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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쿠데타 이야기

박정희는 쿠데타를 하면서 이른바 '혁명공약'을 발표했고 그 마지막에서 참신한 민간 정치인에게 정부를 이양하고 자신들은 군으로 복귀하겠다는 취지로 천명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최종적으로 스스로 군복을 벗고 직접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이런 약속을 어겼고("이 땅에 나같은 불행한 군인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드립을 전역식에서 치더니만 뒤로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키웠;;) 군정 3년 간에도 여러 번 약속을 번복했다. 정부의 발표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풍조가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된 것에는 박정희의 이러한 민정이양/군정연장 공약의 잦은 번복이(이승만의 서울사수 녹음방송과 함께)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아닌가 싶은 느낌적 느낌이고 이게 박정희의 가장 큰 적폐; 중 하나라고 하겠다.

  • 바베르크
  • 입력 2015.05.16 11:30
  • 수정 2016.05.16 14:12

54년 전 오늘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날이다. 정말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 땅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이 5.16 군사쿠데타가 오늘 이 블로그 포스팅의 소재가 되겠다.

우선 쿠데타와 혁명의 개념 정리부터 해보자. 왜냐하면 박정희와 그 추종자들은 쿠데타가 일어난 54년 전 오늘부터 지금까지도 5.16을 '군사혁명'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5.16쿠데타와 이후 18년 간의 박정희 독재를 그린 소설 [그해 5월]의 작가 이병주 선생님께서는 혁명은 체제를 바꾸는 것(예컨대 왕정을 전복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는 경우로 부패한 파루크 왕정을 타도한 이집트 나세르의 군사혁명 같은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고 하신다)이지만, 쿠데타는 체제는 그대로 두고 정권만 빼앗겠다는 수작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기준으로는 박정희가 일으킨 5.16은 쿠데타에 지나지 않는다. 박정희는 장면 총리의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쿠데타 후 군정을 실시한 다음(뒤에서 살펴 보듯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는) 대선에 출마해 대통령이 되었으니까.

반면 박정희와 그 추종자들은 5. 16을 군사혁명으로 부르고 1990년대 후반 이후 가장 강력한 박정희 옹호 이데올로그가 된 조갑제 기자 같은 이는 박정희를 보릿고개를 없애고 더 이상 배를 곯지 않게 한 산업화의 공로가 그에게 있다며 심지어 '근대화혁명가'라고까지 부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혁명과 쿠데타를 구분하자는 것이야말로 박정희가 한때 몸담기도 했으나(웃음) 5.16쿠데타를 일으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겠다고 했던, 공산주의의 역사관인 유물사관적 관점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알베르 쏘불은 그의 [프랑스혁명사]에서 인류역사상 대표적 혁명 중의 하나인 프랑스대혁명을 다루면서 대혁명이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한 것에만 주목하지 않고 진정한 혁명이란 "재산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마르크스 자신이 저서 [자본] 1권(총 3권-칼 카우츠키가 편집한 [잉여가치학설사]를 포함하면 모두 4권인 [자본] 중 마르크스 생전에 출판된 것은 1권이 유일하다)의 주제를 담았다고 할 수 있는 소위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전망을 다룬 유명한 구절에서 "착취하는 자가 착취당한다"고 간명하게 정리한바 있다.

즉 박정희와 지금 이 시점까지도 우리 사회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박정희의 추종자들이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언필칭 그들이 집권 및 집권 연장의 수단으로 찬장 속의 상비약처럼 써왔던 반공(反共)이라는 입장과 어찌 보면 정면으로 반하지 않느냐는 것^^ 공산주의의 핵심 논리인 사적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이들의 뒤틀린 논리만큼이나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에 의하여 우리의 현대사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럼 54년 전 오늘의 상황이 어떠하였는지 잠시 과거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시작하며 제일 먼저 노린 곳 중 하나는 방송국이었다.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국민들이 부지기수던 당시라 방송국이라고 해보았자 TV도 아닌 라디오방송국이었지만 박정희는 방송을 장악해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라디오를 켠 국민들은 "은인자중하던" 군부가 "구국의 결단"을 내려 "군사혁명"을 일으켰다는, 박정희가 이끄는 쿠데타 세력의 일방적인 주장을 접하게 되었고 그것이 박정희 18년 독재의 시작이었다.

이제 우리는 5.16 쿠데타의 상징처럼 보이는 아래 사진에 숨겨진(응?) 진실을 찾아보기로 하자.

가운데가 박정희, 그를 기준으로 바라보는 사람 입장에서 왼쪽에 박종규와 오른쪽에 차지철이다. 박종규와 차지철은 둘 다 박정희의 경호실장을 지냈고 박종규는 육영수. 여사님 암살사건을 막지 못해서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 그 후임자 차지철은 유신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권세를 휘두르다가 운명의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에서 박정희와 동석했다가 그를 지키지 못하고 죽는다. 즉 두 경호실장은 위 사진에 나와 있는 험상궂은 모습과는 달리 실은 독재자와 그의 부인을 지키지 못한-_- 무기력한 모습만 보여 주었으니 이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이 있을까?

하여간 마치 박정희 18년 독재를 상징하는 것 같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에 찍힌 것 같은 이 사진은 과연 어떤 맥락에서 찍힌 것일까?

[비록(秘錄) 박정희시대]의 저자인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을 지낸 이상우 기자님은 이 사진에 얽힌 비밀을 알려주는데 이 날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박정희가 아니라 사진 뒤 단상에서 일장연설을 하던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이었다! 박정희는 장도영을 쿠데타 지도자로 떠받들고는 2인자인 척 처신하며 단상 아래에서 자신의 심복들과 기다리는 중이었던 것이다.

장도영은 누구인가?

박정희 일당이 방송국을 점거하던 무렵인 1961년 5월 16일 이른 아침 의원내각제를 택한 당시 제2공화국의 정부 수반인 장면 국무총리는 집무실 겸 숙소로 썼었던 반도호텔에서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과 전화통화를 한다. 장도영은 쿠데타가 일어날 경우 이를 막을 책임이 있는 말하자면 '컨트롤타워';.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은 국무총리 장면에게 "박정희가 좀 장난을 치고 있길래 하지 말라고 하고서 한강 다리에서 막고 있습니다. 별일 아니니 걱정마십시오."라고 '보고'한다. 무장한 군인들(박정희가 동원한 것은 해병대)이 서울시내에 출몰했는데 정부와 국민을 지킬 책임이 있는 '컨트롤타워'인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의 보고는 너무나 태평하고 한가로운 느낌적 느낌이다.

장면 국무총리는 좀 이상했지만 장도영이 하도 호언장담하길래 일단 안심한다. 그러나 이어서 다급하게 쿠데타군이 자신을 잡으러 온다는 어이없는 소식이 들려온다. 12년 간의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19민주혁명 후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로 구성된 제5대 국회에서 의원내각제 하의 정부수반인 국무총리가 된 민주당의 장면은 이런 합법정부를 파괴하려는 박정희의 쿠데타 소식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장면 국무총리는 도망쳤다-_-;

민주당의 장면총리는 54년 전 오늘 일어난 박정희의 쿠데타 소식을 듣고 그가 머물던 반도호텔에서 하도 황급히 달아나느라고 심지어 그가 평소에 쓰고 다니던 안경마저 떨어뜨리고 도망쳤다. 그리고 그는 박정희의 쿠데타 세력이 4. 19 민주영령들의 피로 이룩한 제2공화국을 짓밟고 국민들이 표로 만들어준 그의 정부를 철저히 파괴하고 있는 동안에 이를 진압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외부에 어떠한 구조요청도 하지 않고서 그냥 수녀원에 무기력하게 숨어 있었다.

얼마 후 모든 상황이 종료된 다음 국무총리 장면은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 쿠데타세력들에 의해 끌려 나와 4. 19 민주영령들의 죽음과 국민들이 소중한 주권을 행사한 선거 결과 탄생한 그의 민주당정부가 해체되었음을 선언했다. 제2공화국의 총리 장면은 여전히 안경을 쓰지 못한 채였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국민들이 다시 거리로 나서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27년 간의 군부독재의 억압 속에 시달리게 되고 이렇게 국민이 쥐어 준 정권을 무기력하게 포기한 민주당 계열의 정당은 6월 항쟁으로부터도 10년이 더 지난 다음에 김대중 전 대통령님께서 당선될 때까지 집권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제2공화국의 육군참모총장 장도영도, 박정희가 장난치는 것을 막고 있다고 했으니 이때쯤이면 군부쿠데타세력들에게 체포되어 구금 후 모진 고문이라도 당하고 있었으려나? 노노..그는 박정희와 '요담' 후 '군사혁명'을 선두에 서서 이끌기로; 한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반군이 반란성공으로 관군이 된 예는 있지만(예를 들어 고려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합법정부의 육군참모총장이 반군의 지도자가 되기로 한-_- 장도영과 같은 예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장도영은 쿠데타 성공 후 모두 다섯 개의 감투를 썼는데(육참총장, 계엄사령관, 내각수반,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등등) 헌정파괴세력을 막아야 할 정부 수반 장면은 달아나서 수녀원에 숨고 진압해야 할 육참총장이 반란군의 수괴가 되다니 서글프고 참담한 제2공화국 민주당 정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민주당 정부의 가장 큰 어른은 의원내각제라서 상징적 권한밖에 없지만 그래도 국가원수인 대통령 윤보선. 그는 박정희의 쿠데타를 어떻게 맞았는가?

쿠데타 소식을 듣자 (이를 전해 준 쿠데타군의 유원식 대령은 어찌된 일인지 윤보선과 구면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라고 했다-_-; "올 것이 왔구나"라니 윤보선 자신이 국가원수고 민주당 정부의 제일 윗어른인데 이를 무너뜨리겠다는 군부쿠데타에 대한 반응이 "올 것이 왔구나"라니!?! 기다렸다는 말인가?! 당해도 싸다는 말인가?!

이 묘한, 유체이탈의 중의적 화법 때문에 윤보선은 5.16 쿠데타와 관련해서 쿠데타 세력들과의 사전 내통설에 시달리고 윤보선이 민주당의 비노 아니; 구파(舊派) 출신으로 장면총리의 신파(新派)와 치열하게 싸웠다는 점 때문에 더욱 의심을 받았다(윤보선 본인은 물론 강력히 부인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일단 자세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윤보선이 5.16 쿠데타 후에도 약 1년 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음만 지적해두기로 한다. 덕분에 쿠데타세력은 외국정부들에 자신들을 승인해 달라고 번거롭게 다시 요청할 수고를 절약했다. 국가원수가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5. 16은 기묘한 군사쿠데타였다. 쿠데타가 일어났단 소식에 국무총리는 달아나고 대통령은 유체이탈 화법(논란이 있지만) 구사 후 가만히 있었고 진압책임이 있는 육참총장은 쿠데타에 가담이라니!!!

이런 군부 쿠데타에 대한 반대세력은 없었나? 있었다.

남한 정치의 최후의 흑막(쿨럭;)이고 모든 음모론의 배후에 있는 최종 보스(뭐래니?) 바로 미국. 우선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은 군부쿠데타 진압 명령을 내렸다. 참담한 일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달아나거나 멍때리는 순간에 남의 나라의 장군이 그 쿠데타를 진압하라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5.16 쿠데타 당시에 전시든 평시든 작전권을 미군이 쥐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문민(민간 정치인)의 군부통제가 확실했던 미국 민주주의를 매그루더 장군은 그야말로 교과서적으로 확실하게 집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럼 매그루더장군의 이런 호소에 호응했던 의인(義人)이 한 명이라도 우리 국군에는 없었는가!? 우리 국군의 명예를 위해선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5.16 군부쿠데타에 반대 의사를 밝힌 고위 장성이 한 분 있었으니 그는 바로 당시 1군 사령관이던 이한림장군.

이한림장군은 쿠데타 소식을 듣고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 요청도 있고 해서 진압에 나서기 위해 준비를 마치고 서울로 진격하시려 하였으나 명령을 내려줄 한국정부 측의 수뇌부가 아무도 연락이 닿지 않아ㅜㅗㅜ 출동을 연기했다 안타깝게도 체포되셨다;

기억을 되살려 소설가 이병주 선생님께서 소설 [그해 5월]에서 묘사하신 이한림장군에 대한 '혁명재판'의 웃픈 진행 내용을 재생해 보기로 한다.

(소위 군사혁명검찰관 이하 검찰관) 당신은 왜 군사혁명에 반대했나?

(이한림장군) 쿠데타에 반대하고 정부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 군인된 자의 의무 아닌가?

(검찰관) 구국의 결단인 5.16군사혁명의 대의를 알았다면 반대하기 어려웠을 텐데?

(이한림장군) 나는 혁명공약의 내용이 뭔지 몰랐다.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불순세력일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검찰관) 박정희장군이 군사혁명을 이끈 건 알았나?

(이한림장군) 알았다.

(검찰관) 박정희장군이 군사혁명 지도자라면 당연히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그분 평판상 올바른 일임을 깨닫고 즉시 지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필자주:우웩-)

(이한림장군) 박장군이 주모자라면 무조건 지지해야 하나? 나는 군인이고 내 임무는 정부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었고 쿠데타를 박정희 장군이 이끌든 말든 그 성격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난 내 임무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하 생략)

결국 이한림장군은 군부쿠데타에 반대한 '죄'로 처벌되었다-_-

그러면 미국은 왜 박정희의 5.16 쿠데타 초기에 이에 반대하였는가?

쿠데타 직후 독일의 신문에 "아시아에서의 미국 민주주의의 쇼윈도우가 박살났다"라는 기사가 실렸다는 말처럼(이병주 선생님의 소설 [그해 5월]) 4.19 민주혁명으로 으쓱했을; ("우리 군인들 5만명이 피를 흘려 지킨 남한이 예전엔 늙은 독재자 싱만 리 때문에 찜찜했는데 이제 민주국가니까 소련 니들 잘 봐도!") 세계 민주주의의 참피언이자 자유세계의 영도자(쿨럭;) 미 제국의 자존심이 손상돼서 기분 나빴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는 실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1946년 대구 10월 폭동에 참여했다가 죽었고 박정희 자신이 남로당의 비밀 조직원으로 군대 내에 암약했다가 1948년 14연대 반란사건으로 인한 숙군 작업 때 발각되어 처형 위기에 몰렸다가 연루자들을 다 불고 살아난 좌익전력 때문에 쿠데타의 성격을 의심한 것이었다. 미국이야 자기네 앞마당인 남미에서 쿠데타가 뻔질나게 일어나는 걸 봤고 남미 군부출신 집권자 중에서는 페론처럼 좌파 성향인 사람도 있었으니 혹시나 5.16 군사쿠데타 주모자들도 좌익성향이지는 않았나하는 의구심을 가진 것이었다.

실제 북한도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 성격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친구이고(그래서 분명 박정희도 알았을 가능성이 있는) 월북했던 남로당 출신 황태성을 간첩으로 내려보냈다. 황태성은 쿠데타세력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곧 체포되었고 구금되어 있다가 박정희가 '민정이양' 후 대통령에 당선되자 사형에 처해졌다.

미국이 여기에 작용했을까? 박정희는 좌익적 사고방식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을까? 여기에 대해 우리는 좀 뜻밖의, 당대의 어느 목격자의 얘기를 들어보자.

리영희 기자.

5.16 쿠데타 당시 합동통신 기자였던 리영희는 그의 자서전 [역정]에서 쿠데타 직후 박정희가 취한 정책들에 대해서 흥미로운 관점을 보여주는데 박정희가 "장롱 속의 자금들을 동원해 경제발전에 쓰겠다"고 했던 어이없는 "화폐개혁"을 추진한 것이나 깡패들에게 "나는 깡패입니다"라는 팻말을 목에 걸게 하고 거리를 행진시켰던 일 같은 것들에 대해, 그리고 리영희 자신 같은 부패하지 않은 기자를 박정희의 미국 방문 수행기자단에 포함시킨 것에 대해(쿨럭;) 긍정적인 취지로 묘사;하였다.

남한의 대표적 좌익 성향 지식인 리영희조차도 이렇게 잠시;나마 헷갈리게 한 박정희는 그럼 어떻게 하여 미국에게서 그 반공주의의 순수함을 인정받았는가?

박정희는 대대적인 혁신계(당시에 좌파를 부르던 용어) 인사 검거-_-로 반공주의를 증거한다ㄷㄷㄷ 대대적인 검거선풍이었다. 교원노조, 좌익전력이 있다가 전향했으나 6.25 때 희생된 보도연맹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자고 하던 분들, 민주당 정권 하에서 활발히 움직이던 혁신계 정당 당원들, 진보언론인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등 모두 잡혀갔다-_-;

그리고 박정희는 '혁명재판소'를 만들어 이들 중 상당수를 처형ㅠ 민주당 정권이나 독재자 이승만조차도 사형집행을 미뤄왔던 오래된 사형수들도 모조리 찾아내어 사형을 집행했다. 박정희는 사형집행을 미룬 것을 '구악'이라고 보았던 모양; 여러 해 동안 사형을 미뤄 온 사형수 사건에 혹시 다시 살펴 볼 점이 없는지 하는 생각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사형수지만 몇 년간 집행이 미뤄져서 한가닥 희망을 가졌던 가족들은 박정희의 쿠데타 후에 송장을 찾아가라는 통보를 받았다(이병주, [그해 5월]).

이병주 선생님의 소설 [그해 5월]에는 이렇게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에 붙잡혀 가고 감옥에 갇히고 처형당한 이들과 그 가족/유족들의 한숨과 절망이 곳곳에 스며있다. 다행히(?) 박정희의 군부쿠데타 세력은 자신들의 '혁명재판'을 자랑;하기 위해서 '혁명재판기록'을 책으로 펴냈고 몇 십권(?)이 되었을 이 기록을 당신 자신이 신문에 쓴 논설 두 편 때문에 10년형을 받았다가 군정 기간 내내 감옥에 갇혀 있었던 이병주 선생님이 읽고 분석해서 바로 이 소설 [그해 5월](한길사)에 수록했다.

그리고 이 기다란 검거자 명단에는 '군사혁명' 초반에 무시무시한 명령들을 발령하던 국가재건최고위원회 의장 장도영도 끼어 있었다. 이용가치가 떨어졌다는 판단이 들자 박정희는 장도영을 '반혁명세력'으로 몰아(처음에는 그가 군사혁명을 영도했다고 하더니만, 쿨럭;) 감옥에 가둔다-_-

이제 조금 거슬러 올라가 민주당정권의 무능 때문에 '군사혁명'을 일으켰다는 박정희 및 그 동조자들의 주장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박정희가 쿠데타를 꿈꿔 온 것은 오래된 일. 그는 실은 이승만 정권 내내 쿠데타할 생각을 품어왔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승만은 그의 형을 죽였고 그를 죽이려고 했었다. 동지들의 이름을 탈탈 털어 놓고 박정희는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그로 인해서 여친은 도망쳤고 박정희는 실직자가 되었다가 군무원 비슷한 자리로 군대에 겨우 복귀했고 이승만 정권 내내 한직으로 돌았다. 그는 이종찬장군에게 쿠데타를 권유했었고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혼자 쿠데타를 꿈꾸었다.

그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기 전부터 민주당정권의 파괴를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민주당정권이 무능하고 바보 같아서 박정희에게 당한 것이 맞고 그 피해는 국민들이 봤지만 그렇다고 해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라고나 할까.

박정희는 쿠데타를 하면서 이른바 '혁명공약'을 발표했고 그 마지막에서 참신한 민간 정치인에게 정부를 이양하고 자신들은 군으로 복귀하겠다는 취지로 천명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최종적으로 스스로 군복을 벗고 직접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이런 약속을 어겼고("이 땅에 나같은 불행한 군인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드립을 전역식에서 치더니만 뒤로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키웠;;) 군정 3년 간에도 여러 번 약속을 번복했다. 정부의 발표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풍조가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된 것에는 박정희의 이러한 민정이양/군정연장 공약의 잦은 번복이(이승만의 서울사수 녹음방송과 함께)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아닌가 싶은 느낌적 느낌이고 이게 박정희의 가장 큰 적폐; 중 하나라고 하겠다.

박정희 독재 18년을 다 다룰 수는 없는 일이고(쿨럭;) 5.16 쿠데타 후의 군정 3년만 다루는 것도 벅차니 몇 가지 토픽만 더 건드리고(응?) 마무리하기로 하자.

우선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얘기부터. 남한 내에서 활동한 미국 CIA의 역사를 다룬 "한국 내의 미 CIA"라는 기사를 썼다가 80년대 중반 월간조선의 조갑제 기자는 전두환정권으로부터 일종의 집필금지조치를 당하는데 다음의 사연은 거기 실렸던 얘기로 기억한다.

정보기관의 필요성은 장면 국무총리의 민주당정권도 공감하였던 바였기에 미국과 협조하며 이를 만들어 두었는데 의미심장하게도 그 책임자가 이후락이었다. 5.16 쿠데타가 터지자 민주당정권 인사들이 체포, 구금되는 와중에 이후락도 연금(?)상태가 되었는데 정권을 장악한 쿠데타 세력의 2인자 김종필은 이후락의 정보기관에 강한 흥미를 느껴 이후락을 면담하고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의 지식과 경험을 흡수한다. 그리고 이후락이 누구던가! 박정희 정권 때 바로 이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며 그 자리에 있었던 김종필이 자의 반 타의 반 외유를 떠나야 했고 그 다음에 중정 부장이 된 인사들 중 김형욱은 실종됐으며 김재규는 박정희를 쏘아 죽이고 처형되는 그런 후덜덜한 상황에서 온갖 권세를 누리고도 유유히 그 자리를 걸어나와서 그만두고 "떡을 만들다 보면 떡고물이 손에 묻는 법"이라며 자신에 대한 권력형 부정축재 논란에 대꾸한 강철 멘탈의 소유자 아니던가!

쿠데타 때문에 망한 전 정권 출신으로 연금된 상태였지만 이런 희한불금의 생존능력을 가진 이후락이 신정권의 2인자 김종필에게 자신이 거느렸던 정보기관을 설명하는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였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부장이 되었고, 이후락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위원회' '의장'의 공보비서가 되었다. 이후락이 공보비서를 하면서 요새 삽질하는 그 자리에 계신 분들과 비교하면 정말 날라다녔다고 할 정도로 맹활약한 얘기를 자세히 쓰고 싶은 유혹이 있으나 그랬다간 이 글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으니-_-; 중앙정보부 얘기에 집중하기로 하겠다.

김종필은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그 영문 약칭을 KCIA라 했으나 미국 CIA처럼 해외 정보수집과 공작을 한 것이 아니라 국내 정치에 깊숙히 관여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화당 사전창당. 부패한 구태정치인들을 규탄하며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와 김종필은 그런 자유당/민주당 인사들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켜 그들의 손발을 꽁꽁 묶어 놓고는 자신들이 정치를 할 정당인 공화당을 이 중정을 이용해 몰래 창당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즉 정부를 참신한 민간 정치인에게 넘기고 군에 복귀하겠다는 그들의 '혁명공약'은 애저녁에 개뿔;이고 총칼로 빼앗은 정권이니 절대 호락호락 넘기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던 것. 집권당을 몰래 만드는 일이니 돈은 또 얼마나 많이 들었겠는가! 그래서 중정은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이라는 것에 관여했다는 흉흉한 소문을 남겼고 또한 박정희에 대한 정치적 반대파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의 첨병이 되었으니 이렇게 출범한 중정의 유산은 다들 아시다시피 2015년 이 순간까지도ㅜㅗㅜ 이 땅에 계속 남아있다-_-

다음은 박정희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대해 한 가지만 지적하기로. 흔히 이승만 정권의 반일 기조를 박정희가 만난을 무릅쓰고 바꾸었다고만 알려졌으나 실은 장면총리의 민주당 정부에서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교섭은 계속 중이었다. 쿠데타가 나기 직전에 일본 정부의 대표단은 서울을 방문해 민주당 정부하에서 남한이 이승만 독재의 유산을 털고 덜컹거리기는 했지만 정상국가(응?)가 되어 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관찰하고 이제 제대로 국교정상화 교섭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에 차서 돌아와 이를 보고 하는 도중에 서울에서의 쿠데타 소식을 듣고 경악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한일국교 정상화는 아시다시피 이런 정상적 외교경로가 아닌 밀실에서의 막후 협상이니 박정희의 만주국 인맥이니 일본 육사 인맥이니 하는 비정상경로로 진행된다.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라지만 민주당정부가 계속해서 대일 국교정상화 교섭을 추진했다면 한일관계도 그렇게 첫단추를 잘못 꿰어서 지금까지도 뒤틀려 있게 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아쉽다. 아무래도 국민의 표로 얻은 정권이 아니라서 무리하게 나선 결과 이 한일국교 정상화 과정에서도 졸속인 점이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

할 말은 아직 산더미 같지만ㅜㅗㅜ 박정희 독재 기간 중 그의 최대 정적이 되는 김대중 전 대통령님과 5.16 쿠데타의 악연을 소개하며 마무리하기로. 김대중 전 대통령님께서 정계에 입문해 야당의 당료 생활을 하시며 지내시다가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셔서 천신만고 끝에 당선되신 것이 강원도 인제(?)의 보궐선거. 그 선거는 1961년 5월 16일 직전에 있었고-_- 등원의 꿈에 부풀던 초선의원 김대중이 국회에 등록하기 위해 왔을 때 바로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이다ㅠㅠ 당근 박정희는 국회도 해산시켜 버렸는지라 김대중 전 대통령님께서 금배지를 다시겠다는 소망은 이렇게 또 다시 어처구니없게 무산되고 그는 고단한 원외당료의 생활을 계속 이어가게 된다. 나중에 그의 목숨까지 노리게 되는 독재자와 그 독재자의 최대 정적 김대중 전 대통령님과의 악연도 1961년 5월 16일 이렇게 시작된 셈이다.

급(?)결론을 내리자면 5.16 쿠데타는 정말 유감스럽고 짜증나게도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리고 쿠데타를 맞을 당시 허둥지둥 대응하던 합법 민간정부의 한심한 대응 또한 작금의 사태를 닮은 것 같아 그저 참담하고 소름끼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신한 군인들이 나서서 구악을 일소하겠다"던 자들이 군정을 실시하자마자 "신악이 구악 뺨친다"라는 비아냥거림을 낳을 정도로 바뀌어 간 것을 보면, 그리고 그 적폐-_-가 아직도 이어지는 지경인 것을 살펴보면 결국은 더디고 답답해 보여도 정치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참여가 답일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 노무현 전 대통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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