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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6월 03일 07시 55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6월 03일 14시 12분 KST

유토피아 이야기

미국 역사가 워런 와거는 <인류의 미래사>라는 책에서 지구의 미래를 그립니다. 서기 2,200년 지구축제일을 맞아, 116살의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홀로필름을 통해 1995년부터 2,200년에 이르는 인류의 역사를 들려 줍니다. 지구 200년의 미래사를 요약하면,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대화되어 3차 대전이 일어나고, 그 잿더미 위에 전지구적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며, 선거를 통한 '작은당'의 약진으로 사회주의는 해체되어, 결국 아나키즘적 세계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그 세계가 역사의 끝은 물론 아닙니다. 미래의 지구로 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해질 녘 몽골 사막 Ⓒ오원식

이상사회를 흔히 유토피아라고 부릅니다. 유토피아(utopia)는 그리스어인데, '유(u)'는 '없다(ou), 좋다(eu)'는 뜻을 가지고 있고, '토피아(topia)'는 '장소(place)'를 뜻합니다. 문자 그대로 풀면, 지금 여기에 없는 좋은 곳입니다. 여기에 없으니 먼 과거의 황금시대에 있었거나, 미지의 신대륙에 있거나, 도래할 미래의 시간에 만날 수 있는 것이겠습니다. 순진한 사람이 꿈꾸는 것이 유토피아입니다. 그런데 동서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꿈꾸어 왔습니다. 순진한 사람이 많은 까닭입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모어의 유토피아 섬에는 수도인 아마우로툼을 중앙에 두고 54개의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들은 모두 걸어서 하루 안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기초는 농업이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이 섬에서는 8시간을 자고, 6시간을 일하며, 나머지는 자유시간입니다. 도시의 중심에는 시장이 있는데, 주민들은 시장의 창고에서 물건을 필요한 만큼 무료로 가져갑니다. 물론 그 창고에 물건을 채워 넣는 것도 섬의 주민들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므로 더 소유하려고 다투지 않습니다. 유용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것에 돈을 낭비하거나 노동력을 허비하지도 않습니다. 황금은 변기로, 진주는 아이들의 장남감으로나 써야할 것들이죠. 잘 정비된 도시에는 집집마다 정원이 있고, 거리에는 회관이 있습니다. 도시마다 설치된 회관은 약 30세대, 400명의 구성원이 모이는 공동체의 장입니다. 사람들은 이 회관에 모여 함께 밥을 먹고, 공동으로 육아를 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의사결정은 민주적이며, 종교에 대한 완벽한 관용이 허용됩니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근현대의 공동체운동에 자극제가 됐습니다.

동양에도 유토피아에 대한 풍부한 상상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자 도덕경에 그려진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세계입니다. 무릉도원같은 곳이죠. 인위적인 다스림이 없는,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이 사는 사회입니다. 전쟁과 세금과 빈부격차가 없으며, 무엇보다 권력의 간섭이 없습니다.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쉬고, 밭 갈아 밥 먹고, 우물 파 물 마시니, 임금이 무슨 소용있냐라고 노래할 수 있는 세계죠. 배나 수레가 있어도 타지 않고,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쓸 일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문자 이전의 결승문자(끈을 묶어 뜻을 전하는 문자 아닌 문자)를 사용합니다. 밥은 달고, 옷은 아름답고, 거처는 편안하며, 풍속은 즐겁습니다. 개 짖고 닭 우는 소리가 들릴 만큼 이웃 나라가 빤히 바라보이지만,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 곳이기도 합니다.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같은 명당들이 무릉도원형 유토피아가 들어설 법한 공간입니다. 조용한 은둔의 세계지만, 현실을 되비추는 날카로운 거울이기도 합니다.

유토피아 이야기를 듣다 보면, 현실에서의 결핍을 상상 속에서의 해방과 위안으로 대신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현 가능할까라는 의문과 허황되다는 냉소도 가질 수 있죠. 유토피아적 상상이 현실변혁의 무기가 되고, 정신적 거울이 되곤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유토피아를 내세워 사기를 치기도 하고,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이 인간성을 파괴하는 디스토피아를 낳기도 했습니다. 유토피아를 좀 더 자세히 뜯어 보면, 역시 의식주가 인간사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답게 의식주를 해결하고, 고통 없이 장수하기를 바라는 욕망이 모든 유토피아적 상상에 투영되어 있습니다. 정의로운 사회, 정신적 자유, 자연 속의 목가적 삶도 의식주를 떠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유토피아는 가장 구체적인 일상의 삶에 대한 심적 설계도인 것이죠.

미국 역사가 워런 와거는 <인류의 미래사>라는 책에서 지구의 미래를 그립니다. 서기 2,200년 지구축제일을 맞아, 116살의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홀로필름을 통해 1995년부터 2,200년에 이르는 인류의 역사를 들려 줍니다. 편지, 칼럼, 공문서, 일기 등의 미래의 사료(史料)를 가지고 말이죠. 지구 200년의 미래사를 요약하면,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대화되어 3차 대전이 일어나고, 그 잿더미 위에 전지구적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며, 선거를 통한 '작은당'의 약진으로 사회주의는 해체되어, 결국 아나키즘적 세계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그 세계가 역사의 끝은 물론 아닙니다. 미래의 지구로 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극단의 시대. 이 시대에는 중산층이 완전히 무너지고, 양극화가 심화되며, 12개의 초거대기업들이 세계무역컨소시엄을 구성해 세계를 분할 지배합니다. 2038년부터 2043년 사이에 전 지구적 대공황이 발생하고, 대다수 국가의 실업률은 50%에 달하게 됩니다.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며 지구국가연합에서 탈퇴한 미국을 지구통합사령부가 리튬폭탄으로 공격하면서부터 3차 대전이 일어납니다. 이 전쟁으로 1년 동안 72억 명, 세계인구의 약 70%가 사망합니다. 이 시기에 달, 화성, 목성 등에 우주 정착촌이 건설되기도 하고요.

다음으로 사회주의가 지배하는 평등의 시대. 전후 파국을 맞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세계당이 출현합니다. 이들은 국가의 권위를 부정하고 완전한 세계화를 위해 투쟁하죠. 그리고 2056년 세계무역컨소시엄은 해산되고, 새롭게 세계연방이 구축되어 호주 멜버른을 수도로 정합니다. 세계연방의 목표는 3대 악(惡)인 종족주의, 자본주의, 성차별주의 근절입니다. 연방은 세계를 1,000개의 성으로 나누고, 각성에서 2명씩 총 2,000명으로 인민의회를 구성합니다. 인민의회에서 행정요원 50명을 선발하면, 이 행정요원의 대표가 연방의 대통령이 됩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사람도 급여를 받았고, 가장 잘 사는 성은 가장 못 사는 성의 소득을 두 배 이상 초과할 수 없었으며, 각 개인별로도 소득격차가 두 배를 넘지 못하게 규제했습니다. 그러나 세계연방도 유토피아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세계당의 독재에 염증을 냈고, 개인의 창의와 자유에 목말라했습니다. 가족도 해체돼 뿔뿔이 흩어졌죠. 이 시기에 유전자 조작으로 가장 똑똑한 인간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아나키즘적 자유의 시대. 세계연방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은 2147년 선거에서 '작은당'을 제1당으로 선출합니다. 작은당은 유전자 조작으로 등장한 가장 똑똑한 인간들이 만든 당입니다. 세계연방은 무너지고, 세계는 자치, 자율, 자연을 기치로 한 작은 세계로 재구성됩니다. 슈마허, 타고르, 간디 등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작은당은 스스로 표방한 가치에 입각해 자발적으로 해체되며, 인류는 정부 없는 지배의 시대를 엽니다. '지구의 집'을 이루는 각각의 공동체들은 대부분 직접민주제를 채택하지만, 대의민주제나 군주제를 채택하기도 합니다. 자발적 선택에 따라 어떤 공동체도 만들 수 있습니다. 올림픽 경기도 부활하는데, 이제는 국가대표선수들의 경기가 아니라, 개인 대 개인의 놀이가 됩니다. 정신적으로는 생태신비주의가 부상해 자기(ego)의 부정을 실천합니다. 생태신비주의자들은 우주는 살아있는 존재로서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고 보며, 전체 의식 외에 자기라고 부를 것은 없습니다. 또한 물질은 정신이 우리 감각중추에 투사한 영상같은 것이라고 인식하며, 자연에 순응하는 삶, 소박한 테크놀로지를 강조합니다. 이들은 예술 작업도 익명으로 합니다. 우주 정신 전체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죠. 예술 속 자신의 이름은 무의미합니다. 결혼 역시 무의미해져서 가족은 완전히 소멸합니다. 이에 따라 여성이 지배적 성으로 부상하여 남성차별 논란을 낳기도 합니다. 우주사업이 발달해 인류의 절반이 우주에서 살리라 예상되고, 의학적으로는 쌈사라 프로젝트가 실행되어, 인간의 의식을 복제 인간에게 심어 영생을 사는 기술이 풍미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가 역사의 끝은 아닙니다. 역사는 지속되고, 유토피아에 대한 논쟁도 첨예합니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지금 여기에 없는 좋은 세계이기 때문이죠.

할아버지에게 미래사를 모두 듣고 난 후 손녀는 말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공동체주의를 만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세계 질서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우리가 세계 질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 질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말이죠. 유토피아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위해 존재하죠. 날마다의 우리 일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심적 설계도가 유토피아입니다. 지금 여기의 소박하고 때로 초라하기까지 한 일상적 순간은 사실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음으로 넘길 수 있는 삶도 없습니다. 매순간이 마지막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리가 있습니다. 부처의 자리, 예수의 자리, 무위자연의 자리. 우리가 늘 돌아가서 지금 여기를 살펴 보아야할 자리, 거기서부터 꿈꾸게 되는 자리. 하늘 아래에 있지만, 먼지로 가득한 속세보다는 높은 언덕같은, 유토피아는 그런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현실에 갇히지 않는 상상을 하는 사람들이 좋은 삶,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 칼 야스퍼스가 말한 기축 시대 현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소량의 효모가 빵 전부를 발효시킵니다. 그들의 빵으로 우리 정신은 풍요로워졌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제로베이스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쉬는 명상, 자연과의 교감, 순수한 몰입의 예술, 이런 것들이 제로베이스로의 회귀를 도우는 효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거기서부터 좋은 삶, 좋은 세상이 발효되지 않을까하는 바람에서입니다. 노자 도덕경에는 수레바퀴의 비유가 있습니다. 수레바퀴는 그 중심이 비어 있어야 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수레바퀴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중심이 빈 수레바퀴처럼, 우리 욕망이 굴려놓은 세상의 속도를 늦추고, 빈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일상을 살아갈 지혜과 감성과 용기가 생기기라 믿습니다. 자연에 더 가깝고, 밥은 달며, 옷은 아름답고, 거처는 편안하며, 풍속은 즐거운, 우리 모두가 아버지이고 자식인 세상.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no where)입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그 곳은 지금 여기(now here)이기도 합니다.

PRESENTED BY 호가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