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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만화 '미생'의 윤태호 작가

"스스로에 대해 먼저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에게도 만화가 좋아서 온 것은 알겠는데 빨리 스스로를 잘 판단해서 아니다 싶으면 다른 일을 시작하라고 한다. 그 다음에는 버티는 것까지가 재능이다. 때는 언제 올지 누구도 모르는 것이니까, 그때까지 묵묵히 가야 한다."

타임지가 한국에서 2015년 '올해의 인물'을 뽑는다면 유일하게 후보에 오를 가상인물이 만화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가 아닐까.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도서정가제 시행 후 처음으로 단행본이 200만 부를 돌파했다. 정부는 장그래의 인기에 편승해 '장그래법'이라 이름 붙인 비정규직법 개악을 시도하다 노동계의 빈축을 샀다. 이런 사태를 어떻게 보냐며 난데없이 만화가에게 마이크가 집중됐다. <야후>, <이끼>, <내부자들> 등 사회성 짙은 작품으로 이름을 알려온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다.

한 바탕 소란이 잦아든 5월 중순, 다음 작품 준비에 한창인 그를 만났다. 마침 전날 밤 방송된 '힐링캠프'를 통해, 인세로 10년 빚을 청산했다는 '장그래의 효도' 소식을 들었다. 그를 국민만화가로 거듭나게 해준 <미생>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만화 <미생>의 윤태호 작가

- 직장인 친구들은 미생을 안 봤다더라. 회사생활만으로도 고달픈데 만화나 드라마로까지 복기할 필요가 있냐고. 그만큼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방증일 텐데.

= <미생>을 본 직장인들은 오히려 판타지라고 말한다. 저도 판타지를 그리려 했다. 미생은 일을 한다는 것, 일을 잘한다는 것은 왜 그렇게 힘든가에 대한 우화 같은 이야기다.

많은 분들이 리얼리티라고 느끼는 건 이 정도까지 묘사한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미생>은 충분히 판타지스럽고 만화스러운 작품이다. 그러니까 안 보신 분들은 꼭 보시라. (웃음)

- 드라마 <미생>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만화보다 더 화제가 되는 게 서운하지는 않았나?

= 매체 속성은 인정해야 한다. 웹툰도 TV 보다는 접근하는데 구체적인 동기가 요구된다. 드라마가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하는 것, 작가 한 명이 그려낸 만화 속 스무 명보다 실재 배우가 등장하는 것이 훨씬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

-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만화가 많지만 원작만큼 사랑 받는 경우는 드물다. 윤 작가는 <이끼>와 <미생>의 2차 콘텐츠 모두 성공했다. 비결은 뭔가. <이끼>는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이 하나의 요인일까?

= <이끼>는 연재 도중에 계약이 되어서 시나리오 회의에 참여했다. <미생>이나 <내부자들>은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마음 편하게 관람하는 시청자 입장이 되고 싶었다. 다만 마케팅을 위해 인터뷰가 필요하면 주저 없이 모두 응했다. 판권 팔고 나면 '어디 잘하나 보자'하고 뒷짐 지고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역할이든 스텝의 입장에서 참여하려고 하는 편이다.

- 특별한 이유가 있나?

= <이끼> 기술시사회에서 얼추 편집만 끝낸 필름을 보는데, 화면에는 주인공만 나오지만 카메라 뒤 사람들의 오디오가 다 들렸다. "야 저거 치워야 돼!" 이러저런 팀이 막 고함치는 것이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도 다 가정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 한 편에 스텝 100명, 그 너머에 두 세배의 사람이 있는 건데, 작품이 잘되어야겠구나. 그래서 필요로 하는 역할이 있다면 같이 해야겠다 싶었다.

윤태호의 만화를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이끼>와 드라마 <미생>

- 그러면 시나리오에도 아이디어를 보탤 수 있는 것 아닌지.

= 시나리오에 참여하는 건 다른 문제다. <이끼>처럼 완성된 작품이 아닌 경우는 시나리오 과정에서 저에게 계속 물어볼 수밖에 없다. <미생>은 시즌2가 있으니, 시즌1에서 극본 작가가 어디까지 확대해도 괜찮은지 영역을 확인하는 작업, 가령 김대리라는 사람을 어디까지 변용을 해도 되는지, 시즌2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같은 것만 감독님과 체크했다. 나머지는 드라마 전문가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저 같은 비전문가가 원작자라고 가서 한 두 마디 거드는 것은 적절치 않다.

- 2013년 '에이코믹스'라는 만화 잡지를 창간하면서 "만화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의 놀이터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웹툰 연재 시에도 댓글까지 읽을 정도로 소통하기 좋아한다고 들었다. 독자와의 교감 차원인가?

= <미생>만 그랬다. <인천상륙작전>은 댓글을 전혀 안 봤다. 슬쩍 내려 보니까 욕이 막 달려있어서. (웃음)

에이코믹스는 독자가 좋아하는 게 뭘까, 만화를 통해서 더 확장해서 알고자 하는 게 뭘까 고민하는 차원이다. 만화가 좀 더 독자들의 삶에 깊숙이 개입되기를 바라고, 좀 더 영향력 있었으면 한다. 저는 만화를 하는 사람이니까. 만화가 없다고 한들 지구에 아무 영향도 없지만, 저한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이 만화를 통해 알고자 하는, 경험하고자 하는 세상은 뭘까 고민하는 것이다. 운영비가 넉넉지 않아서 초기의 꿈처럼 하진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제 인생에서 대단히 잘하고 싶은 일 중 수위에 있는 일이다.

- 사회성 짙은 작품이 많다. 인간과 사회 본연의 그 무엇을 예리하게 다룬다고 해야 할까. 주제는 어떻게 선정하나?

= 제 세대는 머리가 아직 여물지 않은 사춘기부터 사회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던 청년기까지 대한민국의 온갖 사건사고를 겪으며 보낸 사람들이다. 작품 속 사회성은 20대에 내가 바라본 사회에 대한 불만이다. 그 불만은 스스로에 대한 불만에서 출발한 것이다. 내 문제를 사회화시켜서 많이 묘사를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제 작품은 다 개인적 성향의 작품이라 생각한다. 자신을 추구하려고 했지 사회적인 어떤 것을 추구한 것 같지는 않다. 예전 인터뷰를 보면 "우리 사회, 이런 문제가 있잖아요!"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계속 제 안의 문제나 고민에 대해 탐구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윤 작가의 열혈 팬이라는 지인이 이렇게 한줄 평을 하더라. "윤태호의 작품은 만화적 상상력과 현실적 핍진성, 양극단이 공존한다." 이 균형을 어떻게 맞출 수 있나?

= 어릴 때부터 만화가를 꿈꿔서 만화적 상상이 익숙한데, 타고난 성향은 굉장히 현실적이다. 몽상을 해도, 어떻게 하면 실현가능할까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서 하나하나 해나가는 편이다.

<야후>에서 하늘을 나는 수경기가 어떻게 현실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말>지를 살펴보니, 범죄와의 전쟁 때 시행했던 말도 안되는 정책들이 있더라. 이런 황당한 정책을 펼 수 있는 정권이라면 이런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연결시켰다. 그 정도 확신이 없으면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안 쓴다. 성격적인 문제다.

<미생>의 영업3팀도 그렇다. 내가 취재 했던 직장인들은 일을 잘하려고 하는 사람들, 월급 받는 만큼 확실하게 일을 하고 싶은데 그것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지향하는 팀을 한 번 만들어보자고 한 것이 영업3팀이다. 만약 직장에서 어떻게 땡땡이 치고 놀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났다면, 영업3팀은 못 나왔을 것이다.

윤태호 작가의 대표작들

- 반면 최근작 <인천상륙작전>과 <파인>은 너무 교과서적, 계몽적이라 재미가 덜하다는 지적도 있다.

= 어떤 작품이든 계몽적 태도가 빠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혹자는 <미생>이 잘돼서 마음이 좀 편해서 그런 것 아니냐는 농담도 하더라.

= 잘된다고 편해지는 건 없다. 택시를 좀 더 자주 탈 수 있게 된 것 빼고는. (웃음)

- 좀 더 과거의 역사를 다룬 작품이라 교과서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 <인천상륙작전>은 우리나라 역사가 원본이고 거기에 약간 각색을 하는 기분으로 작업했다. 주인공은 역사 자체이고 인간은 조연이다. 그래서 캐릭터들에 특별한 서사를 부여하지 않으려했다. 내레이션 부분이 좀 더 주의를 요하는 작업이었다. 역사적 내용과 해석은 강준만 선생님 책에서 많이 인용했다. 어떤 책이 나오면 그런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 소비하고 끝나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많다. 그래서 출처를 밝히고 인용을 하면서,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원전을 사서 보기를 바랐다. 이게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많은 분들의 노고 어린 조사에 의하면 이런 견해가 있다고.

<인천상륙작전> 댓글을 보면 '좌빨' 어쩌고 그러는데, 만화 자체는 굉장히 보수적 시각이다. 왜 UN군이 국민들 죽이는 건 묘사가 되면서, 북한군이 죽이는 건 묘사가 없냐고도 한다. 그들 말대로라면 북한군은 적인데, 왜 적에 대해 묘사를 하나. 우리 정부가 어떻게 그들에게서 국민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는지 묻고, 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삑사리가 났는지 이야기하는 만화인데, 북한군을 그리는 데에 뭐 하러 노력을 들이고 지면을 쓰나.

- <파인>도 1970년대가 배경이다 .

= <파인>은 과거 새마을운동으로 통칭되는 '근면성실'의 모토를 도둑놈조차도 자기의 키워드로 삼았을 것이라는 발상이다. 요즘 보면 말도 안 되는 정치인이 좋은 키워드를 다 가져다 자기네 정책에 붙이지 않나. 중립적 용어 하나가 어느 순간 정말 재수 없는 용어가 되기도 하고. '근면성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근면 성실한 사기꾼들의 이야기, 돈만 확보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 근현대사 말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 본격적 역사극을 해볼 생각은 없나?

= 마음은 있지만 못하는 게, 이상한 강박증이 있어서.... <파인>도 사투리 고증에 신경을 많이 쓰는데, 조선시대 말을 모르면 못 그릴 것 같다. 당시 것으로 통일감을 이루는데 신경을 기울이고 싶은데, 그걸 다 잘 해낼 자신이 없다. 기와 양식은 조선 초기인데 옷은 구한말 한복을 입힌다거나 하는 작가도 있다. 요즘 사극이나 영화는 퓨전으로도 잘 만든다. 그런데 저는 '그러거나 말거나. 넌 봤니?' 이런 게 잘 안 된다.

- 그런 완벽주의 때문인가? 올 초 건강이 악화돼 연재를 잠시 쉬었던 걸로 안다.

= 오른쪽 팔과 어깨가 떼어내고 싶을 정도로 아프기도 했고, 그보다 머릿속이 동공상태가 된 것 같아서 그랬다. 드라마 때문에 생긴 소란함과 도서정가제 이후 200만부를 넘어선 <미생> 단행본 때문에 인터뷰가 너무 많았다. 어떤 신문사는 "왜 거긴 해주고 우린 안 해주냐"며 따지고, 저도 같이 화를 내다가 화해하면서 인터뷰해주고. 태풍이 지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안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쓱 나왔다. 어차피 작품이 남는 거니까, 댓글로 욕을 좀 먹더라도 감수하자 하고 쉬었다.

- 당시 뉴스를 보고 만화계 제작 현실이 건강을 해칠 만큼 척박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 어떤 일이든 20년 넘게 하면 건강을 해친다. (웃음)

그런데 소설가가 뼈를 깎는 각오로 몇 날 며칠 밤을 새워서 작품을 썼다고 하면, 근로환경에 있어서 자신을 왜 혹사시키느냐고 사회적으로 문제 삼지는 않잖나. (웃음)

- 작업량 자체는?

= 웹툰을 연재하는 플랫폼에서 요구하는 양은 한 회에 40컷 정도다. 꽤 할 만하다. 그런데 작가들이 40컷에서 안 끝낸다. 내용상 더 많은 컷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가 더 많이 그린다. 그런데 이게 보편화되고 나니, 일은 이렇게 힘든데 고료를 왜 안 올려주느냐 하게 된다.

- 그럼 고료는 적정하다?

= 고료는 선언의 문제 같다. 신인작가들의 최저고료만큼은 현실화가 되면 좋겠지만, 고료 자체가 한도 끝도 없이 높아지는 것은 적절치 않다. 플랫폼도 자금의 한정이 있을 것이고, 그 플랫폼이 유지되게 서로 배려해가며 살아야 한다. 오히려 제 고료를 안 높이는 대신, 또 신인 작가가 들어와서 플랫폼이 활성화됐을 때 저도 이익을 볼 수 있다.

분명 자금력 있는 포털인데 엉뚱한 이유로 고료를 올려주지 않을 때는 최선에 있는 선배나 작가들이 노력해서 맨 위의 창을 뚫을 필요도 있다. 그런 부분도 분명히 필요하다.

- '착한 저작권 굿© 캠페인' 공동위원장, '표현의 자유 수호와 웹툰 심의 철폐를 위한 범만화인 비상대책위' 위원장도 했다. 앞서 말한 선배 작가로서의 책임감 때문인가?

= 88년 문하생 시절 5공 청문회를 보면서, 만약 이름 있는 작가가 된다면 사회적 역할이 요구될 때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만들어 낸 책은 대중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들이 있어서 내 작품이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런 대중의 집합을 사회라고 한다면, 사회적 발언은 어떤 자격이 필요한 게 아니라 창작자로서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 올 초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레진코믹스의 '19금' 만화를 문제 삼아 사이트를 차단했다 하루 만에 철회하는 등 논란이 됐다.

= 우리나라 '19금'은 19금이 아니다. '19금'이라면 성인물인데, 법에는 항상 아이들도 볼 수 있다는 여지가 끼어들어 있다.

어떤 사고를 친 사람이 19금 만화를 많이 봤네, 게임을 많이 해서 폭력성이 생겼네 한다. 이것은 학교와 사회에서 좋은 사람을 길러내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스스로 잘 걸러내서 감상할 수 있게끔 공공 영역에서 변별력 있는 사람으로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둬라. 성인이 성인물을 보는 것이 심의기구가 도덕성으로 재단할 문제인가?

도대체 어디까지 국가가 개인의 삶에 개입할 것인지, 변별력이 없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문화를 대하는 '천한' 방식이다. 항상 개발이 먼저고 문화는 그 다음에 따라와도 된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다. 외연이 커지면 내면도 그만큼 따라와 줘야 좋은 사람이 된다. 몸집만 거대해진 다음에 내면을 채우려 하면, 그때는 몸이 거부한다.

- 혹시 19금이라서 못했던 소재는 없나?

= <미생>이 19금이다. (웃음) 아이들이 봐도 이해를 못한다. 자연스럽게 19금이 되었다. <파인> 같은 경우는 성적인 코드와 폭력적인 것도 들어가 있다.

전 연령대가 다 볼 수 있다 하더라도, 독해력 있는 성인이 읽어낼 수 있는 장치를 넣어 성인물을 만드는 걸 좋아한다. 노골적으로 행위를 묘사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그런 표현을 하는 게 선을 넘어가보는 경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어떤 개념을 돌파하는 것이 오히려 더 선을 넘어가는 일이다.

- 만화의 산업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던데.

= 누구나 하는 얘긴데 나만 자꾸 기사가 나온다.

- 구체적으로 만화의 산업화가 뭔가?

= 연재와 단행본 등 예측 가능한 수입에서 끝나지 않고 범위가 확대되는 것이다.

항상 작품을 만들어내면 우연 위에 놓여진다. 시장 상황 때문에 뭐 때문에 나의 열심과는 상관없는 상황이 너무 많다. 그런데 나는 이게 직업이지 않나. 내 가족이 먹고 살아야 하는 일이다. 많은 만화가들이 그렇다. 우리 직업이 우연 위에 놓여 있는 건 너무 불안하고 슬프다. 이 직업을 30년 가까이 해오고 있는데, 아직도 성취를 우연에 맡겨야 한다면 불행한 일이다.

조금은 확률 높은 게임을 하고 싶다. 내 가정을 건강하게 꾸려갈 수 있게끔. 이제는 과거처럼 한 작가가 죽을 때까지 100작품, 200작품씩 못한다. 그러면 한 작품으로 단행본뿐 아니라 여러 가지 수익화 방법이 있어야 한다.

- 만화의 산업화를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건 뭘까?

= 사업자의 창의적 아이디어다. 작가가 시장을 고민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또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그래서도 안 된다.

사업자들을 만나보면 자기가 제일 전문가이고 다 잘될 것처럼 얘기한다. 이거 된다, 아직 투자자를 못 구해서 그렇지 완전 된다고 한다. 그런데 보면 남들이 이미 다 하고 있는 일이다. 차라리 누구도 모르는, 해본 적 없는 아이디어를 두려운 마음으로 꺼내놓으며 함께 해보자는 사람을 만나면 시도해보겠다. 좀 더 창의적이고 사업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왔으면 한다.

- 산업화를 이루려면 작가 풀도 넓어지고 역량 있는 작가도 많이 나와야 할 텐데, 사람을 길러내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직접 대학 강의도 하는 것일 테고. 대학과 학원에 만화학과가 많이 생기면서 도제식 시스템은 끝났다고 한다. 그런데 한편으론 아직 문하생 제도가 존재한다 .

= 나와 함께 일하는 문하생이 5명인데 모두 만화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에서 기본적인 것은 배웠으니 도제를 통해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현장 경험을 하고 싶다고 온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 도제가 필요하냐고 물으면 당연히 그렇다고 할 것이다. 반면 만화학과 나와서 바로 만화가가 된 사람은 필요 없다고 할 것이다. 제각각이다. 내게 필요한 것이냐가 문제의 핵심이지, 도제냐 학교 시스템이냐,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 그럼 만화인력 양성은... .

= 나는 양성하고 싶지 않다. 나 혼자 잘하고 싶다. (웃음)

- 작가마다 각자의 방법이 있다는 얘긴가?

=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학교가 왜 중요해졌냐 하면 많은 아이들이 그곳으로 오기 때문이다. 저 역시 만화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문하생으로 들어갔고, 학원을 다녔다. 지금도 대부분 그럴 것이다. 아이들을 만나보면 다들 열심히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열심히 할 때는 그 부분을 이야기 해준다. 문하생 시스템보다 학원 시스템이 더 우월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많은 아이들이 있고, 그 아이들이 중요하니 가르치는 것이다.

- 전혀 배우지 않고 천재성이 있어서 만화를 잘 그리는 작가도 있나?

= 천재성이 없어도 그렇게들 한다. 모든 창작물에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이것이 조금 더 더해진다면 좋겠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1Q84>라는 소설을 보면, 여자 아이가 쓴 소설 초고를 남자 주인공이 한 번 손질해준다. 그래서 신인공모에 당선된다. 거기서 남자 주인공이 하는 말이 있다. 이 작품은 정말 문장가로서는 서툴기 그지없지만, 초고가 갖고 있는 힘이 있다고. 그게 확보 되었다면, 또 대중이 그것을 좋아해서 그 사람이 데뷔를 했다면, 그 길을 가기로 했다면 어쩔 것인가.

- 전체적 수준에 대한 기대라는 것도 있을 텐데.

= 앞선 작가들이 후배들에게 자신이 양질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와줬으면 하는 바람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강제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후배들도 선배는 얼마나 잘했다고 저런 소리냐 하는 것도 곤란하다. 직접 해준 게 있건 없건, 앞서 걸어가면서 다져놓은 토대는 있다. 웹에서 나온 만화라서 우리는 선배 만화가들과 다른 종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화와 낙서 사이에 무언가 있다 하더라도, 그 모드는 같이 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웹툰 작가가 늘면서 주제도 다양해지는 반면,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우려도 있다.

= <깊이에의 강요>라는 쥐스킨트의 소설이 생각난다.

최근 웹툰에 대해 염려 섞인 발언을 하는 걸 많이 목격한다. 사실 작업을 하다가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작가 스스로가 더 잘 느낀다. 어느 순간 작가가 된 아이들이 많다. 별로 주의하지 않고 웹툰 작가로 들어왔다가, 어느 순간 다른 길을 찾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린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기본기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러면 그때 가서라도 배우면 된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넌 그것도 안 배우고 작가란 말이냐'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오만한 짓이다.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노력을 필요한 만큼 하는 것이다.

- 그럼 독자는?

=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그 작가의 작품은 안 보면 된다. 독자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피드백이다. 그러면 작가는 빨리 자기에게 어울리는 다른 직업을 찾아서 떠나든가, 아니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다. 독자는 독자의 역할을 하면 될 것 같다. 지금 작가가 워낙 많기 때문에 대체되는 것만큼 두려운 것이 없다. 스스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 작가는 안 는다.

- 어떤 인터뷰에서 미생 청년들에게 '버텨내야 한다', '버텨내는 것이 능력이다'라고 했다. 윤태호 작가라면 버티지 말고 세상을 뒤엎으라고 할 것 같은데 의외였다.

= 전제가 있다. 스스로에 대해 먼저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에게도 만화가 좋아서 온 것은 알겠는데 빨리 스스로를 잘 판단해서 아니다 싶으면 다른 일을 시작하라고 한다. 그 다음에는 버티는 것까지가 재능이다. 때는 언제 올지 누구도 모르는 것이니까, 그때까지 묵묵히 가야 한다.

창작자라면 세상 탓하지 말고 버티라고 한 것이 그냥 '버텨라'고만 나왔더라. 나이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써먹기 좋은 표현만 딱 꺼내서 쓰면 곤란하다.

- 차기작을 위해 남극 취재도 다녀오셨다던데.

= 내용을 공개하기는 그렇고, 올해 안에 할 생각이다. 미생 시즌2와 같이 진행될 것 같다.

- 미생 시즌2는 언제쯤 나오나? 기다리는 독자들이 많은데 계속 연기되고 있다.

= 8, 9월로 생각하고 있다. 약속은 어기는 맛이 있는 거다. (웃음)

- 좀 가벼운 이야기를 해볼 생각은 없나? 사랑이야기라든지.

= 사랑이야기는 내가 모른다. 아내와 결혼하게 된 것도 사랑보다는 보호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웃음) 만화 속 캐릭터라고 해도 둘이 알콩달콩 지내는 걸 보기가 싫다. (웃음)

남극 작품이 아마 좀 더 가볍고 캐주얼 한 작품이 될 것 같다.

- 앞으로 몇 개의 작품을 더 하겠다는 계획이 있나?

= 미생은 기고가 260수가 넘어가서 앞으로 한 3년 갈 것 같다. 지금 내 연재 스케줄은 스턴트 같다. 항상 어제보다 나은 기술로 더 좋은 묘기를 보여줘야지 하는 욕심이 있어서 더 많이 하게 될 것 같다. 나이가 어린 게 아니라서 앞으로 작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연한이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그래서 좀 극단적으로 많이 해 볼 생각이다. 지금도 만화가들 중에서 가장 양이 많기는 하다. 지금 신인 작가들이 한 달에 한 60~70페이지를 그리는데, 나는 200페이지 가까이 그리고 있다. 그래도 할 만하다.

- 작가 말고 다른 분야, 예를 들면 본인 작품을 연출해 볼 생각은 없나?

= 전혀 없다. 감독은 실재하는 배우를 잘 설득해 연기를 끄집어내는 사람이다. 사람과의 관계가 대전제가 된다. 거기에 스텝들과 하모니도 이뤄야 한다. 제작부서에서 날아오는 자금 압박도 커버해야 한다. 그런데 만화는 화실 내에서 내가 독재자다. 문하생들이 납득하는 선에서 요구하면 행복한 화실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촬영현장에 가면 내가 가장 비전문가가 될 것이다. 잘하는 것만 하고 살기에도 힘든 세상이다.

- 만화가로서의 꿈이 있다면?

= 한국 밖에서 내 만화가 읽히고 피드백을 받는 경험을 죽기 전에 해보고 싶다. 언어권이 달라도 내 작품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다.

- 결국 '한류스타'를 꿈꾸는 것인가? (웃음)

= '스타'까지는 아니다. (웃음)

- 윤태호의 라이벌은 누구인가?

= 새로 들어온 작가는 다 라이벌이다. (웃음) 작가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건 대체되는 것이니까.

인터뷰 및 정리: 최해선, 성치훈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연구원

* 이 글은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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