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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는 진화한다

여름이 코앞이다. 텔레비전에서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삼성전자와 엘지(LG)전자의 에어컨 광고가 잇따라 나온다. 우리나라의 가구당 에어컨 보유대수는 2013년 현재 0.78대. 에어컨 없는 집이 거의 없다. 공기청정 기능도 더해지고 에너지 효율도 더욱 높아지는 등 에어컨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냉방 성능이 월등한 에어컨의 대중화에도 불구하고 선풍기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전기요금에 대한 부담감으로만 선풍기에 대한 꾸준한 수요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인위적으로 온도를 낮춘 에어컨 바람이 싫다는 소비자들이 여전히 많다. 대기업들이 모두 선풍기 생산에서 손을 뗀 이후,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기술력으로 무장한 작은 기업들이 선풍기를 파고들었다. 그렇게 ‘자연과 가장 가까운 바람’이 탄생했다.전구를 발명한 사람은 토머스 에디슨이다. 무선통신은 마르코니, 전화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떠오른다. 그밖에 텔레비전, 냉장고 등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전제품은 대부분 대중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더라도 최초의 발명가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선풍기를 누가 발명했는지에 대해서는 쉬이 답이 나오지 않는다. <두산백과>는 1600년대 천장에 매달아 놓은 추의 무게를 이용해 기어장치의 회전축을 돌려 1장으로 된 커다란 부채를 시계추 모양으로 흔들어 바람을 일으킨 것이 최초의 선풍기이고, 1850년대 현재의 탁상 선풍기 모양으로 된 것에 태엽을 감아 사용하는 방식이 고안되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는 18세기 영국의 기술자들이 회전날개를 이용한 환기장치를 만들었고, 1880년대 뉴올리언스에 사는 미국인이 전기로 작동하는 선풍기를 처음 개발했다고 한다.

선풍기가 누구의 발명품인지 똑부러지게 말하기 힘든 이유는 선풍기의 핵심 원리가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에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바람이 불면 날개가 돌아가고, 거꾸로 날개를 돌리면 바람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류가 언제 처음 발견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중세 유럽에서 이미 풍차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 염가로 불어주는” 금성 선풍기

아직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기 전인 192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선풍기는 그다지 신기한 물건은 아니었던 것 같다. 손이나 발로 날개를 돌려 일어난 바람으로 곡물에 섞여 있는 검불 등 찌꺼기를 날려보내는 농기구 바람개비가 진작부터 쓰이고 있었다. 1923년 9월3일치 <동아일보>에 실린 여행기를 보면, 경성에서 목포로 향하는 열차에 오른 필자는 “이등차 실내가 사방이 꼭 막힌 중에 선풍기까지 고장이 있어 훈증울읍(찌는 듯 덥고 답답)함이 도리어 3등차보다 못했다”고 불평했다. 1924년 5월에는 같은 신문에 처음으로 종로전기상회의 ‘모타 선풍기’ 광고가 실렸다. 한켠에 선풍기 그림을 그려넣은 신문광고는 “뜨거운 태양열에 찌는듯한 여름날을 서늘하게 지내시려면 오직 선풍기가 있습니다”라는 문구로 독자들을 유혹했다.

엘지(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는 회사 창립 2년 만인 1960년 ‘D-301’이라는 모델명이 붙은 선풍기를 생산했다. 주요 부품을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만든 최초의 선풍기로 꼽힌다. 그해 몇몇 신문에 ‘시원한 바람 염가로 불어주는 금성 선풍기’라는 제목의 광고가 실렸다. 아직 외국 제품이 대부분인 시절이었다. 그해 5월31일치 <경향신문>은 “여름철의 더위를 잊게해주는 선풍기는 해마다 새로운 데자인(디자인)의 외국제품이 들어와 금년만해도 팔리든 안팔리든 작년보다 값비싼 것이 많은 것 같다”며 “값은 보통 3만환에서 4만5000환”이라고 보도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1960년 당시 제조업 생산종업원의 월평균 급여액이 2만6000환이었으니, 선풍기는 어지간해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이후 본격적인 산업화에 따라 대량생산이 이뤄지면서 선풍기는 빠른 속도로 보급됐다. 한국전력거래소의 ‘가전기기 보급률 및 가정용 전력소비행태 조사’ 자료를 보면 1971년 전체 표본 2500가구가 보유한 선풍기는 35대에 불과했지만, 1980년 1000대를 돌파했고, 1985년 2579대로 보급률 100%를 넘겼다. 가전제품 보급에 대한 조사가 마지막으로 이뤄진 2013년 우리나라에 보급된 선풍기는 모두 2969만5000대, 가구당 보급대수는 1.72대였다.

선풍기 생산 중단, 그 뒤 ‘130년 만의 진화’ 물결

그 세월 동안 선풍기는 가격 말고는 거의 바뀐 게 없다. 중국 등 저임금 국가에서 선풍기를 만들면서 이제 만원짜리 몇장이면 살 수 있을 만큼 값이 떨어졌다.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거의 발전이 없었다. 미리 맞춰놓은 시간에 자동으로 꺼지도록 하는 타이머 기능이나 조작 버튼을 전자식으로 만드는 등 소소한 변화는 있었지만 ‘혁신’이라고 부를 만한 발전은 없었다.

한때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주요 제품이었던 선풍기는 어느새 부가가치가 낮은 싸구려 제품으로 전락했다. 우리보다 소득수준이 낮은 동남아시아, 서아시아에서도 에어컨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한국 최초의 선풍기를 만든 엘지전자는 2005년 선풍기 생산을 중단했다. 삼성전자도 자체 생산을 그만두고 중국 등에서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선풍기를 들여왔다. 이제 선풍기는 생산자도 소비자도 별로 기대를 품을 게 없는 제품으로 전락하는 듯했다.

그런 가운데 영국의 소형가전 제조업체 다이슨(Dyson)이 선풍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깼다. 다이슨은 2009년 날개 없는 선풍기를 출시했다. 전기 선풍기가 처음 만들어진 지 ‘130년 만의 진화’라는 평가를 받았고, 미국 <타임>은 그해 ‘가장 혁신적인 제품 톱10’에 이 선풍기를 올렸다. ‘에어 멀티플라이어’라는 이름을 단 이 제품은 일반적인 선풍기라면 날개가 들어 있어야 할 둥근 머리 부분이 텅 비어 있다. 날개는 머리를 받치고 있는 원통형 받침대 안에 숨어 있다. 받침대 속에 숨은 날개가 마치 제트엔진마냥 공기를 빨아들여 머리 부분의 안쪽에 난 좁은 틈으로 내보낸다. 그러면 둥근 머리의 바깥쪽보다 안쪽의 기압이 낮아지면서 주변 공기를 다시 한번 끌어들여 받침대에서 빨아들인 것보다 몇 배 많은 양의 공기가 배출돼 강한 바람을 만들어낸다는 게 다이슨 쪽의 설명이다.

날개를 숨긴 다이슨의 선풍기는 독특한 디자인으로 눈길을 끌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를 둔 부모들이 수십년 동안 선풍기에 대해 품고 있던 불안감을 해소했다. 아이가 선풍기에 손가락을 넣어 다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이 제품은 선풍기답지 않은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미국 등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현재 우리나라 백화점에서 다이슨의 최신 모델 선풍기는 80만원대에 판매되고 있다.

‘선풍기계의 아이폰’ 발뮤다, 바람 촉감 혁신

2010년 일본의 발뮤다(Balmuda)가 선풍기 혁신의 뒤를 이었다. 발뮤다는 바람의 촉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바람의 촉감은 날개의 날이 몇개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회전날개의 날이 공기를 쪼개면서 바람이 만들어지는데, 날의 개수가 적으면 쪼개진 공기 덩어리가 큼직큼직하기 때문에 바람이 거칠게 펄럭거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반대로 날의 개수가 많으면 공기 덩어리가 작아서 바람이 부드러워지지만, 대신 바람의 직진성이 약해져 멀리까지 닿지 못한다. 이에 선풍기들은 처음에는 날이 3~4개인 날개로 시작했지만, 부드러운 바람에 대한 소비자들의 선호에 따라 한때 8날 날개까지 달았다가 대부분 5날 날개가 최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이 업계의 상식이다.

발뮤다의 선풍기 ‘그린팬’의 날개는 이런 상식을 뛰어넘었다. 날이 무려 14개다. 안쪽으로 5개의 날이 작은 원을 그리고, 바깥쪽으로 9개의 날이 큰 원을 그리는 이중 구조다. 바깥쪽에서 속도가 빠른 바람을 만들고 안쪽에서 속도가 느린 바람을 만들어, 두 종류의 바람이 부딪히게 해 소용돌이 성분은 사라지고 공기가 넓은 공간으로 천천히 이동하는 자연스러운 바람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발뮤다 쪽의 설명이다.

바람의 최대 도달거리도 10m 이상으로 보통 4.5m 수준인 기존 선풍기들의 2배 이상이라고 한다. 또 이 날개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억제해 선풍기의 동작음이 “나비 두 마리의 날갯짓 소리와 같은” 13데시벨(㏈)에 불과하다고 발뮤다는 자랑한다.

발뮤다는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뛰어난 디자인으로 사람들에게 소중한 것이 되지 못하면 금세 버려져 쓰레기가 되고 환경에 부담이 된다는 제품철학을 내세우는 발뮤다의 그린팬은 레드닷, 굿디자인, 아이에프(iF) 등 세계 3대 디자인상을 휩쓸었다. 덕분에 그린팬은 ‘선풍기계의 아이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13년 국내에 처음 출시된 그린팬은 현재 백화점에서 49만9000원에 팔고 있다.

에어컨 바람 꺼려, ‘약한 바람’ 선풍기 선호

발뮤다의 그린팬은 ‘약한 바람’이라는 선풍기의 새로운 지향을 분명히했다. 에어컨이 보편화된 요즘 선풍기를 찾는 이유는 물론 전기요금에 대한 우려도 있지만, 에어컨의 찬 바람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특히 노인이나 어린 아기를 둔 부모 등이 에어컨을 꺼린다.

‘약한 바람’을 만들기 위한 조건은 모터를 천천히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기존 선풍기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해온 교류(AC)모터는 이론적으로 분당 회전수(rpm) 1800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약한 바람을 만들기에는 너무 빠르다. 억지로 1000rpm 이하로 떨어뜨리면 에너지 효율도 떨어지고 일정한 안정적 속도로 돌지 못한다. 발뮤다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류(DC)모터를 도입했다. 전자회로를 통해 모터에 들어가는 전류의 크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직류모터의 장점이다.

1964년 처음으로 선풍기용 모터 국산화에 성공한 한일전기도 이런 흐름을 충실하게 좇고 있다. 하지만 발뮤다와 달리 직접 모터를 생산하는 기업인 한일전기는 교류모터를 이용한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한일전기 김영철 상무는 “직류모터는 가정으로 들어오는 교류 전류를 직류로 바꾸는 과정에서 전자적 소음이 생긴다. 또 특정 회전수 대역에서 진동이 생기기도 한다. 공학적으로 보면 교류모터가 소음이 더 작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결국 한일전기는 교류모터의 분당 회전수를 300까지 낮추는 데 성공했고, 이를 통해 나뭇잎이 살짝 흔들릴 정도인 초속 0.65m의 약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선풍기 바람으로 인한 체온 저하를 걱정할 필요가 없고, 서울수면연구센터 인체시험을 통해 더 빨리 잠들고 더 오래 자는 효과가 입증됐다는 게 한일전기 쪽 설명이다. 이 기술은 2013년 대한민국 신기술 혁신 대상을 수상했다. 한일전기는 이 기술을 적용한 제품에 ‘아기바람 선풍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델에 따라 6만~11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롯데하이마트 류준형 대리는 “국내 선풍기 판매량은 해마다 400만대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들어 수면중에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고급형 제품에 대한 관심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바닥으로 가라앉는 찬 공기를 순환시켜 에어컨의 냉방효율을 더 높일 수 있는 공기순환기도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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