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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소곡주 들고 군산 다녀오세요

  • 박세회
  • 입력 2015.06.01 06:55
  • 수정 2015.06.01 12:10
ⓒ한겨레

여행이라고 해봐야 남는 건 사진뿐인데 사진 찍기를 즐기지 않아 보통은 풍광보다는 먹을거리를 찾아다닌다. 물꽁식당의 아귀간과 신발원의 만두를 먹기 위해 부산행 KTX를 타고, 군만두를 먹으러 송탄까지 차를 몰고 가는 게 내 여행의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오로지 시각적 경험을 위해 찾는 곳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군산항이다.

물론 군산항만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운전하는 건 아니다. 군산으로 가는 길목에 겨울의 술 소곡주를 살 수 있다는 게 어찌 보면 더 큰 이유일 수도 있다. 소곡주 마을로 유명한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일대에는 전통 깊은 한산 소곡주 명인의 공장이 있다.

전화를 하고 가면 이곳에서 익어가는 소곡주를 견학하고 맛볼 수도 있다. 공정화되지 않은 형태의 ‘밀주’를 파는 가호도 있다. 아는 집에 전화를 걸어두는 편이 안전하지만, 번호를 모르면 그냥 잠시 기다리면 된다. 서울에서 온 세단들이 줄지어 향하는 집이 바로 술 빚는 집이다. 이런 가양주는 집집마다 다른 곰팡이로 술을 빚어 향도 다르니 여러 집에서 한 병씩 사서 비교해 보는 것도 좋다. 다만 소곡주는 한성으로 과거 보러 가던 선비도 눌러앉혀 필름이 끊기게 만든다는 ‘앉은뱅이 술’로 유명하니, 입도 대지 않은 채 트렁크에 넣어두고 군산으로 향한다.

군산항에 도착하면 그 거리의 압도적인 쓸쓸함에 ‘대체 여길 왜?’라며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군산항은 근대의 축복을 듬뿍 받고 현대사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지역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의 군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복한 도시였다. 조선에서 가장 먼저 개항한 덕에 신문물의 혜택 역시 제일 먼저 받았다. 일찍이 외국인들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 할 수 있도록 조계지를 설정했다. 신식 관청과 은행이 세워지고 부유한 상인들이 저택을 지었다.

지금 '근대문화 역사의 도시'라고 이름 붙인 군산항 바로 앞에 조그만 일본식 소도시가 형성됐고, 어마어마한 돈이 돌았다. 그곳이 바로 호남평야 양곡 수탈의 본거지가 됐다.

해방 이후 군산은 태평양을 향한 열망으로 경부에 집중된 관심 탓에 쇠락했다. 당시의 건물들은 시간을 고스란히 머금고 박제됐다. ‘근대 역사의 거리’라는 이름으로 새 단장을 하고 관광객 유치에 힘을 쏟고 있지만, 사람들이 그리 많이 찾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리 많이 찾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이곳을 찾는 가장 큰 이유다.

해만 지면 그나마 있던 사람들도 떠나고 거리가 텅텅 빈다. 저녁 무렵, 박제된 건물들로 둘러싸인 도로 한복판을 걷자면 마치 다른 시대, 다른 시간으로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어 완벽한 의미의 외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에서 산 빵을 우적우적 씹으며(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 줄이 서 있으면 패스) 만들어진 관광지를 산책하는 시간은 고작 한 시간 남짓.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 초원사진관에 들러 다림이를 한번 보고 바로 앞 한일옥에서 이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뭇국 한 그릇을 먹는다.

돌아오는 길에는 서남쪽으로 한 시간 거리인 완주에 잠시 들러 수왕사의 주지 스님에게만 전승되는 비법으로 담그는 송화 백일주를 사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현 주지인 벽암 스님은 대부분 수왕사 산중에 있어 만날 수 없지만 스님의 제자가 술을 내어주니 걱정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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