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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항야족 탄압에 대한 아웅산 수치의 침묵을 참을 수 없는 이유

“아웅산 수치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며, 이 여성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기리고 민주주의와 인권, 민족과의 호합을 위해 분투하는 세상 모든 이들을 지원하는 것을 보여주기를 바란다”고 1991년에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발표했다.

또 수치가 “압제에 맞서는 싸움의 중요한 심볼”이라고도 했다.

24년이 지난 지금, 미얀마의 무슬림 로힝야족들은 다섯 명으로 구성된 노벨위원회의 평가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수치를 ‘세상에서 유명하고 용감한 양심수’라고 불렀던 고든 브라운과도 의견을 달리할 것이다. 미얀마의 사람들은 “아웅산 수치가 줄 수 있는 것과 같은 도덕적이고 원칙에 입각한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고 했던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말할 것도 없다.

UN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핍박받는 소수집단’인 로힝야족은 최근 몇 년 간 자신들의 곤경이 주목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몇 주 전 로힝야족 수천 명이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일이다. 아직도 이 세 나라의 바다에 수천 명의 로힝야족이 허술한 배를 타고 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음식과 깨끗한 물은 점점 바닥나고 있다.

‘너무 배고프다. 너무 말랐다.’

“어부 무치타르 알리는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절박한 굶주리는 로힝야 사람들이 초과 승선한 배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5월 20일 AFP의 보도다.

“나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고 나와 내 친구들은 울었어요. 그들이 너무 배고파 보이고 너무 말라서요.”

그러나 이런 로힝야족 ‘보트 피플’은 훨씬 더 큰 문제의 증상에 불과하다. 암네스티 인터내셔널의 아시아 태평양 연구자인 케이트 슈츠는 이렇게 말한다.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수천 명의 목숨이 지금으로선 가장 급한 문제이지만, 이 위기의 근원도 해결되어야 합니다. 로힝야족 수천 명이 미얀마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살아남지 못할 지도 모르는 보트를 선택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미얀마에서 처한 상황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들이 처한 압제적 상황은 130만 명의 로힝야족 무슬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부터 이동, 취업, 교육 및 의료 서비스 접근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에 걸치며, 로힝야족이 사는 라킨 주는 로힝야족이 가정당 두 명까지만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하는 차별법도 도입했다.

수십만 명이 자기 집에서 쫓겨났고, 광란에 빠진 군중들이 그들의 도시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2014년에 정부는 심지어 ‘로힝야’라는 단어 사용까지 금지하며, 미얀마에서 수세대에 걸쳐 살아온 소수 무슬림인 로힝야들이 인구 조사에서 ‘벵골인’으로 분류되도록 했다.

용납할 수 없는 침묵

그렇다면 여기서 수치의 자리는 어디인가? 일단, 그녀의 침묵은 용납할 수 없다. 승려 아신 위라투(일명 ‘버마 빈 라덴’) 같은 사람들의 부추김으로 벌어지는 로힝야에 대한 불교 극단주의자들의 폭력은 물론, 정부가 나서서 그녀의 나라 국민들을 탄압하는 것을 규탄하기는커녕 제대로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집단 학살에 있어, 침묵은 공모다. 아웅산 수치도 마찬가지다.’ 런던 대학 법학 교수이자 국가범죄 계획 디렉터인 페니 그린이 ‘인디펜던트’ 사설에 최근 쓴 글이다. ‘막대한 도덕적 정치적 자본을 지닌’ 미얀마의 야당 지도자 수치는 ‘버마의 정치적 사회적 담론의 특징인 용납할 수 없는 인종차별과 이슬람 공포증’에 도전할 수 있었다고 그린은 썼다.

수치는 도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최근 몇 년 동안 미얀마의 대다수인 불교도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2016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려면 그들의 표가 필요히다. 만약 군부가 그녀를 대통령 자리에 앉게 내버려 둘지, 후보로 출마는 하게 해줄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소수인 무슬림들에게 자행되는 폭력을 축소하려 하고, 박해자와 박해 피해자가 평등한 것처럼 말하려고 애쓴다.

예를 들어 수치는 2013년에 BBC와 인터뷰하면서 추잡하게도 이 폭력이 ‘양측 모두에’ 책임이 있다고 하며, 인터뷰어 미샬 후세인에게 ‘무슬림들이 타겟이 되었지만 불교도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얀마에서 악취가 풍기는 수용소에 갇혀 ‘굶주림, 절망, 질병에 서서히 굴복하는’ 사람들은 불교도들이 아니다. 국제인권감시기구가 ‘인종청소’라고 부르는 일을 당한 것도, UN의 미얀마 인권 상황 특별 조사 위원이 ‘인류에 대한 범죄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한 일을 당한 것도 불교도들이 아니다. 이 나라에서 도망치려고 비좁은 배에 올라타는 것도, 그러는 와중에 망치와 칼로 공격을 받는 것도 불교도들이 아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집단 학살에 직면한 사람들은 불교도들이 아니다.

‘집단 학살’의 위험

과장에 불과할까? 그렇다면 좋으련만.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의 시몬-쇼드트 집단 학살 방지 센터 조사원들이 내린 결론을 들어보라.

그들은 5월 초에 발표한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집단 학살의 여러 전제 조건이 이미 존재한다는 깊은 우려를 안고 버마를 떠났다.”

로힝야 억류 수용소를 방문하고 폭력적인 공격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조사원들은 ‘버마 정부가 이들 지역 사회 전체를 억압하는 법과 정책을 즉각 수정하지 않는다며 로힝야족에게 집단 학살은 심각한 위험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배와 시체들, 보고서와 폭로에도 불구하고 수 치는 아직도 말이 없다. 로힝야족들은 문자 그대로 목숨을 구하려고 달리고 있는데, 수치는 그들을 돕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한 적이 없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에게는 좀 더 많은 걸 기대해야 하는 것 아닐까?

아닐지도 모른다. ‘헨리 키신저’라는 이름이 떠오른다. 게다가, 노벨상 위원회는 평화상을 일찌감치 수여한 좀 괴상한 전력이 있어 왔다. 이스라엘 이츠하크 라빈 총리, 이스라엘 시몬 페레스 대통령, 팔레스타인의 야세르 아라파트가 1994년에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걸 기억하는가? 중동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가자의 어린이들에게 물어보라. 2009년의 버락 오바마는 기억하는가? 파키스탄에서 드론에게 희생당한 민간인들에게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라.

라빈, 아라파트, 오바마…… 결국 그들은 물론 모두 정치인들이다. 수치는 다른 존재, 그 이상의 존재라고 우린 생각해왔다. 도덕의 아이콘, 인권 챔피언, 현대판 간디.

슬픈 진실

오피니언 리더이자 한때 정치 죄수였던 그녀가 2013년에 CNN에 자신은 ‘이제껏 늘 정치인이었’고, 자신의 야망은 자기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왜 우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슬픈 진실은 이제 우리가 장밋빛 색안경을 벗고 ‘그 분’을 바라볼 때가 이미 한참 지났다는 것이다. 수 치의 본모습을 보아야 한다. 한때 양심수였던 것은 맞지만, 이제는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원칙보다 득표를 더 중요시하는 정치인인 것이다. 죄없는 로힝야족의 생명보다는 정당 정치의 발전이 그녀에겐 더 중요하다.

수치는 1991년에 가택 연금 상태에서 수상한 노벨상을 21년 뒤인 2012년 6월에 감옥에서 마침내 받아들이며 거창하게 선언했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난민, 홈리스, 희망 잃은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 구석구석이 모두 보호구역이고 사람들은 자유와 평화롭게 살 능력을 갖는 세상입니다.”

세상 따윈 잊어라. 그녀는 고국에서부터, 라킨의 로힝야족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러지 않겠다면, 혹은 그럴 수 없다면, 20년 넘게 기다렸다가 받았던 상을 반납하는 걸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알 자지라에 먼저 게재되었다.

허핑턴포스트US의 Why Aung San Suu Kyi's Silence on the Rohingya Is Inexcusable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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