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애플보이, 슈가보이...준비된 방송천재 백종원

  • 원성윤
  • 입력 2015.05.24 08:34
  • 수정 2015.05.24 08:35
ⓒMBC

백종원은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격언을 확인시켜준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중인 백종원. <문화방송> 제공

“보통 이거 삶아서 초장 찍어 먹는데, 그러면 정말 없어 보이잖아요. 그렇죠?” 문화방송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브로콜리 수프를 만드는 법을 설명하던 백종원이 무심코 던진 말에, 인터넷 방송 채팅창은 난리가 났다. 백종원과 농담을 주고받던 시청자들이 “초장 비하 발언”이라며 “초장한테 사과하라”는 주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화들짝 놀란 백종원은 “초장 무시한 것 아니”라고 해명을 하다가, 급기야 초장에게 경칭까지 붙여가며 사과의 뜻을 담은 영상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저는 절대로 초장님을 기만하려는 의도는 없었고, 무시하는 것 아닙니다. 저도 회 먹을 때 초장님을 상당히 애용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 브로콜리를 믹서에 넣고 갈다가 “믹서기 살 때 잘 보고 사세요. 저거 잘 안 갈리네요”라고 말한 백종원은, 그 문장을 끝내고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사과의 영상편지를 쓴다. “믹서기 회사 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본의 아니게 실수를 했는데, 가격 대비 쓸 만합니다.”

백종원이 딱히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다. 요리연구가 입장에선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식재료를 뻔하게만 먹는 게 답답할 수도 있고, 자신이 늘 쓰던 제품보다 성능이 못 미치는 제품을 쓰다 보면 투덜댈 수도 있다. 그러니 영상편지도 반쯤은 장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춘장을 기름에 튀기다가 실패하고도 “그러니까 짜장면 정도는 시켜 드세요. 중국집 하시는 분들이 이렇게 힘들게 일하시는데, 이걸 집에서 해 먹는 건 미련한 짓”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백종원이, 별것 아닌 듯한 일에도 빠르게 사과하는 모습은 흥미로운 광경이다.

자신의 레시피에 대해선 자신이 책임질 수 있으니 양보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자신의 농담이 혹시라도 데친 브로콜리를 초장에 찍어 먹는 이들이나 믹서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그건 자신이 다 책임질 수 없다. 백종원은 빠른 속도로 주저없이 사과하고, 믹서에서 곱게 갈려 나온 브로콜리를 확인한 다음 재차 강조한다. “사장님, 정말 믹서기 좋은 것 같습니다.” 그날 하루 종일 연거푸 사과의 영상편지를 쓴 백종원에게, 시청자들은 “애플보이”라는 새 별명을 붙여줬다.

그저 성공한 요리연구가, 요식업계의 거물 정도로만 여겨지던 백종원은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대중을 사로잡으며 ‘준비된 방송 천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런데 그 방식이 좀 재미있다. 올리브 <한식대첩 2>(2014)의 심사위원으로 소탈하고 사려 깊은 모습을 보여준 것까진 크게 특별할 게 없었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는 시청자와 농담을 주고받다가 삐치는 모습이라거나, 요리에 실패하는 모습도 거침없이 보여주기 시작했다. 최근 시작한 티브이엔 요리 프로그램 <집밥 백선생>에선 대놓고 말한다. “내가 수년 전부터 말했잖아. ‘여러분, 오늘 요리는 실패입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하고 클로징하는 요리 프로그램도 있어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저거 쉽네, 나도 할 수 있겠네’ 하고 따라 해볼 수 있는 요리 프로그램을 하고 싶어요.” 그가 알려주는 레시피의 태반은 자취생도 집에서 도전해볼 수 있을 만큼 쉽고, 툭하면 튀어나오는 충청도 말씨와 약 올리듯 시청자들을 밀고 당기는 화술은 정겹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메라 앞에서 아집을 부리지 않는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비전문가들에게 뭔가 알려줘야 하는 상황이 되면, 놀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뻣뻣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취한다. 실수를 두려워한 탓에 긴장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담보한 전문가로서의 권위가 사소한 실수로 무너져 내리면 어쩌나 하는 근심은 사람에게서 유연성을 앗아가고, 결국 소통이나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자신이 아는 지식을 속사포처럼 토해놓고는 허겁지겁 마무리하게 만든다.

인포테인먼트 쇼가 늘어나면서 티브이에 얼굴을 비추는 자칭 타칭 전문가들이 점점 늘어남에도, 그중 대중의 곁에서 오래 살아남는 데 성공한 이들이 드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에 비하면 대놓고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계란말이를 망치고도 “마무리만 잘하면 근사하게 내놓을 수 있다”고 말하는 백종원에겐 보는 이들마저 느긋하게 만드는 여유가 있다. 카메라 앞에서 전문가로서의 권위가 망가지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상대의 놀림에 오히려 덤을 얹어 더 허술한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소탈한 매력으로 탈바꿈하는 기교.

이것은 실로 드문 덕목이다. 오류를 지적하며 시정이나 사과를 요구하는 이들 앞에서 “이게 뭐 그리 잘못한 거냐”고 항변하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며, 권위를 공격하는 농담이나 사소한 놀림에 화르륵 불타오르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마치 여기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자신의 존재가치가 모두 부정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화려한 언변으로 스스로를 변호하며 버티는 것으로 상황을 돌파할 수 있을 거라 믿는 사람들.

그러나 백종원은 자신을 ‘슈가보이’라고 부르는 시청자들의 놀림에 역정을 내다가도 어느새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여러분들이 기대하시던 설탕을 넣을 차례”라고 스스로 농담을 주도한다. 그건 건강한 자긍심이 탄탄하게 뒤를 받쳐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설령 놀림받고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사소한 일들에 사과하는 모습들을 대중에게 보여준다 해도, 그것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깎아먹지는 못한다는 자긍심 말이다.

그 자긍은 분명 오랜 세월 동안 단련된 것이리라. 백종원은 웃으며 회고하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실로 자긍심에 상처가 날 만한 순간들로 점철되어 있다. 학사장교로 발령받은 포병부대에서 자진해서 취사반으로 내려갔을 때, 보조 주방장 출신의 취사병들은 조리사 자격증 하나 없는 백종원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본격적으로 음식 장사에 뛰어들었을 땐 낮술을 걸치고 온 손님들로부터 뺨을 맞는 일을 다반사로 겪어야 했고, 프랜차이즈가 성공을 거둔 뒤엔 음식에 화학조미료를 지나치게 많이 넣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것도 모자라 열다섯살 연하의 탤런트 소유진과 결혼한 이후에는 “초혼이냐”는 어이없는 질문부터 “혹시 돈 때문에 한 결혼이 아니냐”에 이르는 세간의 쑥덕거림을 마주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백종원은 에두르지 않고 정면으로 상황을 돌파했다. 남들 안 보는 곳에서 무를 몇 포대씩 쌓아놓고 칼질을 연습해 실력으로 취사병들을 납득시켰고, 변덕스러운 손님들의 취향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승부를 보고자 하는 메뉴를 우직하게 밀어붙여 성공을 거뒀다. 화학조미료에 대한 비판에는 자신이 쓴 식당용 레시피 서적 <백종원의 식당 조리비책>에서 60~70인분에 조미료 40그램을 넣는 김치찌개 레시피를 공개하는 것으로 답했다.

숨겨뒀던 온라인게임용 마우스를 아내에게 들켰다는 소식에 쩔쩔매고, 다음날 화해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은 그 어떤 말보다도 더 강력하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증언했다. 그는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진가를 증명해냄으로써 자긍심을 지켜왔다. 더 이상 굳이 자신을 해명하고 보호할 필요가 없을 때까지. 그렇게 단련된 자긍심은 더 이상 아집을 부리지 않아도 쉽게 훼손되지 않는다. 채팅창 너머 네티즌들의 짓궂은 놀림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고, 식칼 대신 중식도를 쓰는 게 다분히 “있어 보이려”는 의도란 걸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적지 않은 이들은 종종 무릎 꿇지 않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고, 남에게 실수를 들키지 않는 것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때론 물러서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 자신의 오류를 오류로 인정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강인하다고 여긴다. 나 또한 그런 아집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백종원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진정한 강인함은 철갑을 두른 것 같은 단단함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을 수긍하고 그것을 지적하는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유연함으로 증명되는 법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격언의 진짜 의미는 분명 이런 것이었으리라. 그 진의가 비빔국수 양념장에 설탕을 한 공기씩 때려 붓는 와우(온라인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폐인의 손에서 밝혀지리라곤 미처 생각 못했지만 말이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백종원 #요리사 #쉐프 #문화 #미디어 #마이리틀 텔레비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