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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비보호 좌회전'의 나라에서 살 것인가

세월호 실종자 가족 중 한 분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비보호 좌회전' 같은 나라입니다. 정부가 뭘 해주길 기대하면 안 됩니다. 알아서 살아남아야지." 그처럼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누구도 나를 돌보지 않는 디스토피아 같은 이 곳을 이 책 《비보호 좌회전》은 성실하고 생생하게 조명하고 있었다. 1970년 와우아파트 참사,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5년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1999년 씨랜드 참사, 2003년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 2011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사건까지.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에서 건강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

  • 이환희
  • 입력 2015.05.28 12:33
  • 수정 2016.05.28 14:12

'비보호 좌회전'이라니. 책 제목을 본 순간 '헉'했다. 적확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다소 효율적이지만 자신에게 닥칠 모든 일을 오롯이 혼자 책임져야 하는 비보호 좌회전 구간, 우리 모두는 그 비보호 좌회전 구간으로 점철된 나라, 위험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이윤 추구를 위해 안전이나 인권 및 환경 같은 가치를 무시하는 자본(기업)이 계속 위험을 키우고 있고,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는 그것을 방조한다. 자본과 국가를 견제해야 할 정치는 제 기능을 못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사회적 공동체도 허물어진 지 오래다. 결국 유사한 형태의 대형 재난 사고가 되풀이되고, 우리가 '복지'라고 부르는 사회안전망도 부실한 한국에서 개개인은 각종 위험 앞에 홀로 던져져 있는 것과 다름없다.

같은 맥락에서 세월호 실종자 가족 중 한 분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비보호 좌회전' 같은 나라입니다. 정부가 뭘 해주길 기대하면 안 됩니다. 알아서 살아남아야지." 그처럼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누구도 나를 돌보지 않는 디스토피아 같은 이 곳을 이 책 《비보호 좌회전》은 성실하고 생생하게 조명하고 있었다. 1970년 와우아파트 참사,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5년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1999년 씨랜드 참사, 2003년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 2011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사건까지.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에서 건강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

1995년 방화로 인해 37명의 원생들이 숨진 경기여자기술학원을 지키는 경찰관들

처음 책을 집어들었을 때 별로 두껍지 않은데다 가독성 높은 문체로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있어 분명 단숨에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은 빗나갔다. 마지막 페이지에 닿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처럼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던 건, 수시로 밀려드는 짙은 색의 복합적인 감정들이 자꾸만 책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타이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잘 몰랐던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사건, 또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일이지만 잊고 있었던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의 경우를 접했을 때 유독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단지 과거에 일어났던 사고나 사건들의 사례만을 다시 불러내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원인도 짚어내고 있었다. 저자는 한국이 위험사회가 된 것은 '빨리빨리 문화'나 '안전불감증' 같은 소위 '한국적 특성' 때문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윤 추구를 최대의 목적으로 삼는 '자본주의적 특성'이 위험을 만들고 키우는 데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의 여러 사례들을 들어가며 자본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어떻게 위험을 생산하고 증폭시키는지 보여준다. 책에서 제시하는 적지 않은 사례를 통해 자본주의와 위험의 상관관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맹목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위험사회를 조장한다는 얘기가 그리 새롭진 않다. 이 책이 지닌 장점은 그런 주장을 반복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며 위험을 증폭시키는지, 또 그 위험이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어떻게 불평등하게 배분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반면 아쉬운 점은 대안으로서 '민주주의와 연대'를 언급하는 것은 다소 막연하고 편리한 선택이지 않았나 하는 것. 그럼에도 위험사회 한국을 학술적으로 접근한 딱딱하고 건조한 글이 많은 가운데 이처럼 대중적인 서술로 풀어낸 책은 드물었기에 반갑다.

온라인 서점의 책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이 기획된 것은 2013년이라고 한다. 잘 알다시피 그 다음 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철학자 헤겔이 말했듯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국가나 민족도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했다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원래 인간이 그런가 보다'하며 정말 아무것도 배우지 않을 것인가. 과거의 문제를 돌아보고, 그 문제를 낳은 원인을 알며, 해당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애쓴다면 위험이 줄어든 더 나은 사회는 분명 가능하다. 이제는 무언가를 잃고서 아파하고 후회하는 일이 반복되는, 그런 디스토피아를 떠나 보낼 때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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