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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TV, '음식 포르노'를 배설하다

  • 남현지
  • 입력 2015.05.30 14:23
  • 수정 2015.05.30 14:24

의 한 장면." data-caption="2015년 대한민국의 티브이는 좋다는 재료에 조미료까지 가득 친 거대한 ‘냄비’ 상자가 되었다. 요리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이 범람하고 드라마의 소재조차도 셰프와 요리로 쏠리고 있다. 매회 마지막 극중 주인공이 요리법을 알려주는 문화방송 <맨도롱 또똣 >의 한 장면." data-credit="MBC">

[토요판] 안인용의 ‘좋아요’가 싫어요

‘좋아요’가 싫다. 엄지손가락도, 하트도, 별표도 싫다. ‘좋아요’는 더이상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다. 긍정적인 감정이 느껴진다면 누르라고 있는 버튼일 뿐이다. 버튼을 누르는 간단한 동작으로라도 ‘좋다’는 감정을 드러내도록 한 건 괜찮다. ‘좋아요’ 버튼의 편의성 덕분에 ‘왜 좋은지, 뭐가 좋은지, 어떻게 좋은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게 된다는 게 문제다. ‘좋아요’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싫어요’다. ‘싫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버튼으로 만들 경우 그에 따른 불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는 바람에, 감정은 균형을 잃었다. ‘좋아요’ 옆에 ‘싫어요’ 버튼을 놓자는 얘기가 아니다. ‘싫어요’에 대해서도 ‘왜 싫은지, 뭐가 싫은지, 어떻게 싫은지’에 얘기해보자는 거다. 그러다 보면 ‘좋아요’로 기울어진 세상의 균형을 조금이라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먹방’이 싫다, ‘쿡방’도 싫다

2015년의 대한민국의 티브이는 거대한 ‘냄비’다. 좋다는 재료부터 조미료까지 가득 넣고 센 불로 팔팔 끓여대는 냄비 말이다. 지금의 티브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먼저 요리사들은 일주일 내내 조리대에 서서 요리를 하며 경쟁을 하거나 요리법을 알려주느라 바쁘다. 기초반부터 자취반, 고급반 등 과정도 다양하다. 요리사들은 유명인을 넘어 연예인의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으며,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화제가 된다. 지난 5월25일치 제이티비시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해 꽁치를 넣은 샌드위치를 선보인 맹기용 셰프는 사흘이 넘도록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했다. 연예인들은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음식을 먹고 리액션을 하느라 바쁘다. 요리를 내세우지 않은 일반 예능프로그램에서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음식을 만들거나 먹는다.

요리와 관련된 직업을 가진 캐릭터나 요식업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도 쏟아진다. 문화방송 드라마 <맨도롱 또똣>에서는 매회 마지막에 극중 레스토랑 오너 셰프인 남자주인공이 등장해 요리법을 알려준다. 최근 종영한 한국방송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는 마지막회에서 주인공들이 극중 요리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하반기에는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 한국판을 비롯해 요리 관련 웹툰을 원작으로 한 네 편의 드라마가 준비중이란다. 종편에서는 존재하는 거의 모든 음식에서 지금 당장 먹어야 하는 영양분을 찾아내고 이에 대한 요리법을 장수 비결로 귀띔한다. 요즘 눈에 띄는 광고는 다 음식 배달 애플리케이션 광고인데, 그 짧은 광고에서도 먹는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주일 내내 지상파, 종편, 케이블 채널 가리지 않고 먹방이나 쿡방을 내보내는 지금의 이 편성표를 어떻게 봐야 할까. 시청률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릴 수 있는 아이템이라면 뭐라도 가져다 쓰고 싶은 게 제작진의 마음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천편일률적인 티브이를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해까지만 해도 먹방과 쿡방이 대세가 된 상황에 대한 설명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집이나 자동차 같은 중산층의 필수조건을 갖추는 데 실패한 젊은 세대의 결핍된 욕망 분출이라든지, 늘어난 일인가구로 인한 사회적 현상이라든지, 성취감이 사라진 시대에 유일하게 남은 만족감과 힐링의 방법이라든지, 일정 수준의 경제력을 갖춘 이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든지, 에스엔에스(SNS) 등 커뮤니케이션의 변화와 연계해 나타나는 문화현상이라든지. 그런 이유로 인해 먹방과 쿡방이 공감대를 얻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편성표를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드라마·예능 할것 없이 먹방·쿡방

맥락도 욕망에 대한 고민도 없이

식욕이란 버튼 누른다, 시청률 위해

정보제공 가면 쓰고 노골적 홍보

시청자는 자금 대주는 소비자일뿐

냉장고 말고 TV를 부탁할 때다

납득이 가능한 설명은 단 하나다. 저기에서 하니까 여기에서도 한다. 이쪽에서 반응이 좋으니까 저기에서도 한다. 그것뿐이다. 지금 요리를 다루는 프로그램은 각자의 키워드와 요리를 기계적으로 조립하는 수준이다. 티브이엔 <뇌섹시대-문제적 남자>는 강레오 셰프를 초대해 출연진에게 ‘애인을 오늘 밤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창의적인 음식을 만들라’는 미션을 줬다. 한국방송 <해피투게더3>은 빅뱅을 초대해서 폐지된 코너 ‘야간매점’을 되살렸다. 한국방송 <출발 드림팀 시즌2>도 3주 동안 ‘음/식/전/쟁 실미도 와일드 셰프’ 특집을 내보냈다. 요리 관련 프로그램에 요리하는 이는 셰프건 출연자건 남성 일색인 것마저 똑같다. 이를 양성평등과 연관시키는 것도 낯간지럽고 민망하다. 요리하는 남성의 모습이 신기해서, 그리고 차승원이 뜨고 최현석과 백종원이 인기를 끄니까, 이 두 가지 이유가 전부다. ‘집밥’이나 ‘엄마의 손맛’ 같은 감성이 필요할 때만 여성을, 아니 엄마를 부른다. 농사나 유기농 같은 전원 냄새 물씬 풍기는 ‘신토불이’스러운 아이템을 들고나오기도 하지만 결국 ‘킨포크’식으로 소비될 뿐 그 안에 진짜 먹거리에 대한 고민을 찾을 수는 없다. 게으른 티브이가 만든 지루한 풍경이다.

점점 자극적이 되어가는 먹방과 쿡방은 음식 포르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욕망을 원초적으로 자극하는 포르노와 지금의 요리프로그램이 보여주는 화면은 크게 다를 게 없다. 밝은 조명 아래 고화질의 카메라로 먹음직스럽게 촬영한 요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나도 모르게 침이 고인다. 예쁜 그릇에 담긴 음식이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고 소리를 내며 음식을 먹는다. 음식을 먹은 이는 음식의 맛을 보여주는 몇 가지 표정을 지으며 “와!” “음!” 같은 감탄사를 연발한다.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익숙한 배경음악이 깔린다. 또다시 침이 고인다. 그 모습이 대단히 아름답거나 재미있어서가 아니다. 본능을 자극하도록 연출됐기 때문에 저항할 방법이 없다. 요리하거나 먹는 모든 장면이 포르노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 장면이 필요할 때도 물론 있다. 자극과 흥분에서 그치지 않고 그래서 그 욕망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 살피며, 그 욕망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런데 지금의 먹방과 쿡방에 ‘맥락’이 있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나? 지금의 티브이는 시청률을 위해 식욕이라는 본능의 버튼을 누르는 것뿐이다.

빅뱅이 출연한 <해피투게더3> 야간매점

내가 돈으로 보이니

먹방과 쿡방은 시청자를 소비자로 바라본다. 시청자가 소비자가 되고 간접광고라고 쓰고 직접광고로 읽은 건 꽤 오래된 이야기지만, 먹방과 쿡방은 그 시선이 더 노골적이다. 씨제이 이앤엠 등 식품회사가 모기업이거나 연관되어 있는 경우 음식과 관련된 장면에는 씨제이 제품으로 대거 등장한다. 신제품이나 주요 제품을 활용하는 요리법도 ‘정보’라는 포장지로 예쁘게 싸서 보여준다. 지난 5월22일치 <삼시세끼>는 강아지인 밍키가 사료를 먹는 장면에서도 밥 먹는 밍키 옆에 씨제이 사료를 브랜드가 잘 보이도록 세워뒀다. 씨제이가 두드러질 뿐이지 다른 채널의 요리프로그램도 제품 광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종편에서 장수 비결 요리법이나 건강식품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끝나고 채널을 돌리면 바로 옆 채널 홈쇼핑에서 바로 그 제품을 판다.

소비자가 돈을 쓸 데가 제품만 있는 건 아니다. 요리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셰프들이 운영하거나 일하는 식당, 연예인들이 운영하는 식당, 그 외에 ‘죽기 전에 가봐야 하는 맛집’이나 ‘연예인들이 자주 찾는 핫플레이스’로 소개되는 수많은 식당들이 있다. 방송을 타면 줄이 길어진다. 시청자에게 티브이에 소개된 그 식당에서 뭔가를 먹는다는 것은 음식 그 이상의 의미다. 티브이가 소개하는 주류문화를 돈과 시간을 쓰면서 직접 체험하고 그 안에서 또다른 만족감을 느낀다. 그런데 지금 티브이가 소개하는 식당들이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까다로운 검증을 통해 소개하는 식당들도 있지만 ‘유명해서’ 유명해졌거나 연예인의 명성 때문에 유명해진 이름만 있는 식당도 꽤 많다. ‘핫’한 골목에 그럴듯한 인테리어를 하고 외국에서 가져온 아이템으로 장사를 하면서 티브이나 잡지,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노출로 손님을 모아 동네 상권을 만들고 임대료가 오르면 빠지는 그런 식당들 말이다. 유명 셰프들 중에는 “방송 후에 오히려 매출이 하락했다”, “원래 잘됐던 곳이라서 큰 영향은 없다” 같은 얘기를 하지만 대부분 하나마나한 얘기다. 새로운 브랜드를 내고, 분점을 내고, 홈쇼핑에 진출하고, 대기업과 손을 잡고, 티브이 광고를 찍는다. 요식산업의 역군들이다. 그 자금을 대는 건 티브이를 보면서 군침을 삼키는 시청자들이다.

음식 앞에서 티브이가 품격을 잃었다. 양심도 잃어간다. 요리프로그램을 통해 대단히 의미있는 걸 찾아내라는 것도, 깜짝 놀랄 만큼 새로운 기획의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웃음과 재미를 만들어내는 최소한의 선을 지키자는 얘기다. 냉장고를 부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먹방과 쿡방으로 가득한 티브이를 부탁해야 할 판이다. 고민 없는 티브이는 금세 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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