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기차를 타고 동유럽 4개국을 갔다. 그곳은 오래된 대륙이 아니었다

  • 김도훈
  • 입력 2015.06.01 06:51
  • 수정 2015.06.01 13:48

기차표를 손에 쥐었을 때만 해도 몰랐다. 동유럽은 역사의 흔적만이 가득한 오래된 대륙이 아니었다. 젊은 에너지가 오래된 골목 사이로 흥청망청 타올랐다.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체코 프라하로 가는 야간 기차는 특실이었다. 이럴 리가 없었다. 문을 여는 순간 발이 절로 뒷걸음질을 쳤다. 머릿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 결과에 따르면 야간 기차의 객실은 영화 [오리엔탈 특급열차]를 떠올리게 만드는 고풍스러운 특실로서, 값비싼 마호가니 나무로 마감이 되어 있고, 실크가 약간 섞인 부드러운 침대가 양옆으로 놓여 있어야 했다. 막상 들어간 특실은 보이스카웃 이후 단 한번도 몸을 올려보지 못한 이층 침대와 물건을 놓을 수 있는 작은 공간, 옷걸이가 전부였다.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물었다. “이게 특실 맞아?” 그는 답했다. “물론이지.” 물론이다. 이게 특실이다.

이층 침대에 누워 일정을 정리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시작한 여행은 크라쿠프를 거쳐 프라하로, 거기서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를 거쳤다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마무리될 예정이다. 이층 침대는 아주 적절한 크기다. 내 침대를 세로로 두 개 합쳐도 다리를 쭉 뻗지 못할 만큼 거대한 승무원이 객실로 왔다. “내일 아침은 티로 하시겠습니까, 커피로 하시겠습니까?” “커피로 주세요. 근데 다시 한번 묻고 싶은데, 개인 세면실은 없나요?” “네. 화장실에 세면대가 있습니다. 이건 40년 된 기차니까요. 그래서 손님이 지금 스마트폰을 충전하려고 돼지코를 꽂아놓은 저 전기 콘센트도 모양뿐입니다. 전기는 안 들어옵니다. 티켓 좀 보여주시겠어요?” 콘센트에서 스마트폰 충전선을 빼고 티켓 뭉치를 꺼냈다. “네. 확인했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은 커피와 크루아상으로 갖다 드리겠습니다.” 이층 침대와 커피와 크루아상이라니. 뭔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모험을 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 여행의 시작은 바르샤바였다. 폴란드인 가이드는 아냐라는 이름의 40대 여인으로, 고등학교 시절 역사 선생님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었다. 그녀는 어쨌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신념의 여인이었다. 하루 종일 구시가의 성당과 성과 성당과 작은 성과 성당과 성당을 돌아다니다 질린 내가 “아냐. 우리 다운타운도 좀 가볼 수 있을까?”라고 물으면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아냐.” 지나가는 길목의 숍에 잠시 들르고 싶어 “아냐. 우리 저기 잠깐 들러서 쇼핑해도 될까?”라고 물으면 그녀는 말했다. “아냐.” 대신 그녀는 UEFA 유로 2012 스타디움에 굳이 우리를 데려가 거의 반나절을 보내게 만들었다. 오해 마시라. 스타디움은 멋졌다. 하지만 스타디움의 한쪽에 차를 세운 뒤 사진을 찍은 다음, 다른 한쪽으로 또 차를 몰고 간 뒤 사진을 찍을 정도로 굉장했던 건 아니다. 나는 그 순간 1989년 즈음의 어느 날 서울로 단체 관광을 왔다가 잠실 스타디움에서 반나절을 보내야 했던 미국인 관광객 마이클의 마음을 불현듯 이해하게 됐다. 마이클. 미안해. 하지만 개발도상국의 시민들에게는 거대한 스타디움이 국가적인 자랑이기도 하다는 걸 이해해줬으면 한다.

바르샤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거의 완전히 파괴됐던 도시다. 다른 유럽 도시들과는 달리 시내 한가운데 거대한 유리 빌딩들이 쭉쭉 뻗어 있다. 아냐는 그 빌딩들을 조금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저게 우리의 맨해튼…” 이라고 말하곤 했다. 맨해튼의 한가운데는 조금 더 한심한 건물이 하나 서 있다. 스탈린이 1955년에 모스크바의 건물 하나를 거의 그대로 베낀 다음 바르샤바에 선물한 234m의 문화과학궁전이다. 공산주의 건물들의 키치한 매력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빌딩이 꽤 근사해 보였는데, 10여 년 전 러시아 여행을 갔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모스크바 한가운데 불쑥 솟아 있는 공산 시절 빌딩을 미친 듯이 카메라에 담는 나를 러시아 친구는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너는 저게 좋아? 차라리 붉은 광장 옆에 있는 삼성 전광판을 찍지 그래?” 물론 나는 그것도 찍었다. 자랑스러워서라기보다는, 한 국가의 기업이 한 역사적 도시의 경관을 얼마나 간편하게 망칠 수 있는지에 대한 증거를 남겨놓기 위해서였다.

폴란드의 마지막 행선지였던 비엘리치카 소금 광산에 대해서는 한마디를 하고 넘어가는 게 옳을 것이다. 1978년 유네스코 최초로 자연 및 문화 유산으로 선정된 이곳은 1290년대부터 소금을 채취하기 시작한 광산이다. 일반 관광객은 지하 135m 지점까지 내려갈 수 있는데, 특히 놀라운 것은 ‘성녀 킹가의 성당’이다. 1000명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이 지하 성당은 오로지 광부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입에서 방언이 절로 튀어나올 만큼 성스러운 기운에 휩싸여 있는 와중에 가이드가 말했다. “여기서는 결혼식을 하거나 연주회를 할 수 있습니다. 결혼식 하러 오세요. 여기 공기는 소금기가 많아서 천식에도 좋습니다.” 천식 환자들을 위한 결혼식 장소로는 이만한 곳이 없다는 소리인가 보다. 소금기 가득한 마지막 식사 시간에 아냐가 얼굴이 새겨진 명함을 건넸다. “내 얼굴을 잊을지도 모르니까”라며 아냐는 웃었다. “아냐. 아냐 얼굴은 잊을 수가 없을 거야”라고 대답했다.

마지막 식사는 근사했다만, 벌써 3일째 돼지고기다. 유럽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선호하는 건 잘 안다. 동유럽 사람들은 돼지고기밖에 먹지 않는 모양이다. 찐 돼지, 간 돼지, 구운 돼지, 수프에 담근 돼지….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돼지 요리법을 폴란드에서 익혔다.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고 바르샤바는 소고기를 믿지 않는다.

프라하는 어쩌면 내가 가장 기대하지 않은 여행지였을지도 모른다. 이미 지나치게 유명한 관광 도시인 탓이다. 한국인을 가장 많이 본 도시도 프라하였다. 특히 한국인 아줌마 관광객들을 프라하에서 마주치지 않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약간 톤 다운된 옷을 입은 동유럽 사람들 사이에서 강렬한 원색의 빨강, 파랑, 초록, 분홍 등산복에 꽃무늬 스카프를 매고 선캡을 쓴 그녀들은 가히 아시아가 유럽으로 보낸 색채의 홍보 대사라 할 만하다. 만약 내가 펜톤의 직원이었다면 그녀들을 색채 감별사로 임명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프라하는 아름답다.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종종 영화의 로케이션을 위해 뚝딱뚝딱 만들어놓은 세트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나 좀 더 젊은 프라하를 보고 싶다면 구시가를 벗어나서 무작정 걸어라. 관광객이 전혀 없는 한적한 거리에서 당신은 아마 프라하의 근사한 젊은이들이 종일 진을 치고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마시며 예술을 논하는 ‘카페 제리코’나 겁이 날 정도로 잘생긴 미남 연주자들이 정통 재즈를 연주하는 ‘우 말레호 글레나’ 같은 보물을 발견하게 될 거다. 온 유럽의 예술가들이 거닐던 프라하의 골목은 카프카의 소설에 나오는 미로와 똑 닮아 있어서 전혀 예상치 않았던 장소들이 갑자기 눈앞에 기적처럼 튀어나온다.

브라티슬라바역에 도착하자마자 뭔가 묘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1993년 체코로부터 독립한 슬로바키아의 수도는 바르샤바와 프라하에 비하면 시골 마을에 가깝다. 가이드 로랑드는 나랑드 사이다처럼 순수한 남자로, 너무 선량하게 생긴 나머지 [반지의 제왕]의 호빗족 역할로 딱 안성맞춤일 듯했다. 문제는 도무지 그가 하는 영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는 데다가, 그 역시 우리의 영어를 완벽히 알아듣는 것 같지가 않았다는 거다. “로랑드.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저기 옆에 보이는 건물은 ××세기에 ××왕이 만든 유서 깊은….” “로랑드. 밥은 몇 시에 먹어요?” “지금 우리가 갈 곳은 브라티슬라바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가….” “로랑드. 오늘 저녁은 돼지고기만은 싫어요.” “오늘 우리가갈 식당은 돼지고기 요리로 유명한….” 밤이 되자 혼자 중심가 산책을 시도하다 작은 클럽으로 들어가 맥주를 한잔 시켰다. 맙소사. 만약 당신이 동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갈 예정이라면 반드시 브라티슬라바는 일정에서 빼도록 하라. 동유럽에서 가장 미남과 미녀의 비율이 높다는 소리는 프라하에서부터 들었건만, 이 도시는 마주치는 모두가 모델이다. 만약 내가 브라티슬라바 관광청에서 일하게 된다면 이 작은 나라의 섬세하지만 소박한 유적들보다는 미남 미녀를 먼저 내세우리라. 압도적인 유적과 자연을 지닌 관광 대국에 둘러싸여 있지만 한류와 아이돌로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한국을 한번 생각해보시라.

브라티슬라바에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의 마지막 종착지는 세르비아니 홀로 여행을 하다 잠들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래도 기차에서 잘 여유는 없다. 바깥으로 지나가는 중부 유럽의 경관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근사한데, 동유럽의 기차들은 식당칸이 심지어 서유럽 기차보다도 훌륭하다. 한 끼도 허투루 먹지 않는 동유럽 사람들의 취향 덕분일까. 전반적으로 동유럽 사람들은 기차 여행이라는 것이 고속 열차로 목적지까지 빠르게 이동하는 것보다 더 근사한 경험이라는 걸 잘 아는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동유럽의 기차 여행이 여전히 오래전 기차 여행의 로망을 간직하고 있다는 소리다. 다만 두 가지 꼭 알아두어야 할 상식이 있다. 승무원의 사진을 함부로 찍지 말자. 특히 그녀가 마치 남자친구가 아시아에서 온 미녀와 함께 야반도주한 걸 어젯밤에 눈치챈 듯한 인상을 하고 있다면, 카메라는 절대 들이대서는 안 된다. 두 번째 상식. 동유럽의 기차는 현지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잦은 관계로 레일유럽을 통해 미리 한국에서 예약을 하고 가는 게 좋은데, 무조건 일등석을 권하고 싶다. 특히 [마리 끌레르] 표지 모델 같은 미녀 승무원이 디자인 숍에서 구입한 듯 빈티지한 인스턴트 컵에 진한 커피를 타서 과자와 내밀 땐 박수라도 치고 싶어진다.

기차가 헝가리로 들어서자 다뉴브 강을 낀 시골 경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동유럽은 세기의 폭우로 거의 모든 강이 범람했다. 부다페스트를 관통하는 다뉴브 강은 트램 라인이 완전히 잠겨버릴 정도로 넘쳤다. 그러나 부다페스트는 세기의 폭우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 청명하고 우아했다. 사실 내가 부다페스트에 기대한 건 유럽에서 가장 데카당스하고 우울한 도시였다.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무대 아니던가. 게다가 헝가리는 자살률에 있어서 한국과 언제나 1위를 두고 엎치락뒤치락하는 나라다.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아시아 기마민족 마자르족의 피가 흐르기 때문일까. 헝가리는 언어도 한국과 같은 우랄알타이 계열이다. 아버지는 헝가리어로 어버지, 아빠는 어빠, 엄마는 어녀다. 그래서 부다페스트가 세상에서 가장 긴장감으로 팽팽한 도시 서울과 닮아 있냐면, 어림없다. 동유럽의 파리로 불리던 부다페스트는 고전적인 우아함의 극치다. 하긴 이 도시는 1896년도에 런던에 이어 두 번째로 지하철을 개통한 도시이며 헝가리 왕국의 오랜 수도 아니던가. 서쪽에 파리가 있다면 동쪽에는 부다페스트가 있다.

우아함만이 이 고도의 매력은 아닐 것이다. 허물어지는 건물을 개조한 루인펍에는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연애를 하고, 오래된 건물 사이를 걷다 보면 60년대를 테마로 모던하게 차린 카페와 마주친다. 19세기에 거대하게 세워진 바로크 양식의 온천에는 수영복을 입고 욕탕에 몸을 담근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도심 한가운데서는 록 콘서트가 난데없이 벌어지기도 한다. ‘X6 갤러리’에서 마틴 파의 멕시코 사진집을 겨우 30유로에 구입한 순간, 나는 수년 전 베를린에 처음 갔을 때 느낀 어떤 젊은 에너지를 부다페스트에서 다시 느꼈다. 베를린의 집값이 올라가면 전 세계의 힙스터들은 다음 목적지를 찾아 헤맬 거다. 여기서 한 가지 예언을 하자면, 그들의 다음 목적지는 부다페스트가 될 게 틀림없다. 그러니 당신이 홍대 앞 바에서 “이젠 베를린도 별거 없더군”이라고 중얼거릴 수 있을 만큼 스스로를 힙하다고 생각하는 남자라면 부다페스트로 가시라. 부다페스트가 당신을 반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거야 내가 책임질 일은 아니다.

여행의 마지막 밤에는 적당한 타락이 필요하다. 중심가의 공원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과 뒤섞여 와인에 소다를 뒤섞은 요상한 음료수를 마시다 담배가 똑 떨어졌다. 어딘지 조금 보혜미안 냄새가 나는 헝가리 친구들에게 갔다. “담배 좀 빌릴 수 있을까?” “오 친구. 어디서 왔어?” “서울. 사우스 코리아.” 그 순간, 혹시나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마음속 깊이 공포를 느끼며 상상은 해봤지만 아마 절대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안심했던 일이 벌어졌다. 보혜미안 친구 중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노래를 불렀다. “오우 캉남 스타일!” 그 순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싸이는 공식적으로 전 세계를 점령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폴란드의 아냐와 슬로바키아의 로랑드가 만나는 꿈을 꿨다(꿈이 아니라 상상이었던 것 같지만, 그냥 꿈이라고 해두자). 둘은 뭔가를 두고 싸우고 있었는데, 속이 터진 아냐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로랑드에게 연신 “아냐! 아냐! 아냐!”를 외치고 있었던 것도 같다. 지금 내 손에는 아냐와 로랑드의 명함이 있다. 아냐는 프랑스인 남편이 있고 로랑드에게는 여자친구가 있다. 두 사람이 각자의 연인과 헤어지는 날이 만에 하나라도 온다면 나는 둘의 명함을 뒤바꿔서 편지로 부칠 생각이다. 아냐와 로랑드가 그걸 인연으로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내가 뚜쟁이 값으로 바라는 건 (참으로 겸손하고 소박하게도) 동유럽 순회 기차표다. 침대칸은 꼭 이층 침대와 커피와 크루아상이 제공되는 특실이어야 할 것이다.

바르샤바 [WARSZAWA] → 3시간 → 크라쿠프 [KRAKOW ] → 9시간 30분 야간열차 → 프라하 [PRAHA] → 4시간 10분 → 브라티슬라바 [BRATISLAVA] → 2시간 40분 → 부다페스트 [BUDAPEST] → 레일유럽(www.raileurope.co.kr) 유러피안 이스트 패스, 가격 총 230유로.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