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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연 한번 더 훌쩍 낯설어졌다

‘국민배우’니 ‘월드스타’니 하는 타이틀이 주는 부담감은 종종 배우를 움츠러들게 한다. 그러나 전도연은 ‘칸의 여왕’이라는 수식에 갇히지 않고 줄곧 자신만의 연기 영토를 넓혀왔다. 한겨레

칭찬이 충분치 않을 것을 염려해서일까, 그 수식어 없이는 설명할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해서일까. 사람들은 종종 그 이름만으로도 설명이 충분할 사람들에게 굳이 수식어를 달아준다. ‘국민 여동생’, ‘국민배우’, ‘가왕’, ‘월드스타’, ‘홍대여신’ 등 몇 글자 내외로 축약된 수식어들. 누군가는 이를 영예로운 별호로 여기고 그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지만, 때론 그 타이틀 안에 갇혀 버리는 이들도 있다. 타이틀이 주는 기대치와 부담감, 대중의 기대를 배반해선 안 된다는 압박이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하고 움츠러들거나 과거의 영광 안에 안주하게 하는 것이다.

‘국민 여동생’이란 타이틀을 짊어졌던 이들 중 적잖은 수는 성인의 모습을 선보여야 하는 시기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 경력의 많은 부분을 아깝게 보내야 했고, ‘월드스타’라는 수식어를 단 이들은 다음 행보가 세계적인 단위의 반응을 끌어내지 못하는 순간 쉽게 비아냥의 대상이 되곤 했다. ‘국민엠시’나 ‘국민배우’라는 타이틀은 그 어감만으로도 바른 생활을 강요하는 힘이 있어, 수식어를 짊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과감하고 파격적인 선택을 하는 걸 주저케 한다. 쉽게 붙여진 수식어는, 쉽게 수식어의 테두리 안에 사람을 가둔다.

전도연에게 붙은 ‘칸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는 어떨까? 2007년 <밀양>을 통해 자국어로만 연기해 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첫 아시아 배우가 되었으니, 분명 과한 별호는 아닐 것이다. (그에 앞서 장만옥이 영어, 프랑스어, 광둥어로 연기를 펼친 캐나다-프랑스-영국 공동제작 영화 <클린>을 통해 2004년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10년 칸 경쟁부문에 초청된 <하녀>를 통해 재차 레드카펫을 밟았고, 지난해엔 경쟁부문 심사위원에도 위촉되었다.

올해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된 <무뢰한>으로 칸을 방문한 것이 벌써 네번째가 되었으니, 그의 이름 앞에 ‘칸의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그 수식어를 듣는 본인은 어땠을까? 2007년 칸에서 돌아와 연 기자회견에서 전도연은 ‘월드스타의 해외 진출’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공항 들어서며 처음 들은 말이 ‘월드스타 전도연’인데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아요. 앞으로가 중요한 거지. 월드스타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고요.” 2009년 프랑스 예술공로 훈장 슈발리에를 수여받는 자리에서도 그는 재차 강조했다. “내 경력은 아직 보잘것없는데….”

‘앞으로가 중요하다’는 말이나 ‘내 경력은 아직 보잘것없다’는 말을 뻔한 겸손의 인사치레로 읽는 건 쉽다. 칸의 여왕이란 이름은 마치 배우로서의 최종심을 뜻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졌으니 말이다. 배우 경력의 최정점에 올라,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보여준 완성의 단계. 배우로선 아직 한참 더 갈 길이 남은 30대 중반에, 모두가 “더는 오를 곳이 없다”고 말하는 상황에 부닥친 셈이다. 물론 전도연은 이미 한 차례 그런 반응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밀양> 개봉 즈음 <씨네21> 김혜리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전도연은 <인어공주>(2004)를 마친 이후를 이렇게 회고했다. “제 자신이 소진됐다는 생각을 했어요. 특별히 한 거라곤 1인2역뿐인데 어쩐지 그냥 내 전부가 바닥난 것 같았죠. 스스로 ‘넌 이게 다야’라고 사형선고 내리듯 했어요. 누구 하나 ‘그렇지 않아. 네 안에는 다른 뭔가가 있어’라고 이야기해주는 사람도 없었고요.”

근사한 수식어로 한 배우를 정의 내리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인어공주> 앞에서 쉽게 전도연 연기의 정점을 이야기했지만, 전도연은 <너는 내 운명>(2005)과 <밀양>으로 아직 자신에겐 보여줄 것이 더 많음을 증명해 보인 바 있다. 그러니, 앞서 꺼낸 말들은 인사치레가 아니라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가고 싶었던 예술가의 진심이었으리라.

본인은 칸 여우주연상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중압감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 결과는 독특한 질감의 로맨틱코미디 <멋진 하루>(2008)나 범죄영화 <카운트다운>(2011)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시선들이었다. 칸 이전에도 칸 이후에도 좋은 시나리오를 기다려 작업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음에도, 그의 이름 앞에 붙은 ‘칸의 여왕’이란 수식어가 그를 보는 세간의 시선을 바꾼 것이다.

<카운트다운> 개봉 무렵 <연합뉴스> 임미나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전도연은 “‘이런 작품을 전도연이 하겠어?’ 하고 다들 어려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도연은 2003년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가 개봉할 때부터 여배우들을 위한 영화가 줄어들고 남성중심적인 영화가 늘고 있다며 이게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숨긴 적이 없는 배우였다. 가뜩이나 그런 환경에, 본인은 세운 적도 없는 문턱 때문에 시나리오가 예전만큼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라니.

같은 인터뷰에서 전도연은 본인의 비중이 상대 배우 정재영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적지 않으냐는 질문에 “비중으로 작품을 따지게 되면 (시나리오를)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배우는 완성을 말한 적 없으나, 세상이 벌써 그에게 완성을 선고했다. 그러곤 <카운트다운>이나 <집으로 가는 길>(2013)의 흥행 성적이 예상에 미치지 못하자, 마치 받은 상패를 장식장 안에 넣고 화급히 문을 닫듯 과거의 영광만을 이야기했다.

지난달 27일 개봉한 <무뢰한>에서, 전도연은 그 스펙트럼을 다 보여줬다는 세간의 믿음을 보기 좋게 배반하며 또다시 연기의 영토를 넓혔다. 수배된 살인범의 정부이자 룸살롱 ‘마카오’의 마담 김혜경으로 분한 전도연은, 얼핏 익숙해 보이는 특유의 연기 테크닉을 전혀 다른 맥락으로 재배치하며 관객을 완벽하게 사로잡는다. 특유의 비음 섞인 애교는 손님을 호객하는 마담의 호구지책이 되었고, 음절 음절을 또박또박 눌러 말하는 듯한 명쾌한 발성은 조심스럽고도 절박하게 희망을 묻는 밑바닥 인생 혜경의 삶을 그려낸다.

전도연은 무심하게 담배를 태우는 장면이나 허공을 바라보는 찰나의 표정 안에, 혜경이라는 인물이 허덕이는 진흙탕을 넓게 투사해 보여준다. 꿈도 희망도 없는 뒷골목 인생은 이미 <피도 눈물도 없이>(2002)에서 보여준 바 있지만, 전도연은 단 한순간도 같은 식의 연기를 반복하지 않는다. 영화에 대한 평이 호오가 갈리는 와중에도, 극을 이끌고 가는 전도연에 대한 평만큼은 이견의 여지 없이 높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남자주인공이 끌려선 안 되는 여자에게 매료된다는 내용은 하드보일드 장르에선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그리려면 그만큼 여자주인공이 매력적이어야 하니까. 그러나 놀랄 정도로 많은 작품들이 여자주인공을 마냥 청초하게 그리거나 혹은 육감적인 팜파탈로 그리는 쉬운 결론을 택한다.

<무뢰한>은, 혜경은 그러지 않는다. 그는 청초하지도 순결하지도 않고, 육감적이거나 농밀하지도 않다. 그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지치고 고독하면서도, 자신에게 닥쳐오는 생의 무게를 바로 서서 견뎌내는 인물이다. 시나리오에서 혜경의 강인함을 읽고 감독에게 ‘혜경을 남자들이 보고 싶어하는 여성상으로 대상화하지 말아줄 것’을 부탁했다는 전도연은, 판에 박힌 장르 특유의 팜파탈이 아니라 살아서 피 흘리는 한 인간을 매력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알 만큼 알고 익숙하다 생각한 순간, 전도연은 한번 더 훌쩍 낯설어졌다.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자부심을 놓지 않는 칸 국제영화제의 특성상, 자신들이 배우로, 심사위원으로 네 차례나 초대한 전도연에 대한 애착과 찬사를 쉽게 멈추진 않을 것이다. 그럴수록 ‘칸의 여왕’이란 수식어는 점점 더 떼어내기 어렵게 될 공산이 크다. 그러나 전도연은 단 한순간도 권좌에 앉아 제 영토를 지키는 ‘여왕’이었던 적이 없다. 더 좋은 작품을 남기기 위해 기어코 한 발을 내딛는 구도자였다면 모를까. 그리고 올해 그에겐 아직 <협녀-칼의 기억>(2014)과 <남과 여>(2015)의 개봉이 남아 있다. 전도연이 스크린 위에서 어떤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지, 그를 방금 보고 왔음에도 벌써 그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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