입하는 이들의 노력이 결코 의미 없는 몸부림이 되선 안된다. 정부가 귀가 따갑도록 외치던 '창조 경제'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관련 기관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thedesigncrack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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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CA Korea 2015년 06월호 'Insight'에 기고한 칼럼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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