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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적 성숙의 끝에서, 불평등을 생각하기

보수의 관점에서 성장의 좋은 점만 강조할 필요도 없고 거꾸로 진보의 관점에서 성장의 나쁜 점만 과장할 필요도 없다. 또 모든 문제를 신자유주의로 환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사람들이 세계로 내포되는 과정이 확대되면서 참여와 기회뿐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불만과 배제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요컨대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사회적 배제가 사회적 통합을 대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내포를 통해 사람들을 사회 내부로 흡수하는 통치 과정은 근대 이후 점점 확대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기회와 동시에 다시 배제와 차별의 위험도 불균등하게 생긴다.

  • 김진석
  • 입력 2015.05.15 06:04
  • 수정 2016.05.15 14:12
ⓒShutterstock / Pan Xunbin

지식인이 무력해진 시대라는 진단은 한국 사회에서도 90년대 중반쯤 나왔다. 지식인 집단이 사회를 바꿀 힘을 잃어버리고 기능적 전문가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시대가 이미 한 세대 전에 밀려왔던 것이다. 물론 지금 정색하고 그 무력감을 한탄할 때는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십여년 동안 일어난 중요한 '사건'인 20대의 고용불안은 저 지식인의 '몰락'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왜냐하면 20대의 일자리 문제는 현재 사회에 파급력이 클 뿐 아니라, 비판적이고 종합적인 지식인의 몰락과 맞물리는 면이 크기 때문이다. 20대도 사회구조를 바꿀 힘과 관심을 상실한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해 말해보자.

고용불안 속에서 20대의 이 존재 변화는 일종의 '사건'이었다. 그들이 사회구조를 바꾸는 데 관심이 없고 그저 취업을 걱정하는 이기적인 세대가 되었다는 한탄과 비판에서부터, 이전 세대처럼 사회를 바꾸는 의지를 초월해 '득도한 듯' '달관한 듯' 산다는 풍자적 관찰까지 나왔다. 나는 여기서 이 관점들의 유효성을 따지는 대신, 비판적 지식인의 몰락과 비판적 20대의 몰락의 공통점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19세기에 시작된 '계몽주의적 성숙'의 시대가 전반적으로 막바지에 도달했다는 인식이다.

계몽주의 시대에 칸트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유치한 몽매에서 벗어나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성숙해지는 과정을 '계몽'으로 규정했다. 그만큼 '성숙'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문명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로 인식됐다. 여기서 두 집단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 첫째, 도덕성을 갖춘 비판적 지식인은 모든 인간에게 잠재적이고도 보편적으로 가능한 계몽의 완성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나라와 사회마다 각각 차이는 있지만, 도덕성에 근거해 사회를 종합적으로 비판하는 지식인의 존재는 사라졌다. 그런데 계몽적 기획을 실행할 두 번째 집단인 20대도 공부를 통해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힘과 여유를 잃게 된 것이다.

물론, '포스트모던' 시대가 도래했다는 진단이 내려졌던 서구의 80년대에도 계몽주의적 근대성은 이미 흔들렸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기껏해야' 사상의 차원에서, 곧 지식인 차원에서 그런 격변이 도래했던 것이다. 사회를 바꾸는 힘을 가진 젊은 세대에게는 아직 그런 격동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기어코 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젊은 세대가 고용불안에 떨다 못해 사회 구조를 바꾸는 일을 초월한 듯한 태도를 취할 때, 계몽적 성숙을 지탱하는 두 축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계몽적 성숙'이라는 과제를 역사적으로 뒷받침한 세 번쩨 축이 있는데, 그것도 크게 흔들리는 듯하다. 자유주의적 합리성에 근거해 사회와 경제를 관리할 수 있다는 믿음은 물론 도덕에 근거한 계몽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지만, 나름대로 '자유'의 성숙을 경제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뒷받침했다. 그런데 '경제 위기'와 관련된 여러 근본적 위험들은 경제적 합리성에 대한 이 신뢰가 무너지는 과정들로 여겨진다. 이 경제적 합리성의 위기는 경제학자들이 독자적으로 관리하고 다룰 문제일까? 아니다. 자유주의적 합리성에 대한 믿음은 철학적이고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경제적 합리성이 흔들리는 것 자체만이 위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야기하는 위험은, 위에서 언급한 두 성숙 과정의 붕괴와 함께,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데, 정작 사회는 그것의 원인에 대해서 차분하고도 진지하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학자들도 매스미디어나 정치인들처럼 듣기 좋은 말이나 모호한 말을 하곤 한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리버럴한(한국식으로 말하면, '진보적') 경제학자 스티글리츠는 평소 경제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대중을 겨냥해서 『불평등의 대가』라는 책을 내면서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 쏟아낸 말들은 다소 실망스러운 접근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경제위기에 직면해서 청년들의 분노에 공감하는 것은 당연한데, 그는 그것의 대책으로 "효율적이고 안정적이면서 동시에 공정한 경제"를 역설한다. 듣기엔 좋다. 그러나 과연 그 세 가지를 모두 성취하는 경제가 가능할까? 운이 아주 좋으면 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과연 지속 가능할까? 마치 그것이 지속 가능한 목표인 것처럼 말하고 요구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의 위험한 증상이 아닐까? 그 세 마리를 다 잡는 경제는 역사를 뒤돌아보아도 매우 드문 일이다. 요컨대, 비록 전반적 위기가 오지는 않더라도, 경제 차원에서도 합리적 성숙의 시대는 끝났을 수 있다.

그러나, "효율적이고 안정적이면서 동시에 공정한 경제"가 쉽지 않다는 말은 간단하지 않다. 다만 비극적 전망을 예비하거나 준비해야 하는 상황인가? 물론 쉽지 않은 상황이 인류를 기다리는 건 사실이다. 세대론의 관점에서만 보면, 성숙의 시대가 끝나자마자 고령화 시대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듯하고, 지구적 차원으로 보면 성장의 시대 뒤에 여러 모습으로 '지구 최후의 날'이 도래하는 듯이 보일 것이다. 전반적으로 불평등이 커지고, 따라서 소외와 배제가 확대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갈등과 불만이 커지든, 그것들은 단순히 배제와 '소외'의 프레임으로만 이해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 단순하게 말해, 근대 이전에 사람들은 사회 바깥으로 추방되거나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신분적으로 차별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상황은 바뀐다. 사람들은 더 이상 단순히 배제되거나 차별되지 않았다. 시민권 혹은 자연권사상도 그것을 막았다. 이제 사람들은 단순히 배제되거나 차별되는 대신 일단 점점 사회 내부로 내포되었다. 훈육되고 통제되는 과정도 이 사회적 내포의 한 과정이며, 그 훈육과 통제는 개인들의 '자발적 예속'이라는 묘한 복합성에 근거한다. 그래서 비록 불평등과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고 또 새로 생기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사회적 배제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부로 내포되는 과정에서 이차적으로 일어난다. 19세기 이후 발전한 복지국가의 목표도 다름 아닌 이 사회적 내포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이 사회적 내포(inclusion)는 당연히 순수한 사회적 '통합'과는 다른 것이다. 복지국가라고 모든 위험을 다 합리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있을 리 없었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사회 내부 공간으로 내포하고 그 내부 공간에서 사회적 위험을 관리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은 확고해졌고 확대되었다. 다만 문제는, 더 이상 사람들을 함부로 사회적으로 배제하는 대신 기본적으로 사회적 내포의 과제가 인정되고 존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만과 불평등은 사라지기는커녕 새로 생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사회 내부로 포함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기회를 가지면서 동시에 불균등한 배제의 위험에 내맡겨지는 과정을 '소내된다'고 말할 수 있다.

탈식민지 시대 이후 도입된 개발시대의 역설도 이 사회적으로 내포와 맞물린 소내되는 위험의 문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선진국들의 주도로 개발 시대가 시작되자, 기회와 성장이 확대되기는 했지만 동시에 불평등이 심화된 것이다. 흔히 신자유주의 시대로 불리는 1980년대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세계는 가까워지고 참여의 기회는 커졌지만, 동시에 새로운 갈등과 불평등이 생겼다. 그런데 여기서도 보수의 관점에서 성장의 좋은 점만 강조할 필요도 없고 거꾸로 진보의 관점에서 성장의 나쁜 점만 과장할 필요도 없다. 또 모든 문제를 신자유주의로 환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사람들이 세계로 내포되는 과정이 확대되면서 참여와 기회뿐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불만과 배제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요컨대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사회적 배제가 사회적 통합을 대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내포를 통해 사람들을 사회 내부로 흡수하는 통치 과정은 근대 이후 점점 확대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기회와 동시에 다시 배제와 차별의 위험도 불균등하게 생긴다.

물론 사회적으로 내포되는 모습은 사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회 내부로 내포되는 상태에서 생기는 위험, 곧 '소내되는' 위험은 과거의 '소외되는' 위험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소외되는 위험'에서는 명백한 물질적 결핍과 위계적 차별 때문에 배제와 불평등이 생겼던 반면에, '소내되는' 위험에서는 새로운 방식의 배제와 불평등이 발생한다. 모두가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기회와 자유는 확대되지만 불균형이 새로 생기고, 모두가 함께 경쟁할 기회를 가지는데도 불평등이 새로 생기며, 심지어 공정함에 대한 기준이 높아짐에 따라 새로 생기는 불만도 많다.

다른 말로 하면, '효율적이고 안정적이며 공정한' 경제나 민주주의의 문제는 단순히 그것을 이루기 어렵다는 데 있지 않다. 현재 사회는 사회적 내포를 위하여 점점 그 비슷한 과제를 모두에게 부과할 것이고 또 그것은 비록 불균등하기는 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효율성과 안정성과 공정성을 요구하면서 그 요구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새로운 불평등과 배제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이 불평등과 배제는 단순히 과거처럼 사람들이 강압적으로 사회 바깥으로 배제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개인들에게 효율성과 안정성과 공정성을 증대시키는 기회에 참여할 기회가 부여되고 또 부과된다. 그 과정 속에서 사회적 내포의 과제는 확대되는데, 얄궂게도 바로 이 과정에서 새로운 배제와 불평등이 생산되는 것이다. 사회적 배제는 그저 탐욕이나 신자유주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근대 이후 특징적인 사회적 내포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여기에 주목하지 않은 채, 배제와 불평등을 "효율적이고 안정적이며 공정한" 경제(혹은 민주주의)를 통해 관리하려는 모든 시도는 공허해 보인다.

* 이 글은 교수신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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