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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80대, 글로리아 스타이넘

글로리아 스타이넘 선생을 서울에서 처음 본 건 15, 6년 전 쯤이다. 왠지 전투적일 것 같은 모습을 상상했다. 결과는 딴판, 아니 충격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이미 60대 후반, 꼿꼿한 몸매에 웨이브 있는 긴 머리를 늘어뜨린 그녀의 미모에 40대 후반인 나와 친구는 그만 넋을 잃었다. 게다가 짧은 스피치 속 넘치는 지성미라니. 그녀처럼 나이 들어가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는 기술을 기필코 연마하리라. 우리는 굳은 결심을 했다. 80대 초반의 그녀가 다시 서울에 왔다.

  • 정경아
  • 입력 2015.06.08 14:39
  • 수정 2016.06.08 14:12

글로리아 스타이넘 선생을 서울에서 처음 본 건 15, 6년 전 쯤이다. 미국 대사관저에서 열린 리셉션. 국내 여성계 인사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그녀에 대해 알던 거라고는 미즈(Ms.) 잡지를 창간했다는 정도였다. 결혼 여부로 여성을 분류하던 세상에 반기를 들고 미스와 미시스를 넘어선 개념 미즈(Ms.)를 선보이더니 그 이름을 내건 잡지까지 창간해버린 열혈 미국 여성운동가.

왠지 전투적일 것 같은 모습을 상상했다. 결과는 딴판, 아니 충격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이미 60대 후반, 꼿꼿한 몸매에 웨이브 있는 긴 머리를 늘어뜨린 그녀의 미모에 40대 후반인 나와 친구는 그만 넋을 잃었다. 게다가 짧은 스피치 속 넘치는 지성미라니. 그녀처럼 나이 들어가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는 기술을 기필코 연마하리라. 우리는 굳은 결심을 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WCD 공동명예위원장이 5월 25일 서울시청에서 2015 위민크로스DMZ(WCD) 한국위원회 주최로 열린 2015국제여성평화회의에서 '나는 왜 걷는가'란 주제로 발제를 하고 있다.

80대 초반의 그녀가 다시 서울에 왔다. 기자회견 속 스타이넘 선생은 허리가 구부정해 보였다. 글로리아 할머니? 맞다. 이번엔 한반도 평화와 지구 평화를 위해 걷는 할머니로 왔다. 15개 나라 30여명의 여성들이 비무장지대를 걸어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Women Cross DMZ(WCD)'가 벌어진 2015년 5월 24일. 그녀들의 담대한 상상력이 한반도의 여성들에게 충격에 가까운 영감을 준 날이다.

스타이넘선생이 명예위원장을 맡아 이끈 '위민크로스DMZ'는 그날 개성에서 경의선 육로를 통해 비무장지대(DMZ)와 군사분계선을 건너 왔다. 함께 온 여성평화운동가 30여 명 중에는 두 명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들도 있었다. 북아일랜드의 내란을 막는데 이바지한 메어리드 매과이어와 라이베리아의 비폭력 투쟁을 이끈 리마 보위. 그녀들의 원래 계획은 DMZ를 건너 '해결되지 않은 전쟁과 분단의 상징적인 잔재'인 판문점으로 들어오겠다는 것. 그러나 남한 당국과 유엔사령부의 권고에 따라 경의선 육로로 변경됐다. 차를 타고 대부분의 구간을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를 통과해 통일대교로 온 그녀들을 맞이한 건 300여명의 남측 시민 환영단. 모두 함께 임진각 평화누리공원까지 2㎞가량을 행진했다. 40여분간 민통선을 따라 걸으며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불렀다. 여성들의 행진은 천진난만하게 보일 정도로 멋있었다. '평화와 군축을 위한 세계 여성의 날'이 선포됐고 흰 옷과 색동 보자기 스카프를 묵에 둘렀다. 신청 마감날짜를 넘겨버리는 통에 나는 남쪽 부분 행사에 참가하지 못했다. 엄청 후회된다.

우리에게 분단은 거의 태생적인 삶의 조건이 된 지 오래다. 정전 상태로 '별일 없이' 살아온 게 60년이 넘었기 때문일까. 과도하게 무장된 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에 모두들 지나치게 태연하다. 통일 같은 큰일은 관계 당국과 전문가 집단이 맡아야 한다는 믿음 또한 견고하다. 분단이 우리 뜻이 아니었듯이 통일 또한 우리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 열패감과 무기력감에 허덕인다. 독일의 통일 과정을 보면서도 한낱 남의 나라 일로만 여긴다.

그러나 남의 나라 여성들이 대신 걸어준 '평화 행진'에 이어 민통선 내 철책선을 따라 우리나라 여성들이 함께 행진한 사건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내년에 스타이넘선생과 여성평화운동가들은 남에서 북으로 걸을 계획이라고 한다. 올해 첫술에 배부르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다. 그때 남과 북의 여성들이 함께 비무장지대를 걷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굳이 여성들만이 걸어야 할까? 그건 아니다. 신정일 선생 같은 인문지리 답사가가 이끄는 '백두에서 한라까지 걷기'를 남과 북이 함께 기획하고 실천해 나가면 어떨까. 남녘을 휩쓰는 걷기 열풍 속에 바라보는 북쪽의 산들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게다가 산과 강은 인위적인 경계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휴전선이라는 찌질한 경계선을 넘어 '영산강에서 두만강까지' 프로그램이 런칭된다면 좋겠다. 강을 따라 강가에 사는 사람들을 보며 함께 걷자는 거다. 아름다운 강물의 흐름을 따라 그저 걷다보면 만나는 풍경과 사람들에게 마음이 열리지 않을까. 통일을 외치는 백 마디 웅변보다 내 발로 걸으며 부딪치는 풍경과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게 분명하다. 그날이 오면 발이 부르트더라도 함께 걸어볼 참이다.

세계 여성평화운동단체 '위민크로스디엠지'(WCD)의 활동가들이 5월 24일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민통선 철책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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