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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시대의 책 수집가

헬렌 한프는 무려 20년간 런던의 조그마한 고서적 전문 서점 마크스의 직원 프랭크 도엘과 편지를 주고 받는다. 말이 편지지 엄밀히 말하면 헌책을 거래한 내역에 지나지 않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은데 정감이 넘치고 심지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뉴욕의 가난한 독자와 전시를 겪으면서 궁핍했던 런던의 헌책방의 눈물겨운 우정은 편지를 주고 받은 당사자인 프랭크 도엘이 사망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20년간의 우정을 인연으로 런던을 방문해달라는 서점 직원의 제안도 가난한 뉴욕의 작가는 끝내 응하지 못한 채로 이 세상을 떠났다.

  • 박균호
  • 입력 2015.05.27 14:37
  • 수정 2016.05.27 14:12

내가 희귀본 수집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당시 헌책매니아들 사이에서 떠오르는 must have item인 <최순우 전집>을 구할려고 사방팔방으로 나대고 있었는데 용케도 그 보물을 선뜻 양도하겠다는 수집가를 만났다. 놀랍게도 그는 다른 사람은 구경도 못하는 그 보물을 하드커버와 소프트커버 두 종류를 모두 소장하고 있었다. 나름 그 바닥에서 내로라하던 나도 하드커버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어쨌든 그와 거래를 마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헌책방 마니아의 자격증쯤으로 여겨지던 신영복 선생의 옥중 서간집 <엽서>가 화두로 떠올랐다. 2003년 개정판이 나오기 전의 일인데 어쩐 일인지 그도 그 책 만큼은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엽서>가 언젠가는 반드시 재출간되리라 예상하였고 그는 그때 그 책을 사서 읽으면 되지 비싼 돈을 들여서 당시 희귀본인 헌책으로 애써 구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의 지론은 그랬다. 책이라는 것은 콘텐츠만 향유하면 되지 굳이 희귀본 버전을 구하려고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겠단다.

나 역시 그의 주장에 동의를 했고 우리는 희귀본이라고 하면 사족을 못쓰는 뭇 수집가들의 행태를 비난하면서 대화를 마무리 했다.

그날 밤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개인과 개인간 헌책거래 사이트에서 내가 오매불망하던 신영복 선생의 <엽서>가 매물로 나왔다. 그것도 무려 초판이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었다. 헌책 마니아라면 누구나 탐내는 보물중의 보물이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그 책을 사겠다는 댓글이 우수수 달렸는데 그 중에서 낯익은 아이디를 하나 발견했다. 그날 낮에 희귀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수집가들의 행태를 나와 함께 신랄하게 비판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너무 급하게 남기는 바람에 오타가 여럿 보이는 그의 댓글은 이랬다.

"서울인가요? 저도 서울인데 지금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결론은 어찌되었을까? 최종승자는 그가 아닌 나였다. 나의 댓글은 간단 명료했다. "입금했습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희귀본 수집가들은 집요하며(절판본을 구하겠다고 출판사를 직접 찾아가기도 한다), 탐욕스럽다(자기가 구하던 책도 아닌데 다른 사람이 구하려고 노력하면 일단 그 책을 사 놓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 소박한 수집을 하면서도 다른이에게 감동을 주는 착한 수집가의 이야기가 있다.

<채링크로스 84번지>는 책을 사랑하지만 가난한 뉴욕의 소설가 헬렌 한프와 영국 런던의 고서점 직원 프랭크 도엘이 주고 받은 편지를 모은 글이다. 희귀 고서적을 좋아하지만 가난했던 헬렌 한프는 우연히 광고를 통해서 고서적을 전문으로 다루는 런던의 마크스 서점을 알게 되었고 평소 자신이 구하고 싶었던 희귀본 목록을 보냈다.

첫 거래에서 자신의 희망목록 2/3를 해결한 헬렌 한프는 무려 20년간 런던의 조그마한 고서적 전문 서점 마크스의 직원 프랭크 도엘과 편지를 주고 받는다. 말이 편지지 엄밀히 말하면 헌책을 거래한 내역에 지나지 않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은데 정감이 넘치고 심지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가령 다음 대목들이 그렇다.

햄도 유대 율법에서 금하는 음식에 들어가나요?

지금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있어요.

어떡하면 좋아요. 1949년 12월 9일. 헬렌 한프.

크리스마스 선물로 좋은 것을 보내주셔서 고마워요.

헬렌,

당신은 참 친절한 사람이에요!

내년에 당신이 왔을 때 마크스 서점 사람들이

잔치를 열어 주지 않았다면,

흠 총을 맞아도 싸죠. 1952년 12월 17일. 프랭크 도엘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혹 채링크로스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시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뉴욕의 가난한 독자와 전시를 겪으면서 궁핍했던 런던의 헌책방의 눈물겨운 우정은 편지를 주고 받은 당사자인 프랭크 도엘이 사망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20년간의 우정을 인연으로 런던을 방문해달라는 서점 직원의 제안도 가난한 뉴욕의 작가는 끝내 응하지 못한 채로 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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