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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된 죽음, 성스러운 근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죽었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직접 경험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죽음의 처리 과정이 시작됨과 동시에 선택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도 선택할 수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과정이 시작됨과 동시에 '장례지도사'가 친절히 도와준다. 매뉴얼에 따라 해야 할 것들을 설명해준다. 그리고 관부터 시작해서 자질구레한 물건들까지 등급이 정해져있다. '장례지도사'가 유족의 곁에 와서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고 묻는다. 이 현장에서 '흥정'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건, 왜일까?

  • 정일영
  • 입력 2015.05.29 08:01
  • 수정 2016.05.29 14:12

<밑줄 긋기> 『죽어가는 자의 고독』, 노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김수정 옮김, 문학동네, 2012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16일 오후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조명탄으로 주변을 밝히면서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다. 진도/ 한겨레신문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대체로 중세 사회에서의 삶은 짧았고 지금과 비교할 때 위험은 통제 불가능했고 죽음은 고통스러웠으며, 사람들은 죄의식과 사후의 처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어쨌든, 한 개인이 죽어갈 때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특정 경우에는 죽음의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다. 죄불안은 완전무결하다시피 억압되었고 거의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종교단체들은 지옥의 공포를 통해 지배력을 구축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개인의 죽음에 다른 사람들이 관여하는 정도도 줄어들었다.

1. 죽음은 일상이다

"죽음은 일상이다."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일상'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생각해볼 때, 이 단어와 '죽음'이라는 단어 사이의 간극은 도저히 연결할 수 없을 정도의 거리로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 인생은 죽음에서 빌린 차용금과 비슷한 것이고, 수면은 이 차용금에 지불되는 매일의 이자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한 쇼펜하우어의 말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일상적인 죽음'이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형용모순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죽음은 비일상적인 것일까? 인간이 태어나면 단 한 번밖에 죽을 수 없으니, 죽음은 비일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죽음' 이외의 죽음을 말하자면, 죽음이 일상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의 결혼이야 인생에 중요한 일일 테지만, 주말마다 전국의 수많은 결혼식장에서 진행되는 결혼식은 일상적인 일이다. 이 결혼식보다 훨씬 더 '일상적'인 행사가 바로 장례식이다.

통계청의 최근 자료에 의하면, 2013년 한 해 동안 전국의 사망자 수는 266,257명이었다. 단순 계산을 하면, 하루에 729명의 사람이 죽는 것이다. 죽음은 의외로(?) 우리의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게임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이런 가상의 죽음이 아니더라도 뉴스만 보면 많은 죽음을 접할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죽음은 도처에 널려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1933년 식민지 조선에서의 사망자 수는 몇 명이었을까?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통계에 의하면, 401,322명이다(《조선총독부통계연보》 참고. 이 숫자에는 8,359명의 일본인, 295명의 외국인이 포함되었다). 당시 인구가 현재의 인구보다 더 적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식민지기의 죽음은 일상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2. 세속화된 죽음

식민지기의 죽음을 일상이라고 할 수 있다면, 식민지기의 일상을 덮쳤던 근대의 거대한 물결이 죽음의 영역에도 몰아쳤음을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죽음은 예의 영역, 혹은 풍수의 영역에서 다루어졌다. 이 둘의 영역은 그 뿌리가 완전히 다르다고 볼 수 있으나, 죽음을 성스럽게 다룬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경외'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다. 전통시대의 생자(生者)들은 사자(死者)를 공경하기도 했고 무서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식민지기에 죽음은 급속도로 세속화되었다. 죽음이 종교의 영역에서 빠져나왔다는 의미에서의 '세속화'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죽음은 근대를 통해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이동해버렸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근대의 죽음은 자본에게 종속되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墓地火葬場埋葬及火葬取締規則>를 발포한 이후, 한국에는 이전까지 없었던 공동묘지와 화장장이 등장했다. 문제는 이런 새로운 사자공간(死者空間)이 만들어진 뒤, 그 공간에 '가격'이 매겨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좋은 묏자리, 즉 명당을 구하기 위해서는 풍수사에게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물론 그 명당에 대한 비용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가 '정가'로 환산되어 가격표로 제시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이제 근대인들은 죽은 이를 묻거나 태우기 위해 등급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등급은 일방적으로 정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선택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1913년 12월 10일에 경성부청에서 부면장들이 모여 공동묘지와 화장장에 관한 회의를 했는데, 여기에서 결정한 공동묘지 및 화장장의 요금은 다음과 같다.

1등지 1평에 4원 이내

2등지 1평에 2원 이내

3등지는 무료로 하되, 일족, 합장 또는 동일 信徒가 일정의 구역을 지으면 분묘의 면적 1평을 초과하는 경우 1등지 1평에 6원 이내, 2등지 4원, 3등지 2원.

《매일신보》 1913. 12. 10, "共同墓地와 協議"

화장료는 15세 이상 4원 이하 2원(민단역에 관련된 자는 예외).

《매일신보》 1914. 3. 20, "墓地料 火葬料"

장지(葬地)에 등급을 정하고 그 등급에 해당하는 돈을 받는다는 것은 이제 죽은 이에게도 등급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그에 따라 죽은 이의 가족에게도 등급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후자일 것이다. 어차피 죽은 자는 자신이 어떤 등급의 장지에 묻히는지 알 리가 없으니까. 아무리 유언을 남긴다고 하더라도, 결국 죽은 자를 묻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이다. 이제 고인을 떠나보낸 자들의 애통함과는 별개로, 살아있는 자의 경제력이 애도의 정도를 증명했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등급은, 효의 등급까지 결정할 수도 있었다. 이제 돈이 없으면 제대로(?) 죽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점차 심해져서 나중에 묘지관리자나 매장을 하는 노동자에게 돈을 건네지 않으면 제대로 매장을 못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즉, 자본이 죽음의 처리 과정에도 장악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매장만이 아니었다. 화장에도 자본의 논리가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1930년 경성부는 화장이 증가하는 "추세에 응하기 위해" 기존에 5원이던 화장 요금을 3원으로 내리고 빈곤한 이들에게는 무료로 화장을 해주기로 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화장료를 인하하여 매장이 아닌 화장으로 유도한 정책은, 당시 매장과 화장 사이의 위계를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화장을 택할 가능성이 높았음도 보여준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가족을 불로 태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이제 경제적인 이유로 화장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매장과 화장 사이의 위계를 결정지은 것은 결국 돈이었다. 이 시기에 진행된 자본의 침투는 오늘날까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 위력은 더욱 강해졌다.

3. 성스러운 근대

이렇듯 근대의 죽음을 세속화시킨 것은 근대 논리, 그 중에서도 자본의 논리였다. 문제는 자본으로 대표되는 이 '근대'가 죽음을 세속화시키면서도 자신은 점점 성스러운 존재가 되어갔다는 점이다. 식민지기 내내 한국인의 묘지는 골칫거리였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인들이 묘지로 아까운 땅을 낭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간단히 무덤을 옮기기만 하면 금광을 개발할 수 있는데, 한 문중 전체가 들고 일어나 반대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비단 조선총독부만의 시각은 아니었다. 조선 지식인이나 언론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이 미개한 조선인의 풍습을 공격하고, 길들여야 했다. 그것을 위한 가장 좋은 논리는 바로 경제, 돈이었다. 그리고 돈은 곧 문명이었다. 성스러운 문명.

도시 외곽에 공동묘지나 화장장이 설립되었다. 가장 지대가 싼 지역이었다. 당연히 공동묘지 및 화장장 주변에는 가난한 이들이 살았다. 오늘날의 님비현상처럼 공동묘지, 화장장 설립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현상에 의해 점차 죽음, 죽은 자, 죽은 자의 공간은 노골적인 거부의 대상이 되었다. 어쩌면 공동묘지와 화장장 옆에서 가난한 이들이 살았던 것은 근대의 논리로 보자면 매우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사회적 층위에서 죽은 자가 가장 밑에 있다면, 그 바로 위에 위치할 존재들이 바로 가난한 자일테니까.

죽은 자는 당연히 뿌리를 박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의 도시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덩치를 키웠고, 약자와 빈자를 밀어냈다. 그들을 밀어낸 공간의 가격은 치솟았다. 그 높은 가격의 땅에 죽은 자가 있다는 건 신성모독이었다. 다시 죽은 자는 밀려났다. 1930년대 중반 이태원 공동묘지의 분묘를 망우리로 이전시키고, 이태원에는 재개발을 통해 주택지를 만들었던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의 논리, 자본의 논리라면 죽은 자 또한 무서울 것이 없었다.

화장은 또 어떠했는가? 식민지의 '근대인'들은 화장을 칭송했다. 화장은 경제적이고 위생적이며 문화적이었다. 화장률의 증가는 문명화 진척의 증거였다. 문명 운운했으나 결국 토지를 잠식하지 않는 사자처리 방식으로서의 화장을 권유한 것이었다. 1933년 경성의 화장료는 15세 이상 특등 15원, 1등 8원, 15세 미만 특등 15원, 1등 4원으로 책정되었다. 15세를 기준으로 가격이 달라진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시체의 크기에 따라 태우는 시간이 달라지고 연료의 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한국에서 화장 자체가 하나의 장법으로 여겨지지 못했던 탓도 있지만, 어쨌거나 죽은 이를 보내는 과정이 이제는 하나의 공정이 되었다. 이런 기준이라면 화장장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더 빨리 많은 시체를 태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신문에 게재된 화장장의 모습이 공장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오해가 아니라 실체를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억지로 그려넣은 것처럼 보이는 화장장 굴뚝의 연기는 이러한 인식을 반영한다.

《동아일보》 1924. 4. 22, "城壁을 隔한 別世界" 기사 중 신당리 화장장의 모습

4. 죽음은 일상이 아니다

2014년 4월 16일. 한 척의 배가, 서서히, 침몰했다. 하루에 7백 명이 죽는다는 것을 앞서 확인했지만, 그날 바다에서 발생한 온 국민이 지켜 본 295명의 죽음을 두고 일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작년 4월 동안은 그러했다. 그러나 어느 틈에 그 '비일상'이 '일상'의 힘에 눌리기 시작했다. 지겹다고 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비싼 세금을 들여 침몰한 배를 인양하는 것은 낭비라고들 했다. 보상금이 얼마냐고 대놓고 물었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보상금을 따내기 위한 생떼로 여겨졌다. 이렇게 시끄럽다가 한 순간에 아예 사회적 이슈에서도 밀려났다. 담뱃값을 인상한다는 소식과 연말정산 세금폭탄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여전히 '죽은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비용의 문제, 가격의 문제로 생각한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을 찾는다 해도 살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그런 그들을 기다릴 시간에 돈을 번다면 훨씬 더 효율적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가, 그렇다고 이것을 도무지 이해 못할 일로 여기지는 않는다. 아직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죽었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직접 경험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죽음의 처리 과정이 시작됨과 동시에 선택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도 선택할 수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과정이 시작됨과 동시에 '장례지도사'가 친절히 도와준다. 매뉴얼에 따라 해야 할 것들을 설명해준다. 그리고 관부터 시작해서 자질구레한 물건들까지 등급이 정해져있다. '장례지도사'가 유족의 곁에 와서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고 묻는다. 이 현장에서 '흥정'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건, 왜일까?

가격 또한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가격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 누구나 알고 있듯이,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매우 합리적인 이유다. 그러나 그 수요와 공급은 합리적으로만 결정되는가? '합리적', '효율적', '경제적'이라는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오늘날 급증한 화장률이 설명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면 화장할 때에 관은 왜 넣는가? 그냥 시체만 태우면 될 일을 왜 비용을 들여가며 관을 짜고 옷을 입히는가?

우리가 숭배하는 합리와 효율과 경제가 근거라면, 안전한 노동 환경을 구축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한 노동자가 사망했을 때의 비용이 더 저렴하다고 할 때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이미 우리는 그런 선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 나는 이 비효율성이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이 따분하고 비루하며 보잘 것 없는 것을 의미한다면, 죽음은 일상이 아니다. 아니, 아니어야만 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 어떤 죽음이든, 일상이 될 수 없다. 여전히. 식민지기 일상의 죽음을 보며, 우리가 되새김질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우정, 자신의 죽음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죽어가는 사람이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부분적인 해답이 될 것이다. 사회적 억압, 즉 우리 시대 죽음의 전 영역을 감싸고 있는 불안의 장막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마도 우리는 보다 공개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죽음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설사 그것이 더이상 죽음을 신비스러운 것으로 제시하지 않게 되더라도 말이다. 죽음은 숨겨야 할 어떤 비밀도 가지지 않을 뿐더러 그를 향한 문도 열어보이지 않는다. 다만 열어야 할 문이 없다. 그것은 한 인간의 종말이다. 남는 것은 그 혹은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 즉 산 자가 가지고 있는 기억들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더이상 배제하지 않고 인간 삶의 총체적 구성인자로서 인간의 표상속에 끌어들일 때 스스로를 외로운 존재로 느끼는 폐쇄인(homo clasus)이라는 에토스는 급속히 약화될 것이다. 인류가 사라진다면 인간이 이루었던 모든 것, 세속적 혹은 초자연적 믿음 체계를 비롯해 사람들이 아웅다웅하고 생명을 바치기까지 했던 모든 것들은 다 부질없는 것이다.

* 이 글은 제7회 맑스코뮤날레 분과세션에서 발표했던 글에 일부 인용문을 추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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