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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가 맞서 싸운 신군부 쿠데타 이야기

전두환/노태우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선수를 치기 위해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는데 북괴군의 남침을 막으라고 국민들이 피 같은 세금을 내서 먹이고 입힌 전방사단 군병력들을 빼내어서 정 총장 측 지지 군부세력을 공격하고 군권을 탈취한다(1979년 12월 12일에 발생한 이른바 12.12 사건). 실제로 존재하는 북한정권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 남한경제가 휘청거릴 정도로 큰 군대를 유지해 왔고 그때까지의 역대 남한정권들은 심지어 남한 내 자유를 유보하는 근거로 북한의 위협을 들먹여 왔다. 그런데 바로 그자들이 군권탈취를 위해서 휴전선을 지켜야 하는 전방사단 군병력들을 빼내어 총부리를 같은 국군들에게 돌리게 했으니 그 당시에 북한이 남침이라도 했으면 정말 어찌 되었을지 참으로 아찔하고 모골이 송연한 일이었다. 누가 진정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예라고 하겠다.

  • 바베르크
  • 입력 2015.05.18 13:02
  • 수정 2016.05.18 14:12

오늘은 광주 5.18 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일. 5.18에 대해서는 공부도 깊지 않고 (아무도 관심없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지극히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필자가 더 말을 보태는 것도 조심스러운지라 이 글에서는 5.18의 원인이 된 전노도당(全盧徒黨)의 5.17 내란 사건에 대해 주로 다루어 보기로 한다.

전두환의 5.17 내란 사건은 박정희의 5.16 쿠데타와는 달리 2단계로 이루어졌기에 이야기는 그 첫단계인 12.12의 원인부터 살펴 보기로 하자. 일단은 소위 정통 육사 1기라고 하는 전두환과 그의 동기생들인 육사 11기 얘기부터 풀어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군사영어학교라는 전신(前身)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남한의 육군사관학교는 처음에는 미군과의 협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초점 맞춘-_- 단기 장교양성과정이었다. 이게 점차 제대로 된 장교양성과정으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에서 6.25 때 초급장교였다가 나중에 5.16쿠데타의 주역이 된 육사 8기생(김종필, 김형욱 등을 배출)들이 나왔고 육사 11기는 첫 4년제 과정이 시작된 기수이다. 당초에는 정규 육사 1기라 하였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자신들이 정규 육사 1기라는데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던 모양이나 그들이 육사에 들어 간 건 6.25가 한창일 때. 그들은 생도란 이유로 그들의 동년배들이 총알받이가 되어 전선에서 죽어나가는 동안 교정서 '군사교육'을 받았음; 그러면서도 전두환/노태우의 동기생들은 일찍부터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데 앞장섰으니 자신들의 기수를 정규 육사 1기가 아니라 육사 11기로 한다고 하자 이들이 칼을 들고 상급자를 찾아가 집단반발한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이때 그냥 칼을 들고(정규육사 1기로 다시 환원해 달라는 요구조건이 안 받아들여지면 할복하자는 뜻이었다는데 정말 그때 다 그러지 그랬니-_-;;) 가자는 그의 동기생들에게 칼을 흰 천으로 싸서 들고 가자는 의견을 낸 이가 노태우였다고. 전노도당 중에서 전두환과는 달리 노태우가 그래도 16년 만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통해 집권했고 집권 기간 동안에 '물태우'라는 별명을 들어 가면서도 자유화 조치(또는 방임)들을 상당수 취한 것의 싹은 이런 일화에서도 보이는 듯 싶다.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세력의 성장과정을 보며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은 그들이 구(舊)군부(응?)세력인 박정희의 입김이 구석구석 서린 보살핌을 받아가며 박정희의 사고방식과 정치행태를 추종하면서 국가와 민주주의의 암적 존재로 세력을 키워갔다는 것 때문이다. 노태우는 4.19직후 대학에 교관으로 나가 있던 때를 회상하며 구태정치인들 뺨치는 당시 대학총학생회의 타락상에 혀를 찼는데 이는 '썩은 정치를 바로잡고 국가위해 봉사하는 사심 없는 군인'이란 박정희의 망상을 그가 정확히 계승했음을 엿보게 한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인 5.16 직후에 육사생도들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 지지시위를 조직해 내면서 박정희의 귀염(우웩~)을 받게 되었고 군대 내의 요직을 골고루 거쳤으며 전두환이 거친 자리를 노태우가 이어 받는 식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별을 달고 나서는, 초급장교 출신 경호실장 차지철 밑에서 나란히 경호실 차장보를 지냈다.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정권 내의 궁정-_-;암투로 독재자 박정희와 유신부통령이라고까지 불렸던; 사실상의 2인자 경호실장 차지철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님의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은 권력의 공백을 가져왔다. 독재자 박정희의 총애를 받으려 경쟁하던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의 최고 권력기관이던 중앙정보부와 대통령경호실이 일시에 무력화된 것. 대통렁경호실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다 쏘아 죽였고-_-;; 중앙정보부는 그렇게 대통령과 경호실요원을 죽인 범죄집단이 되어서 수사대상이 되어 버렸다.

주요 권력기관들이 일시에 무력화된 상황에서 그 공백을 치고 나온 것이 보안사령관 전두환. (전두환은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으로 취임한 후에 대통령 유고(有故) 등 비상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보안사령관으로 그가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 참모들에게 소상한 보고를 하여 달라고 요청했고, 의외로 광범위한 권한 행사를 할 수 있음을 깨닫고 흡족해 하였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 살해사건의 수사를 맡은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었고 국민들이 번쩍거리는-_-;; 그의 대머리를 뉴스에서 처음 보게 된 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전두환은 박정희 살해사건 수사를 명목으로 사람들을 마구 소환조사하기 시작하여 권력 기반을 차츰 굳혀 간다.

1979년 11월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전모를 발표하고 있다.

전두환에게 눈엣가시 같은 이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 장군. 정 장군이 직책상 그의 밑에 있던 전두환을 한직으로 전보시키려고 하자 전두환은 반격을 시도한다. 전두환이 정 총장에게 반대하는 군부 내 여론을 모은 수법은 정승화 장군이 박정희를 사살한 김재규의 초대로 사건현장인 궁정동 안가에 와 있던 사실을 활용해 정 장군을 김재규와 공범으로 몰아붙인 것. 정 장군의 결백은 나중에 조갑제 기자께서 1987년 대선전 취재로 입증한다(쿨럭;).

전두환/노태우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선수를 치기 위해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는데 북괴군의 남침을 막으라고 국민들이 피 같은 세금을 내서 먹이고 입힌 전방사단 군병력들을 빼내어서 정 총장 측 지지 군부세력을 공격하고 군권을 탈취한다(1979년 12월 12일에 발생한 이른바 12.12 사건). 실제로 존재하는 북한정권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 남한경제가 휘청거릴 정도로 큰 군대를 유지해 왔고 그때까지의 역대 남한정권들은 심지어 남한 내 자유를 유보하는 근거로 북한의 위협을 들먹여 왔다. 그런데 바로 그자들이 군권탈취를 위해서 휴전선을 지켜야 하는 전방사단 군병력들을 빼내어 총부리를 같은 국군들에게 돌리게 했으니 그 당시에 북한이 남침이라도 했으면 정말 어찌 되었을지 참으로 아찔하고 모골이 송연한 일이었다. 누가 진정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예라고 하겠다.

당시에 정승화 참모총장을 체포하겠다며 전두환의 부하들이 총장공관을 습격하여 총격전이 벌어지자 당시 국방장관이던 노재현은 담장을 넘어 미군부대로 도주하였다-_- 그나마 당시 최규하 대통령께서 정 총장 체포를 재가해 달라는 전두환의 협박에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하셔서 최규하 대통령은 자신은 군을 모르니 국방장관이 와야 정승화 참모총장 체포를 승인해 줄 수 있다고 열 시간 넘게 버텼고 달아났던 국방장관 노재현이 신군부 세력에게 붙잡혀 오자 비로소 이례적으로 결재 시간(새벽이었음)까지 쓰고 정 총장의 체포를 재가한다.

이렇게 12.12 군사반란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정치적으로 제거한 전두환 노태우 도당은 이제 군권을 장악했고 최규하 대통령의 정부가 있었으나 이제 남한은 2월 혁명 후의 러시아에서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처럼 이중권력의 시대로 접어 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이중 권력시대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에서 그랬듯이 결국은 더 힘이 있는 어느 한쪽으로 쏠려서 권력의 집중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결말이 나기 마련이었다.

아마도 1980년의 공식적인 '서울의 봄'은 독재자 박정희가 납치해 가택연금하였던 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님 등 당시의 재야인사들 상당수가 정치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열렸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 시중에서는 독재자 박정희에 의해 정치인생의 거의 전부를 보낸 국회에서 제명된 김영삼과 김대중 전 대통령님 그리고 박정희의 조카사위로 그가 뒈진 후 당시 집권당 공화당 총재가 된 김종필 이렇게 삼김(三金)씨가 선거에 나가서 그 중 한 명이 대통령이 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모두가 민주화가 되리라고 기대하던 그 1980년의 희망 찬 서울의 봄 시절에 사람들이 거의 지나친 작은 단신이 있었으니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가 맡았던 중앙정보부장 자리까지 겸임하게 되었다는 발표였다. 전두환이 내밀적으론 이미 정권장악을 위한 쿠데타 준비마저 사실상 마쳤음을 보여준 이 중앙정보부장 겸임 소식에 주목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한 당시의 유일한 정치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님뿐이었다. 당신께 닥쳐올 비극적 운명을 미리 감지하셔서일까ㅜㅗㅜ

서울의 봄을 박살 낸 전노도당의 쿠데타는 1980년 5월 17일 자정에 자행되는데 그 법적 수단은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조치였다. 박정희가 뒈진 후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지만 제주도를 제외한 일부계엄이기에 계엄사령관/국방장관/대통령으로 통수체계 이어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제주도를 포함시켜 전국계엄이 되면 이제 계엄사령관은 국방장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대통령의 '통제'만 받는 군정이 시행되는 셈이다. 전노도당은 전군지휘관회의를 열어 이런 비상계엄전국확대가 군부의 의사라며 최규하 대통령을 압박했으며 비상계엄 확대조치가 국무회의에서 통과되어 시행되기도 전에 국회를 폐쇄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님 등 민주화운동 관계자들을 검거하고 김영삼과 김종필을 가택연금시키는 등 쿠데타를 감행해 정권탈취를 완성시킨다.

그러나 위컴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 남한인들을 가리켜 우두머리가 물에 뛰어들어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뛰어들어 죽는 들쥐떼(레밍) 같다고 개탄했듯 전두환의 이 쿠데타 자행에도 창중 간에(쿨럭;) 잘 보여 한자리 하려는 자들만 난무하고 전국은 잠잠했다;

단 한 군데 광주를 제외하고.

전노도당의 광주학살은 나 같은 수꼴이 감히 거론하기에는 너무나 비극적이며 잔혹한 사건인지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_-; 어처구니 없으시겠지만 그 사건을 다룬 작품 중 개인적으로 제일 감동받은 영화 [스카우트]를 추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다만 (아무도 관심없겠지만) 친미주의자를 자임(우웩-)하는 필자인지라 광주학살의 미국책임론에 대해서는 끝으로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당시 국군의 작전통수권이 미국에게 있는 관계로 전노도당은 광주민주화운동 탄압에 미군통수권 밖에 있는 공수부대를 동원했었다. 그런데 막바지의 도청에 있던 시민군을 학살하는 것에 동원된 부대가 박준병이 사단장으로 있던 20사단으로 이는 미국의 동의가 없으면 이동이 불가능한 부대였다.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카터 당시 미국대통령은 20사단을 투입하겠다는 전두환의 요청을 수용한다-_-;

아직까지도 한반도평화의 사절인 양 처신하는 카터가 1980년 5월 하순 광주의 전남도청에 군투입 결정을 내리는 것을 승인하여 준 이라는 것은 기억해 둘 만하다. 그 전에 체포되셔서 사형선고를 받아 형집행을 기다리시던 김대중 전 대통령님은 카터의 후임자로 전쟁광이라 비난 받는 공화당의 레이건이 전두환의 방미를 허용해주는 대가로 강력히 요청해서 사형을 면하시고 미국으로 망명하시게 되었음도 역시 기억해둘 만 하다. 레이건은 6월 항쟁 때 전두환의 두 번째 군투입도 막았음도 아울러서.

전노도당의 군사반란과 내란에 맞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다 희생되신 당시 광주시민들 등 민주영령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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