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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시인이 노래하는 어머니의 붉은 사랑

"세상 사는 거 별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어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줄 것이다. 별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 박균호
  • 입력 2015.06.02 11:15
  • 수정 2016.06.02 14:12

나에게 가장 담대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애끓는 모정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을 떠올리라고 한다면 이미륵을 꼽아왔다. 그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는 서정적인 한국의 풍습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나는 자식을 머나먼 타국으로 떠나보내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어머니의 작별인사로 이 소설을 기억한다.

"너는 종종 낙심하는 일이 있었으나, 그래도 네 일에 충실했었다. 나는 너를 크게 믿고 있다. 그러니 용기를 내거라. 너라면 국경을 쉽게 넘고, 결국 유럽에도 도착할 수 있을 게다. 내 걱정은 하지 말아라.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겠다. 세월은 빨리 가느리라. 비록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너무 서러워 말아라. 너는 나에게 정말 많은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자, 애야! 이젠 네 길을 가거라!"

올해 나는 아들에 대한 사랑은 깊지만 의연한 어머니의 내면을 노래한 또 다른 책을 만났다. 시인이자 페이스북 스타인 림태주의 <그토록 붉은 사랑>이 그 주인공이다.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중략)

세상 사는 거 별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어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줄 것이다. 별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산문집 [그토록 붉은 사랑] 봄편 맨 첫 장에 수록된 림태주 시인의 '어머니의 편지'를 강원도의 서양화가 백중기의 작품을 배경으로 성우 정남이 애틋한 목소리로 낭독했다.

<그토록 붉은 사랑>의 저자 림태주는 데뷔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 번듯한 시집이 없는 이른바 무명시인이다. 그러나 그는 수천명의 팬클럽을 보유한 유명작가이자 대중적인 인문서를 표방하는 소신 있는 출판인이기도 하다.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홍보할 목적으로 시작한 페이스북에서 그가 스타가 된 이유는 자명하다. 책의 홍보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우선이다라고 생각했고, 특유의 명랑한 필체와 감성적인 언어로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앞부분에 소개된 어머니의 편지가 수백만 명의 네티즌들의 눈시울을 적시고 공감을 얻어냈지만 정작 내가 림태주 시인의 글 중에서 내 것으로 훔치고 싶은 글은 따로 있다.

저번에 네가 나에게 책 한 권 보내 달라고 했다. 요즘 가계 지출이 많아서 내 책을 못 샀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나는 책을 사서 정성스럽게 사인까지 해서 너한테 보냈다. 그런데 너는 그날 여직원들이랑 떼거리로 앉아 광고 사진처럼 비주얼 쩌는 팥빙수 먹방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려놓았더구나. 여직원들이 너를 최고라고 치켜세운 댓글도 수두룩 달린 걸 봤다. 아무렴, 네가 사정없이 쐈으니 최고였겠지. 그날 나는 결심했다. 올여름이 아무리 푹푹 찌고 졸라리 더워도 팥빙수는 절대 입에 대지 않기로.

이 대목은 예전에 시인의 페이스북에서 이미 봤다. 웹상에서 본 글을 종이책으로 다시 만나면 일반적으로 '아, 그 이야기구나'라고 생각하고 페이지를 빨리 넘기기가 보통이었던 나는 예외적으로 이 글은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정겨움이 느껴져서 한참 동안이나 머물렀다. 평범한 일상을 그린 이야기도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림태주 시인 때문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글은 항상 탐나고 잠시 동안이나마 나의 글로 훔쳐오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산문으로 풀어 쓴 시라고 생각되는 그의 글들이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으로 나뉘어 실려있다. 이 책에 실린 글을 굳이 산문이라고 가둘 필요는 없다. 독자에 따라서 시로도 읽히고, 코미디 프로그램의 대본으로도 여겨지고, 첫사랑에게 보내는 연서라고도 느껴지는 게 이 책의 매력이다. 그가 써온 19편의 시를 별도로 실었는데 남다른 것은 '시인의 말'의 형식으로 자신의 시에 대한 친절한 안내를 덧붙였다는 점이다. 시는 일반적으로 비평가나 독자들에의 해서 해석되는 것이지 점잖지 못하게 시인 자신이 자신의 시를 안내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면 관례인데 개인적으로 신선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이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시의 속삭임을 '진짜로' 들려주기 위해 성우 정남의 목소리를 빌려 시낭송 음원 12편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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