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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여섯 김구라, 이유있는 ‘진화'

  • 박수진
  • 입력 2015.05.16 13:42
  • 수정 2015.05.16 13:44
ⓒosen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방금 전까지 스테이크를 바짝 익히는 것을 ‘웰던’이라고 부르냐 ‘웰빙’이라고 부르냐 농담을 나누던 분위기였는데, 김구라가 표정을 구기고 대본 소화를 거부한 순간 스튜디오 안에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가수 육중완의 상식 부족을 놀리던 문화방송 <라디오스타>의 분위기가 김구라 때문에 돌연 같은 방송사의 <100분 토론>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얼마 전에 방송에서 ‘태정태세문단세’를 동현이한테 시켰는데 애가 모르는 거야. 나는 안일하게 ‘얘가 무식한 걸로 방송 분량을 빼내야겠다’ 했는데, 애가 끝나고 나서 그러더라고. 아빠, 나 무식한 거로는 이제 그만 가자.” 김구라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주변 엠시들의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이게 어떻게 보면 가장 단순한 거예요. 무식한 거로 웃기는 거. 이런 것들이 자꾸 예능 쪽으로 희화화되니까, 이게 가장 낮은 패턴의 그런 거(개그)잖아요.” 엠시들부터 육중완 본인까지 웃어넘기자고 만류하는데도, 김구라는 웃음기 하나 없이 “이런 건 이제 그만해야 한다”고 거푸 강조했다.

신기한 일이다. 불과 몇년 전만 하더라도 김종민과 김형준, 광희를 한자리에 모아놓고는 남자가수 백치미 특집을 열었던 프로그램, 개중에서도 가장 독한 질문들을 던지는 사회자 아닌가. 그런 김구라가 대놓고 대본 소화를 거부했다. 사전에 조용히 제작진한테 “나 이거 못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그는 굳이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을 때 그 의사를 한 음절 한 음절 꾹꾹 눌러 선언하듯 밝혔다. 따지고 보면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긴 있다. 2012년도 에스비에스 <스타주니어쇼 붕어빵>에 아들 김동현과 함께 출연했을 때도 김구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부터 방송을 하느라 책보다 대본을 많이 봐 지식이 부족한데, 아들의 무식함을 방송 소재로 사용한 내 잘못도 크다.” 그러나 3년 전의 고백이 오롯이 아들 김동현을 향한 미안함이었다면, 지금은 아들의 항의로부터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반영한다. 내 자식이 불쾌해할 만한 일이라면 다른 이들 또한 불쾌할 거라는 어떤 깨달음.

물론 김구라는 여전히 독하고 직설적인 멘트를 던지는 예능인이다. 김구라는 그만 좀 이야기하라는 만류에도 “팩트 아니냐”고 맞받아치며 서장훈이 소유한 건물의 가격을 이야기하고, 심심찮게 상대의 외모를 놀린다. 그건 분명 김구라가 성공을 거둔 시대와도 연결된 인식이리라. 각자도생이 적극 권장되던 2000년대 중후반, 루저의 자리에 서서 강자들을 ‘씹고’ 자신보다 못난 사람들을 비웃으며 노골적으로 욕망을 전시하는 김구라의 화법은 시대의 욕망을 간질이는 구석이 있었다. 김구라 이전엔 게스트에게 “자가냐 전세냐”를 묻는 토크쇼 호스트는 없었으므로. 경제적 타격과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 막중한 스트레스를 견뎌야 했던 수많은 동시대인들은 할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금기를 넘나들며 속물성을 과시하는 김구라의 언행에서 대리만족을 느꼈다.

지상파 커리어의 절반가량을 험악한 말을 내뱉던 과거를 사과하는 데 썼음에도, 정작 하는 이야기의 기본 패턴은 크게 바꾸지 않았다. 돈과 학벌에 대한 노골적인 욕망과 호기심, 프로그램 분당 시청률에 대한 전략적인 분석과 접근, 외모와 지식에 대한 비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성공을 거둔 방법에 대해선 좀처럼 의문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성공이란 결과가 자신이 겪어온 과정을 정당화해주고,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 생각은 확신으로 변한다. 그것이 많은 이들이 사회의 부조리에 눈감고 적당히 동조하는 것을 ‘사회생활 잘하는 법’으로 포장해 아랫사람들에게 전수하고, 그에 대한 비판을 마주하면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당황하는 이유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건지, 마흔여섯이 된 어느 날 김구라는 자신의 간판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말고 갑자기 카메라 앞에서 “나 이제 무식한 걸 놀리는 식으로 사람을 웃기진 않겠다”고, 더 이상 자신이 성공을 거둬왔던 방식을 고수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렸다. 물론 그가 부당하게 농담의 소재로 삼는 것들은 아직 많지만, 적어도 누구에게 등 떠밀린 게 아니라 스스로의 깨달음에 힘입어 뭔가 고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평생 견지해온 사고방식을 바꾸게 한 걸까? 어쩌면 최근에 그가 맡은 몇 개의 프로그램이 그의 심경을 조금쯤 바꾼 건지도 모른다. 김구라는 최근 시작한 <마이 리틀 텔레비전>를 통해 실로 오랜만에 두고 온 고향인 인터넷방송으로 돌아왔다. 인터넷방송의 조상 격인 사람이니, 처음엔 모두 그가 마냥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구라가 한창 인터넷방송을 하던 시절 <김구라 황봉알의 시사대담>은 녹음방송이었고, 방송이 나간 뒤 함께 욕을 먹는 건 아들이 아니라 동료인 황봉알, 노숙자였다. 자신의 방송에 대한 피드백을 늘 댓글로만 접하다가 멘트 하나하나에 실시간으로 달리는 반응을 라이브로 보게 된 순간,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들의 지식 결여를 농담의 소재로 삼는 순간 채팅방의 네티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라이브로 확인하는 경험이 “나 무식한 거로는 이제 그만 가자”는 아들의 말에 수긍하도록 만든 건 아닐까? 자신이 놀린 대상이 감당해야 할 대중의 반응을, 어림짐작으로 넘겨짚은 게 아니라 옆에서 실시간으로 함께 체험했을 테니.

비슷한 시기 새로 시작한 에스비에스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이하 <동상이몽>)는 또 어떤가. 자식과 부모 간의 갈등을 각자의 입장에서 담아낸 영상을 함께 보고 오해를 풀어나가는 이 토크쇼는, 무심코 던진 사소한 말들이 어떻게 상처를 내고 마음에 벽을 쌓아 올리는지를 탐구한다. 65분이란 방영 시간 안에서 어떻게든 부모 자식이 화해하는 모습을 만들어내야 하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작위적인 부분이 곳곳에 밟히지만, <동상이몽>의 핵심은 같은 사안을 상대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어떻게 보이는가를 비교하고 역지사지를 해보는 것에 있다. 상대의 자리에 가서 서보는 것, 내가 상대의 입장이라면 어떨지 상상해보는 것. 이것이 김구라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단언하긴 어렵다. 그러나 평생 분당 시청률을 분석하고 여론의 흐름을 살피며 제3자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김구라가, 서로가 상대의 입장에 서볼 것을 권장하는 프로그램 <동상이몽>을 시작한 뒤 김동현의 말을 예능인으로서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은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상대에 대한 편견을 깨고 비하를 거두는 것은 막연히 ‘그러면 안 된다’는 인식이나 ‘그런 편견을 견지했다간 욕을 먹으니 자제해야 한다’는 경계심으로만 가능한 일은 아니다. 막연한 인식은 시혜적인 시선을 배제하기 어렵고, 사회적 양식에 맞춰야 한다는 경계심은 자기 검열의 허들을 높일 뿐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 일깨워 주지는 못하니까. 편견을 버리는 것은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의 자리에 자신을 대신 세워 생각해볼 수 있는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온 무슬림 숨에게 억지로 돼지고기를 먹이는 시장 상인들의 민낯을 고발하는 한국방송 <이웃집 찰스>를 보며 제3자의 자리에 서서 속 편하게 시장 상인들을 욕하는 대신, 숨의 시야로 바라본 나의 행동은 어떨까를 상상해볼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리고 김구라는, 적어도 이 사안에서만큼은 상대의 자리에 서서 자신을 되돌아본 것으로 보인다. 공부와 담을 쌓은 아들을 답답해하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한 게 아니라, 그 토로와 대중의 피드백을 공개석상에서 견뎌야 하는 방송인 김동현의 자리에 서서.

고작 발언 하나 가지고 김구라가 엄청난 진화를 했다고 이야기하려는 것도, 하루아침에 자신의 스타일을 다 버릴 거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엊그제 스스로를 교정한 그가 내일 다른 프로그램에서 다른 편협함을 드러낼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렇다면 나 또한 어떤 창구로든 그에 대해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한번 경험해본 것과 그러지 않은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김구라는 상대의 자리에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는 오래 견지해온 자신의 편협함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교정하는 일을 해냈다. 뭐든 첫발을 내딛는 일이 어렵지, 그다음 걸음부턴 한결 쉬워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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