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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더의 교훈

서독 시절이나 통일 후의 독일에서 사회당이 사회보장을 축소하고 시장개입을 최소화하고 경직된 노동시장을 개혁하는 중도 클릭은 정권을 건 도박이었다. 슈뢰더는 그 고난의 길을 택했다. 그는 다음 선거에서 패배를 각오하고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히틀러 시대를 건너뛴 바이마르 공화국 이래의 역사적인 개혁에 착수한 것이다. 그것이 2003년에 발표한 '어젠다 2010'이다. 총선 2년을 앞둔 시점이다. 소정치인은 오금이 저려 엄두도 못 낼 일을 슈뢰더는 감행했다.

ⓒASSOCIATED PRESS

미국의 신학자 제임스 클라크(1810~1888)는 소정치인(Politician)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대정치인(Statesman)은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클라크의 기준에서 보면 지난달 제주포럼에 참석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대정치인이다. 그가 총리에 처음 선출된 것은 1998년이다. 2002년의 총선에서 그는 사회복지를 삭감하지 않는다는 공약을 내세워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2001년 경기 침체를 잠깐 겪었던 독일에 또다시 낮은 성장, 높은 실업, 내수 부진, 수출 감소를 동반한 제2의 경기 침체가 덮쳤다. 유럽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독일이 "유럽 경제의 병자"로 전락하고 있었다. 독일병은 구조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경직된 노동시장과 정부의 시장개입, 기업활동 규제, 과도한 사회보장제도, 통일 후 1조 달러를 쏟아부은 통일비용이 원인이었다. 이런 정책은 바이마르 공화국 이래 막강한 노조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독일 사회당(SPD)의 이념에 합당한 것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자체가 노동자·군인 평의회(Rat)가 사회당을 앞세워 수립한 정권이었다.

서독 시절이나 통일 후의 독일에서 사회당이 사회보장을 축소하고 시장개입을 최소화하고 경직된 노동시장을 개혁하는 중도 클릭은 정권을 건 도박이었다. 슈뢰더는 그 고난의 길을 택했다. 그는 다음 선거에서 패배를 각오하고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히틀러 시대를 건너뛴 바이마르 공화국 이래의 역사적인 개혁에 착수한 것이다. 그것이 2003년에 발표한 '어젠다 2010'이다. 총선 2년을 앞둔 시점이다. 소정치인은 오금이 저려 엄두도 못 낼 일을 슈뢰더는 감행했다.

그것이 여론이 반대해도 다음 세대,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는 바른 길이라고 생각되는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는 콘트래리언(Contrarian) 리더십이다. 콘트래리언은 대세에 역행한다는 의미로 표(票)퓰리즘과 반대되는 노선이다. 사민당의 좌파 진영이 반발하고 노조가 총파업을 위협한 것은 당연했다. 슈뢰더는 사회주의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슈뢰더의 재무장관 한스 아이헬은 사회적으로 인기가 있을 수 없는 조치를 취했다. 소득세를 25% 줄이고, 의료지원비를 깎고, 연금과 실업수당을 대폭 삭감했다. 연금 수령 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올렸다. 이것은 유럽연합(EU)이 채택한 리스본 전략과 궤를 같이하는 시장 자유주의 노선이었다. '어젠다 2010'이라는 이름도 리스본 전략 수행의 마감연도인 2010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것은 독일의 각종 사회복지 지출을 전후 처음으로 가장 큰 폭으로 깎는 것이었다. 사회당 안에서 반란에 가까운 반대가 일어났다. 슈뢰더는 어젠다 2010을 저지하면 후임 총리를 지명하지 않고 사임하겠다는 위협으로 맞섰다. 쾰른·베를린·슈투트가르트에서 50만 명이 항의 시위를 벌였다. 노조가 파업을 하지 못한 것은 정치적인 동기로는 파업을 할 수 없다는 헌법 규정 때문이었다.

슈뢰더는 당내에서 불신임을 받고 당 총재직을 사임하고 총리직만 유지했다. 그리고 2006년으로 예정된 총선을 2005년으로 앞당겨 치렀다. 사회당은 예상대로 대패하여 정권이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로 넘어갔다. 어젠다 2010은 큰 성공이었다. 실업이 줄고 수출이 늘었으며 경기가 회복되었다. 독일병자는 건강을 거뜬히 회복했다. 슈뢰더는 통일 이후 미루어 온 경제·사회 개혁을 단행해 메르켈에게 꽃길을 열어 준 셈이다. 총리 메르켈의 인기의 절반은 슈뢰더 덕이다.

독일에는 콘트래리언 리더십의 전례가 있었다.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는 한국전쟁 발발에 자극받아 독일 재군비를 결단했다. 그것은 미국의 권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이 반발하고 국내에서도 전쟁에 지친 국민이 반대의 대열에 섰다. 그의 내무장관 구스타프 하이네만은 "신은 우리 손에서 두 번이나 칼을 거두었다. 세 번째 칼을 들 수는 없다"는 명언을 남기고 사임했다. 아데나워의 반론도 유명하다. "신은 우리에게 생각하라고 두뇌를 주고, 행동하라고 손을 주었다." 하이네만은 당적을 사민당으로 옮겨 1969년 연방 대통령에 선출됐다.

한국의 '표퓰리즘'에 발목이 잡힌 대통령과 정부, 시정잡배들이나 쓰는 저질 막말이 튀는 정치판, 일만 있으면 거리로 뛰쳐 나가는 시민단체를 보면 슈뢰더와 아데나워가 있는 독일이 우러러 보인다. 한국에도 그런 콘트래리언 리더가 나와서 다음 세대를 보고 자리를 건 정치·사회·경제의 대개혁을 하지 않는 한 한국의 미래는 기약 없이 암울하기만 할 것이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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