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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 하기에도 우리 게이들의 젊은 오늘은

입소하기 전 굳이 우리 집 주소를 물어 가더니, 누가 게이 아니랄까봐 전투화 뒤꿈치에 주름이 잡히기도 전에 편지를 써 보냈다. 4주 훈련 받으면서 애인도 아니고 부모님도 아니고, 나한테까지 이렇게 손편지를 써서 보내다니... 이렇게 게이게이한 동생에게 또 이름부터 게이인 내가 어찌 답장을 써주지 않을 수가 있나. 회사 근처 문구점에 가서 편지지 사와 가지고, 바로 쓰면 수정을 못하니 아웃룩에 업무 메일 쓰는 척 초안까지 써가지고, 피씨로 쓴 걸 또 손으로 옮겨 써 장장 세 장에 걸친 위문 편지를 보내줬다. 뭐, 게이끼리 주고 받는 위문편지라 해서 별다른 건 없다. 뭐 대충 이런 편지랄까...

  • 김게이
  • 입력 2015.05.20 07:20
  • 수정 2016.05.20 14:12

["Men Couple in Istria Croatia", Danny Fowler, 2007]

얼마 전 이쪽 친한 동생이 훈련소에 다녀왔다. 현역으로 복무하지 않는 터라 훈련소에서 4주 훈련만 받고 나왔는데, 원래 남의 집 자식이 군대 가면 그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간다더만 야구 몇 게임 보는 새 벌써 퇴소를 했단다.

입소하기 전 굳이 우리 집 주소를 물어 가더니, 누가 게이 아니랄까봐 전투화 뒤꿈치에 주름이 잡히기도 전에 편지를 써 보냈다. 4주 훈련 받으면서 애인도 아니고 부모님도 아니고, 나한테까지 이렇게 손편지를 써서 보내다니... 이렇게 게이게이한 동생에게 또 이름부터 게이인 내가 어찌 답장을 써주지 않을 수가 있나. 회사 근처 문구점에 가서 편지지 사와 가지고, 바로 쓰면 수정을 못하니 아웃룩에 업무 메일 쓰는 척 초안까지 써가지고, 피씨로 쓴 걸 또 손으로 옮겨 써 장장 세 장에 걸친 위문 편지를 보내줬다. 뭐, 게이끼리 주고 받는 위문편지라 해서 별다른 건 없다. 뭐 대충 이런 편지랄까...

...... 4주 정도야 토끼 사정하듯 빨리 지나가겠지만...... 자차제 꼭 바르고 세수 후에 스킨로션 꼭 발라. 4주만에 훅 가는 수가 있어...... 군살 없이 근육질이 된 너의 훈훈한 몸 기대할게. 물론 난 네 몸에 관심은 없다...... 얼마 전에 MLB에서 뛰는 한국계 선수 행크 콩거, 우리나라 이름 최현 선수가 눈에 들어오더라. 혹시 처음 듣는다면 퇴소 후 한 번 찾아보길 추천한다...... 징징이는 내가 목줄에 묶어 잘 가둬놓고 있을게. 남의 애인을 너무 함부로 말한 건가. 미안...... 끼는 적당히만 흘리고, 열외 잘 하면서 탈 없이 잘 돌아오길 바랄게......

나처럼 주로 야구의 4번 타자(최형우♡)나 포수(최경철♡♡) 스타일을 좋아하는 이 친구는 (편의상 이름을 붙이자면) 남자친구인 징징이와 같이 살고 있는데, 굳이 따지자면 원래 학교 후배인 징징이와 내가 먼저 친구였고, 징징이와 내가 서로의 남자친구를 소개시켜주면서 넷이 함께 친구가 되었다. 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 친구들은 우리를 무슨 엄마 아빠처럼 생각하는 것 같기도... 참고로 징징이는 자주 징징거린다.

우리는 직장인 커플이고 동생들은 학생 커플이라는 점에서 다른 점도 한 없이 많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닮은 점도 많은 커플이라(특히 두 커플 모두 동생이 징징대고 형이 참으면서 산다는 점이라든가...) 서로 바쁜 와중에도 시간 내서 친하게 지낸 것 같다.

처음 징징이와 본 건 이 년도 더 전이다. 그때 징징이네 커플은 연애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다고 그랬었고, 징징이는 기숙사에, (징징이의 남자친구도 편의상 이름을 붙이자면) 고등어는 따로 자취하며 살고 있었다. 참고로 고등어는 수영을 잘한다.

우리가 이 년 반의 동거 끝에 결혼식을 올리고 난 다음 이 친구들도 곧 동거를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얘네도 같이 산 게 이제 이 년이 다 돼 가는구나. 지금도 꼬꼬마들이지만, 처음 둘이 살림을 합치길 결심하기 전 초롱초롱한 고양이 눈으로 고사리 같은 손을 꼼지락 거리며 둘이 같이 살면 어때요? 뭐가 좋아요? 형네는 안 싸워요? 이런 것들을 물어봤던 것 같은데, 이제는 얘네도 프로 동거 커플, 20대에 과거가 생긴 남자들, 빼도 박도 못하는 서로의 반쪽이 되었다.

우리 부부가 사는 거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 한두 발자국 떨어져 지켜볼 수가 없으니 별다른 감흥을 가지기 쉽지 않지만, 옆에서 바라보는 이 동생들 사는 거는 참 보기가 좋다. 불안이나 걱정 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 매일을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막 나가는 게이의 대표주자로서, 예전에 동거를 결심하려는 징징이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다. 지금 감정에 가장 충실하라고. 아직 이 친구들은 학생이고, 앞으로 안정적인 생활에의 정착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그게 걱정돼서 지금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기쁨을 스스로 지레 포기했다면, 이 친구들은 가장 행복한 20대의 몇 년을 잃고 말았을 거다.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소중한 감정에 충실한 삶인 것 같다. 게이는 연애를 오래 못한다고들 하니까, 같이 살아봤자 헤어질 때 괴롭기만 하다니까, 게이 바닥은 원래부터 이런 거니까 라면서 미리 겁먹고 먼저 도망치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 있고 원하는 삶의 모습이 있다면, 어쩌면 일생 중에 가장 소중한 감정일지도 모를 그 마음에 좀 더 용기를 가지고 성실한 게 좋지 않을까.

물론 이건 단순히 결혼이나 동거 같은 특정 관계의 형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감정에 솔직한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반 이반 나눌 게 없는 이야기이지만,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는 게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불안한 미래보다 지금의 사랑에 더 집중하라고. 사랑만 하기에도 우리 게이들의 젊은 오늘은, 남의 집 자식 군대간 것만큼 빨리 지나가버릴 거다.

고등어 4주 군생활 전역 기념으로 한 번 봐야지 하다가 5월 말에 잠실에서 있을 엘지 대 삼성 야구를 보러 가자고 했더니, 징징이는 그날 학교를 가야 한다고 한다. 괜찮아, 어차피 나랑 고등어가 최형우 최경철 보러 가는 거니까 넌 사뿐히 버려야겠다. 구자욱 직관을 놓치는 건 네 업보려니 하여라. 쑈! 삼성의 최형우~ 쑈! 삼성의 최형우~ 오오 오오 오 무적엘지 최경철! 최경철!

(www.snulife.com에 게시했던 글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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