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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정치적 시민을 만들어낼 수 있는 마중물

서울의 경우, 현재 살아가는 주택에 거주하는 평균기간이 4년이라고 하며, 그나마 자기 집을 갖고 있는 경우가 10년, 자기 집이 아닌 사람들의 경우 3년의 기간을 평균적으로 한 주택에서 살아간다. 오래 살았거나, 오래 살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적 활동들의 진정성과 지속성이 의심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민'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아직 '주민' 아닌 것이다. 정주하지 못하거나,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일수록, 지역의 정치현장에서 정치적 시민권을 갖기란 쉽지 않다.

ⓒ한겨레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 [시대정신 기본소득] 칼럼을 연재합니다. 기본소득의 핵심 원칙은 '모두에게' '조건없이'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당사자로서 기본소득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칼럼 시리즈에서는 각자가 가진 고민들을 통해 동시대의 문제를 짚어보고, 이로써 기본소득 논의를 재구성해보려고 합니다. - BIYN 사무국 (sec@biyn.kr)

'풀뿌리'가 중요하고, '지역'에서부터 시작하는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제 논쟁의 여지가 없는 명제가 되어버린 것 같다. 어떤 회의 자리에서든 '지역'에서부터 결정하였는지 질문하는 것은 가장 날카로운 질문처럼 여겨지고, 거꾸로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지역을 좀 아는' 사람이 되어 대화의 현장에서 힘을 얻기도 한다. 그만큼 '풀뿌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명실상부한 옳은 가치가 되어버린 듯하다. 나쁘지 않다.

어쩌면 나도 '지역이 중요하다.'는 당연하면서 막막한 이야기를 습관처럼 내뱉는 사람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우스울 정도로 짧은 활동기간이지만, 이제는 제법 여기저기서 '지역의 정치'니, '풀뿌리의 중요성'이니 하는 이야기를 떠들고 다닌다. 부끄럽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쉽게 안주해버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아집에 쌓여 당위만 가득한 사람이 되지도 않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길을 찾고 싶다.

최근 나의 관심사는 '주민'과 '시민'에 대한 것들이다.

내가 놀고, 활동하고, 거주하고 있는 서대문구의 신촌동 일대는 젊은 사람들이 많다. 이 젊은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정주 기간이 짧다는 것, 그리고 세입자 비율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인구 2만여명의 신촌동을 살펴보면, 자가주택의 비율이 2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서대문구 평균이 43% 정도라고 할 때 자가주택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율이 그 절반밖에 되지 않는 동네이다. 반면에 1인가구 비율은 60%에 육박하는데, 이는 또 서대문구 평균 29%의 두 배에 달한다. 이와 같은 통계가 주민등록주소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예상컨대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들을 따져보면 더 많은 세입자와 더 많은 1인가구가 살아가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한편, 서울의 경우, 현재 살아가는 주택에 거주하는 평균기간이 4년이라고 하며, 그나마 자기 집을 갖고 있는 경우가 10년, 자기 집이 아닌 사람들의 경우 3년의 기간을 평균적으로 한 주택에서 살아간다. 대충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라는 것을 알겠는가? 그리고 이 글을 보고 있는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자기 삶의 패턴을 검토하다보면, 우리가 왜 '지역'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지역'의 현장을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누가 지역의 주민으로 호명되어 왔는지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지역의 어떤 회의 자리에 가면, 자연스럽게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어려운 경우가 있다. 내가 '주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자리들이다. 부동산이나, 생업과 같이 이해관계가 '지역사회'와 명확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 '주민'이다. 혹은, 오래 살았거나, 오래 살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적 활동들의 진정성과 지속성이 의심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이 '주민'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아직 '주민' 아닌 것이다. 풀뿌리적 대안교육을 고민하고, 대안공간을 운영하며, 도시의 생태적 전환을 구상하고, 지역의 이슈로 지역의 정치를 만들어내는 작은 사회단체의 활동가이자, 녹색당이라는 풀뿌리정당을 표방하는 소수정당의 구의원 후보로 선거를 치른 정당인이지만, 여전히 그런 자리에서 나는 '주민'이 아니다. 나의 이해관계는 '정치적'이고, 정치적 이해관계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비해 의심받기 쉽다. 주민이거나 주인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정주하지 못하거나,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일수록, 지역의 정치현장에서 정치적 시민권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재생, 전환도시, 공공성과 같은 단어들이 지역사회에서 자기 일감을 개발하고, 실제로 어떤 실험으로 이어질 수 있으려면 '정치적 시민'이 등장해야 한다. 혹은 그런 시민을 발굴하고, 연결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경제적 이해관계를 포함하여, 공공의 영역을 다지고, 공적이면서 정치적인 문제해결 과정과 미래적 전망을 만들어갈 수 있는 시민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요즘 그런 '시민'을 만나고, 그 관계를 연결하여, 유의미한 정치적 실험으로 이어지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은 상황이 달라."하는 냉소적 태도나, "왜 사람들은 이렇게 사적이고, 이기적이지?"하는 당위적인 태도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돌파구'를 만들어내야 한다. 대다수가 한계상황에 처해있고, 갑과 을이라는 도식 이외의 관계가 점점 삭제되어가고 있는 이 사회를 돌파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돌파구를 만들어낼 시민들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이 이 한계상황에 부딪힌 사회에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기본소득을 통해 기대하는 것은 이 단어가 우리 사회에 만들어낼 '토론'이다. 모두가 을이 된 사회에서 미래적 전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피곤한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미래적 전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을이 되어버린 우리가 마주하는 두려움은 그 실체와 별개로 점점 거대해지기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을'의 언어가 아닌 사회적 토론은 점점 삭제되는 난감한 사회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기본소득의 가능성, 그것이 필요한 이유와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내는 토론의 장치들과 정책 작업은 우리 사회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호흡의 정치현장을 만들어낼 것이다. 다양한 방법과 다양한 시나리오, 그것을 만들어내고, 실험하고, 평가하면서 수정해가는 사회 전체의 '정치적' 과정이 우리 사회에는 절실하다. 재벌가의 부조리한 행태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만큼, 새로운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기획과 목표에 도달하게끔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풀뿌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은 이제 그만하려고 한다. 그런 말을 당당하게 내뱉을 정도의 경험도, 고민도 내게는 부족하기 때문에 부끄럽거니와,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시기는 이제 지나온 것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풀뿌리'라는 신념에 가까운 언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찾아내야 한다. 풀뿌리일수록, 지역이라는 단위일수록 '돌파구'가 필요하다. 그 돌파구를 만들어내는 실험, 미래적 전망을 갖고 토론이 가능한 지역사회의 정치적 시민을 만나고, 만들어내고, 연결하는 실험이 필요하고, 그 실험의 구체적인 방법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경제적 이해관계만이 정치적 시민권을 얻는 지역과 풀뿌리 차원에서 '전환'이 시작될 수 있다.

기본소득이 우리 사회의 시민을 만들어내는 마중물이 될 수 있을까? 지역단위에서부터 전환의 실험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민사회의 역량을 키울 수 있을까? 기본소득이 그것만으로 정답이 될 수는 없지만, 기본소득이 만들어낼 토론과 정치의 과정이 답에 이르는 훌륭한 풀이과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글. 이태영 (신촌민회 사무국장 / 녹색당 서울시당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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