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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 고의사구? 그 볼넷이 아쉬웠던 이유

  • 허완
  • 입력 2015.06.01 06:16
  • 수정 2015.06.01 06:17

윤형중 기자의 풀카운트

12년 전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선수가 아시아 신기록인 56홈런에 도전하던 때의 일입니다. 2003년 9월27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롯데의 경기에서 8회 이승엽이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앞선 세 타석에서 삼진과 땅볼, 뜬공으로 물러난 이승엽에게 이날 마지막 타석이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상대 투수 가득염이 투구 준비동작을 취하자 포수 최기문은 이미 일어나 타석에서 상당히 벗어난 곳에 섰습니다. 고의사구였죠. 이승엽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1루로 걸어갔습니다.

그때 사직구장을 찾은 부산시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관중들은 롯데 선수단을 향해 고성을 지르고, 운동장에 물병과 캔, 심지어 불 붙인 쓰레기를 투척했습니다. 이 와중에 막대기에 맞은 한 여자 관중은 머리가 5㎝가량 찢어져 응급차로 이송됐습니다. 결국 경기는 1시간 34분이나 중단됐죠. 이날의 불상사는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기 싫은 투수들과 정면승부를 원하는 팬들의 팽팽한 대립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31일 서울 잠실에서 열린 삼성과 엘지 경기에서 마치 12년 전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다행히도 불상사는 없었지만, 400홈런을 기다리는 팬들의 안타까운 표정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혔습니다. 이날 9회초 투아웃에 이승엽이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삼성이 엘지에 9-3으로 앞선 상황이고, 상대 투수는 오른손 사이드암(옆으로 던지는 투수)인 신승현이었죠. 초구부터 포수 유강남은 타석에서 바깥쪽으로 상당히 벗어난 곳에 자리를 잡더니, 공 4개가 연달아 포수의 미트로 꽂혔습니다. 고의성이 짙은 볼넷이었죠. 이승엽은 12년 전과 마찬가지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1루로 걸어 나갔습니다.

이 볼넷은 여러가지로 아쉬웠습니다. 일단 양상문 엘지 감독이 경기 전 “이승엽의 400홈런을 축하해줘야 한다. 선수들에게도 피하지 말고 정상적으로 승부하라고 지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상대팀 감독의 정면승부 천명에 팬들의 기대도 높은 상황이었죠. 게다가 이승엽은 이날 2회에 큼지막한 2루타를 치는 등 타격감이 좋았고, 상대 투수도 평소 이승엽이 강한 면모를 드러내는 사이드암이었습니다.

물론 고의사구 역시 경기의 일부이긴 합니다. 팀이 이기기 위해선 승부처에서 강한 타자와의 승부를 피하는 것도 감독이 구사하는 작전 중 하나죠. 하지만 신승현의 볼넷은 여러 면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신승현이 투아웃을 잡고 이승엽을 맞을 때 주자가 2루에 단 한 명 있었고, 9회말 한 차례의 공격을 앞두고 6점 차로 뒤진 상황이었습니다. 팀이 이기기 위해 정면승부를 피했다고 보기엔 명분이 부족했죠.

다시 12년 전으로 돌아가면, 이승엽의 56홈런 아시아 신기록은 투수들의 집중 견제와의 싸움이었습니다. 특히 이승엽이 1999년 54홈런을 치고서 투수들의 집중 견제로 신기록 달성에 실패한 경험이 있은 터여서 팬들은 상대 투수들에게 ‘정면승부’를 압박했죠. 2003년 문제의 롯데전 다음날 에스케이가 이승엽에게 두 개의 볼넷을 내줬고, 하루 뒤 엘지가 고의사구를 포함해 볼넷 세 개를 내줬습니다. 공교롭게도 당시 엘지의 투수코치가 양상문 현 엘지 감독입니다. 양 감독은 당시 “투수가 큰 경기에서 홈런을 맞으면 상처도 크지 않겠느냐”고 고의사구를 옹호했었죠. 그 경기 이후 당시 언론들은 “이승엽에게 정면승부를 피하는 한국 야구” 같은 기사들을 쏟아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승엽은 시즌 최종전인 롯데와의 경기에서 역사적인 56홈런을 쏘아올렸죠.

물론 그 어떤 투수도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는 게 달갑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코리아 특급 박찬호는 2001년 배리 본즈에게 역사적인 71, 72홈런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배리 본즈가 마크 맥과이어의 70홈런 기록 경신을 앞둔 경기에서 박찬호의 선택은 정면승부였고, 연타석 홈런을 맞았죠. 그런 승부근성이 메이저 124승의 박찬호를 만들지 않았을까요. 이승엽은 6월2일부터 포항에서 롯데와 대결합니다. 그가 400홈런을 쏘아올린다면, 그에게 정면승부한 투수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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